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9) 고딕체로 굳어있던 24시간이 흘림체로

noname01.jpg
▲ 번영로를 지나다 한 컷. ⓒ 김연미

출근시간에서 자유로워졌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변화를 준다. 스물 네 시간의 조각들이 좀 더 디테일하게 나눠지면서 굳어 있던 습관들을 깨기 시작한다. 아침 아홉시 출근 시간에 걸려 포기해야 했던 것들, 게으름의 껍질 속에 담아 둬야 했던 것들이 불쑥불쑥 제 주장을 한다. 나는 그 주장에 충실히 따르는 하인일 뿐이고. 

세상이 아직 시끄러워지기 전 새벽, 제2횡단도로 어느 길가에 차를 세우고 차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듣는다는 것, 시끄러웠던 세상의 소리들이 잦아드는 자정 무렵, 삼양 바닷가에 앉아 고기잡이 배의 불빛들과 눈을 맞춘다는 것은 비단 깨어있는 시간 연장의 의미만은 아니었다. 바다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버렸던 내 유년의 꿈이 파닥파닥 올라오고, 빗소리에 섞인 자연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느 순간 내 정신의 구석에 쌓여가던 먼지의 층이 조금씩 얇아져 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 느낌 위로 내 삶의 의미도 조금씩 윤곽이 더 뚜렷해져가고...

조금 일찍 길을 나서서 과수원에 도착하면 어둠의 먹물 속에서 드러나는 나무들의 실루엣. 그리고 서서히 그 실루엣 위에서 만나는 나뭇잎들의 맑은 얼굴.  이제 막 세수를 한 듯 물기 가시지 않은 얼굴로 나를 바라볼 때면 내 얼굴의 굵은 주름살들도 물기 촉촉이 머금어 부드러워질 것만 같은 것이다. 고딕체처럼 굳어 있던 스물 네 시간을 흘림체나 캘리그라피체처럼 채워갈 수 있다는 건 분명 행운일 터.  

번영로를 타고 한 시간 거리. 나의 새로운 일터까지의 거리다. 과속의 위험이 늘 숨어 있기는 하지만 시원스레 뻗은 도로를 막히지 않고 달린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살만한 일이다. 내 앞에서 ‘달리는 맛’을 감소시키는 아반떼 차량을 간단하게 추월한다. 핸들을 왼쪽으로 약간 틀고 엑셀을 밟는다. 아직 차량이 뜸한 시간, 일차선은 비어 있다. 적당히 속도를 높이고 아반떼를 앞지른다. 그리고 다시 오른쪽 깜박이. 순식간에 백미러에서 작아지는 차량을 일별하고 속도를 줄인다. 이제 내 앞을 방해하는 차량은 없다. 텅 빈 도로가 두 줄로 길게 뻗어 있다. 실선으로 이어지는 노란색과 하얀색의 가운데를 점 하나로 달린다. 

부지런한 사람들만 달리는 아침 여섯시의 번영로. 봉개마을을 지날 때까지도 날씨가 꾸물꾸물하다. 오후에 예비 되어 있다는 비가 좀 일찍 오려나. 남조로 갈림길에서부터 동쪽 하늘이 붉어지기 시작한다. 이윽고 왼쪽 창가에 얼굴을 드러내는 해. 지평선 위로 눈만 내 놓은 채 나와 시선을 맞춘다. 내 눈높이에 맞추어 숲을 만나면 숲을 건너고 오름을 만나면 오름을 돌아 다시 나타난다.  엄마의 외출에 저도 끼워달라는 아이처럼 차창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아주 잠깐 그렇게 나와 평행으로 달리던 태양은 세미오름 근처를 지날 무렵부터 저만큼 멀어져 간다. 더 이상 엄마품은 필요하지 않다는 듯. 

테두리 연필자국이 선명한 완전한 동그라미. 완전함이란 단어가 어울리는 건 역시 자연 외에는 없을 듯하다. 찌그러지거나 흠 하나 없는 완벽한 동그라미 얼굴이 세미오름 오른편 하늘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제 막 잠에서 깬 미녀의 얼굴이 저럴까. 세상의 먼지와 때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처럼 맑고 선한 얼굴이다. 

아침 사물의 낯빛은 모두 선하다. 과장도 꾸밈도 없이 눈가의 힘도 다 내려놓고 나를 바라본다. 나를 바라보는 그 선한 눈매에 나도 눈가의 힘을 푼다.  

사실 저 아침 태양을 보기 위해 새벽 출근을 했었다. 일출시간을 대강 짐작하고 일어나면 어느 날은 뒤쪽 베란다 창문을 통해 아침 해와 만났고, 어떤 날은 지하주차장을 나오자 바로 내 왼쪽 머리 위에서 빛나는 아침 해를 만나곤 했다. 좀 서둘러 나오면 아침 구름이 동쪽 하늘 낮은 곳에 매복해 있다가 납치하듯 태양을 가두어 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하고 만나는 아침 해. 행운의 날이다.

차들의 속도가 약간 느려진 것 같다. 저들도 나처럼 아침 해를 맞이하고 있는 건가. 갓길에 차를 세웠다. 잠깐 태양의 민낯을 즐기다 가자. / 김연미(시인)

a1.jpg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