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희의 시네마 줌(3)] 『사마리아』

 사전에 약속이나 한 듯 영화가 개봉될 때마다 논쟁거리를 만들어내는 김기덕 감독. 그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한다. 거미줄처럼 엉킨 사회문제를 어떤 모습으로 안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깡패와 여대생을 통해 우리 사회의 계급모순을 보여준『나쁜 남자』에서도 그랬고, 해병대의 이데올로기를 보여준『해안선』에서도 그랬다. 그는 늘 희망과 불행의 틈바구니에서 숱한 질문을 던져놓는다. 그때마다 당황해하는 쪽은 관객인 우리들이다.

 그의 10번째 작품인『사마리아』도 종전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가 관객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여전히 긍정도 부정도 아닌 부호로 얼룩져 있다. 원조교제를 세 장(바수밀다, 사마리아, 소나타)으로 다룬『사마리아』에서도 그만의 독특한 말줄임표와 느낌표, 물음표는 계속되고 있으며, 보편적인 사람들이 앞면에 내세우기 껄끄러워 뒷면에 숨겨둔 '그짓'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바수밀다(vasumitria)―인간에게 섹스가 가능한 나이는 몇 세부터이며, 또한 섹스가 가능한 합법적인 나이는 몇 세부터일까? 아직 교복도 벗지 못한 두 여고생은 인도의 창녀인 바수밀다를 내세워 몸을 파는 동업자가 된다.

▲ 재영과 여진의 즐거웠던 한 때.
유럽여행을 하기 위해서 라지만 설득력은 없어 보인다. 차라리 등교 때마다 승용차 안에서 들려준 아버지(이얼 분)의 유럽이야기가 암묵적이지만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그 때문일까. 길거리에 나가 삐끼질을 하지 않아도 컴퓨터와 핸드폰만 있으면 몸을 팔 수 있는 21세기의 풍속도는 그 어떤 세트도 거부한다. 아마 섹스에 대한 기대를 품고 영화관을 찾은 관객이라면 에이, 실망스러울 수도 있으리라. 그 어디에도 그와 같은 장면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바수밀다에서 눈길을 끄는 장면은 역시 모텔에서 몸을 팔고 나온 재영(서민정 분)과 망을 봐주는 여진(곽지민 분)이 시장통에서 사온 족발을 통째로 뜯어먹는 놀이터. 김기덕표 영화의 매력은 여기서부터다. 왜 하필이면, 햄버거도 피자도 아닌 어른들이 즐겨 먹는 족발이었을까?

 누군가의 질문에 답은커녕 의구심을 품기도 전에 영화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애초의 계획이었던 여행경비를 버는 일에서 벗어나 낯선 사내들과 즐기는 듯한 인상을 풍기는 재영에게 웃음을 지우라며 여진은 화를 내지만 두 소녀의 우정도 거기까지. 동성애로 비쳐질 수도 있는 두 여고생의 목욕탕에서의 나신 화면이 두어 차례 지나고 나면 바수밀다의 비밀도 비극으로 이어진다. 여진에 비해 출생신분은 물론이거니와 가족관계에 대해 단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는 재영은 경찰의 단속으로 모텔 창문에서 떨어져 빈 병처럼 깨지고 마는 것이다.
 

▲ 죽은 재영과 여진.
 사마리아(samaria)―재영이가 죽자 여진은 친구를 대신해 자신이 몸을 팔기 시작한다. 그러나 여진은 재영과는 또 다른 형태의 모습이다. 어쩌면 그것은 친구 재영이가 웃음을 흘리며 진행했던 매매가 아니라 환불에 가까운, 여진은 자신의 수첩에 적어둔 낯선 사내들을 찾아가 몸을 내준 뒤 친구가 벌어들인 돈을 돌려주기 시작한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몸을 팔아야 할 목표가 사라져버려서?

 11회분 촬영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사마리아』에서 우리가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김기덕은 콘크리트가 굳어 완성된 빌딩과 하우스를 보여주고자 함이 아니었던 것이다. 언제든 흩어질 수 있고 무너질 수 있는 모래성, 바로 그것을 보여주고 싶어했다고 할까. 그러므로 사랑은 몇 번을 만나고 얼마나 오래 사귀었는가 하는 문제는 참으로 하찮은 것일 수도 있다.

 소나타(sonata) ― 단짝이었던 친구도 죽고 없고, 수첩에 적인 남자들과의 거래도 끝이 났다. 여고생인 나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일까. 교문에 내 걸린 플랜카드는 변함없이 '성락가을축제' 기간이고 계절은 여전히 가을이다.

 딸을 둔 아버지가 있다면 세 번째 장인 '소나타'는 함께 보아야 할 장이다. 외동딸의 원조교제를 이미 알아버린 아버지는 딸과 '그 짓'을 한 사내들에게 피가 흥건한 보복을 일삼지만 잔혹한 장면도 오래가진 않는다. 지금은 무엇보다 치유와 화해가 필요한 시간. 딸과 함께 아내의 무덤을 찾아가는 여행길에서 그는 더 이상의 보복도, 형사라는 직업도 다 부려놓고 세상의 평범한 아버지로 돌아온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 수렁에 빠져 꼼짝할 수 없는 아버지의 승용차를 딸은 자신의 여린 손을 통해 바퀴에 짓눌린 돌멩이를 하나씩 하나씩 제거해낸다.

 그런 딸에게 아버지는 하룻밤 묵어갈 민박집에서 마더 테레사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날이 밝아오자 계곡 하류로 차를 몰고 가 이번에는 딸에게 운전을 가르쳐준다. 그때 자수를 선택한 아버지는 딸을 향해 다음과 같은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던가.

여기서부터는 너 혼자서 가는 거라고. 아빠는 따라가지 않는다고! 그런데 왜였을까, 치유와 화해가 절실했던 민박집에서 딸은 아버지한테 삶은 고구마 껍질을 벗겨 내밀고 아버지는 딸에게 감자 껍질을 벗겨 내민 것은? 딸을 목 졸라 죽인 뒤 자갈밭에 매장을 하고서는 딸의 두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려준 것도 같다. 소나타를. 분명, 꿈이었었다.

※ 필자인 박영희 시인은 1962년 전남 무안군 삼향면 남악리 태생으로 1985년 문학 무크 「民意」로 등단, 시집 「조카의 하늘」(1987), 「해 뜨는 검은 땅」(1990), 「팽이는 서고 싶다」(2001)를 펴냈으며, 옥중서간집 「영희가 서로에게」(1999)도 있다. 시론집 「오늘, 오래된 시집을 읽다」와 평론집 「김경숙」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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