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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가 우리 곁으로 온다. 매주 한편씩. 시보다 사람이 큰 시인 김수열. 제주 섬에서 나고 자란 그가 30여년 정들었던 교단을 떠나며 시를 담은 도시락(島詩樂)을 들고 매주 월요일 아침, 독자들과 산책에 나서기로 했다. 살다가 시가 된 제주 시인과 그들의 시를 김수열 시인이 배달한다. 섬(島) 시인들이 토해 낸 시(詩)가 주는 소박한 즐거움(樂)이 쏠쏠할 테다. 시 낭송은 시를 쓴 시인이 직접 맡고, 김수열 시인은 시 속에 살아 숨 쉬는 소리를 끄집어내 우리에게 들려주기로 했다. 우리의 일상과 너무나 가까운, 우리의 생각과 너무나 닮은 시인의 목소리로.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가슴을 든든히 채워줄 ‘김수열 시인의 도시락 산책’에 <제주의소리> 독자들도 함께 동행하길 기대한다. [편집자]

[김수열 시인의 도시락(島詩樂) 산책](15) 개역 / 고훈식


나는 개역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개역을 너무 먹고 배 아팠던
가난한 추억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보리 수확이 끝나면 장마철
흐덥지근한 장대비를 바라보시며
“개역이나 맨드랑 먹으카이”라고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시던
어머니의 목소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
와다닥 와다닥 보리낭 불로
검붉게 볶아서 만든 보리 가루
보리밥에 버무린 개역 밥과
물에 칸 개역 범벅도 잊어서는 안 된다
비가 내리면 비를 맞고 놀던
철부지 어린 시절과
물결로 다듬어진 탑동 바다 먹돌과
흰 물살을 가르며 멀어지던
돌고래 떼도 잊어서는 안 된다
땀에 젖고 보리낭 불 매운 연기에
눈물 훔치던 어머니 얼굴과
우리 집 초가 지붕에 살던 참새 가족과
펑퍼짐한 물항도 잊어서는 안 된다

/ 개역 - 고훈식

고훈식 = 『표현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춤추는 뱀장어』, 『청동 개구리와 황금 두꺼비』, 『제주도 맑은 하늘 』등이 있음.

아무리 세상이 가파르게 흘러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시인은 와다닥 와다닥 보리낭 불 매운 연기에 눈물 훔치며 개역을 만들어 자식들 입에 물리던 어머니를 잊어서는 안 된다 합니다.
탑동 바다 먹돌과 흰 물살 가르며 멀어지던 돌고래 떼도 잊어서는 안 된다 합니다.|
초가지붕 아래 함께 살던 참새 가족과 펑퍼짐한 물항도 잊어서는 안 된다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탑동 바다 먹돌은 지금 없습니다.
초가지붕이 없으니 참새도 오지 않습니다.
‘미숫가루’가 있다지만 어디 ‘개역’ 만하겠는지요? 
까끌까끌하고 코시롱한 그 어머니 맛을 따라갈 수 있겠는지요? / 김수열

김수열 =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어디에 선들 어떠랴』, 『생각을 훔치다』, 『빙의』 등이 있음. 제4회 오장환문학상 수상

* 시·시낭송 / 고훈식 시인
* 도시락(島詩樂) 배달 / 김수열 시인
* 영상 제작 / <제주의소리> 박재홍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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