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군칠 작
제주작가회의는 제58주년 제주4.3을 맞아 4.3평화공원내에 평화와 인권, 통일 등을 주제로 한 시 70여편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작가회의의 동의를 얻어 '4.3 연작시를 소개합니다 |
묵념, 5분 1초-팽나무
-정군칠
봄이 오기도 전에 날이 저문다
차고 어둔 방에 전원을 올린다
형광등이 몇 번이고 깜박이는 사이
오라동 언덕배기 보리밭, 늙은 팽나무를 생각한다
굵은 관절의 마디마다 잔가지를 내밀어 허공을 움켜쥔
마지막 오후 햇살이 만지작거리던 가지 끝,
수명이 다한 형광등은 여전히 깜박거리고
지금 저 천수관음의 손들이 더듬고 있는 것들이 궁금하다
그래, 천길 만길 어둔 밤의 벼랑이었지
깃을 치던 새들이 놀랄 새도 없이 날개를 꺾고
화염에 휩싸인 집들의 어깨가 힘없이 무너져 내릴 때
쩍, 쩍 흙벽 갈라지는 소리
배고픈 숟가락이 검게 그을리는 소리
탱탱 불은 어미소의 젖 터지는 소리
生의 망막이 터무니없이 들려진다
감을 수도 뜰 수도 없이 따끔거리는 눈
그 속으로 파고든 소리들의 광시증(光視症)을 다스려
한기를 뿜어내는 늙은 팽나무 한 그루
밑둥치 불거진 눈물의 혹, 그 검은 덩어리들이
미군 담요 한 장으로는 다 덮을 수 없는
푸른 보리밭을 살 가까이 끌어당기고 있다
*1948년 5월 1일 오라동 방화사건으로 민가 10여 채가 불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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