'고바우 영감' 이은 국내 두번째 대기록...40여년 집념 열매   

▲ 양병윤 화백은 제주시 한림읍 한림리 출신이다. 한림읍 비양도 앞에서 포즈를 취한 양 화백.

'시사만화의 불모지' 제주에서 시사만화의 꽃을 활짝 피운 '황우럭'이 오는 30일자로 1만회를 돌파한다.

1968년 5월10일자 제주신문(현 제주일보)에서 첫 인사를 한 양병윤 화백(68.한라일보)의 시사만화 황우럭이 40여년만에 1만회를 맞이한다.

일간지 시사만화 1만회는 국내에서 김성환 화백의 '고바우 영감'에 이은 두번째 기록이다. 격랑의 세월 속에 끈질긴 열정과 집념으로 시사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더구나 4컷 시사만화와 만평을 동시에 연재한 화백은 국내에선 처음이라는 점에서 더욱 값진 기록으로 평가된다.

시대의 대변자 황우럭을 탄생시킨 양 화백은 어려서부터 만화광이었다. 작가의 꿈을 키우며 독학으로 습작을 하던 고교 2년 때는 서울에서 발간되는 학생잡지 <학도주보>에 만평이, 월간잡지 <아리랑>에 만화가 실리면서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24세(1968년) 때 제주신문 화백 겸 기자로 입사해 황우럭 연재를 시작했다. 이후 편집국장과 이사,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붓 뿐만 아니라 펜으로도 일가를 이룬 셈이다.

 

'황우럭' 1회인 1968년 5월10일자 제주신문 4컷만화(왼쪽)와 1만회 돌파를 앞둔 2012년 6월11일자 한라일보 4컷만화.  

둥지를 옮겨 제민일보 논설위원과 제주매일 논설위원.화백을 거치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 2009년부터는 한라일보에서 황우럭과 만평을 끈질지게 그려왔다.   

칠순을 목전에 둔 '황우럭 양병윤'은 오늘도 여전히 세상의 모든 불평등을 향해 황우럭의 등가시 같은 붓끝으로 황우럭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황우럭은 40여년 동안 서민과 애환을 함께 하면서 민의를 대변하고, 부정과 불의에 목소리를 내온 격랑의 현대사를 살아온 증인이다.

60년대, 70년대 유신 독재정권과 80년대 서슬 퍼런 신군부 시절에는 혹독한 검열과 탄압을 특유의 익살과 해학, 촌철살인의 기지로 이겨냈다.

또 90년대 문민정부와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황우럭은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1만회 대업 완성을 목전에 뒀다.

간결한 선으로 표현되는 친근감 있는 얼굴, 때론 날카롭고 때론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황우럭은 이제 우리 곁에서 살아 숨쉬는 인물이 되었다. 

작가의 철학과 이념, 함축적으로 사회상을 풍자해온 황우럭은 언론 사료로서의 귀중한 가치는 물론 시대상을 꿰뚫게 하는 대하역사로 기록될 만하다.

황우럭이 아침을 맞는 무대는 제주이지만 그의 시선은 늘 전국, 세계를 향하고 있다. 황우럭은 또 과거와 현재, 미래를 넘나들며 사회 풍자를 상징하는 문화콘텐츠로 자리잡았다. 

제주시 한림읍 한림리 출신의 양 화백은 한국시사만화가회.한국만화가협회 회원, 제주만화작가회 고문, 제주언론인클럽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한라일보 논설위원 겸 화백이다. 제주도 문화상, 송하언론상을 수상했다. <제주의소리>

<김성진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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