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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돌, 돌담 문화 전승에 매진하는 제주 청년이 있다. 바로 돌빛나예술학교 조환진 대표다. ⓒ제주의소리
[화제] 돌빛나예술학교 조환진 대표, 석공 아버지 따라 가업...“전통 제주돌담 교본 만들고파”

운명처럼 제주돌과 얽힌 제주 청년이 있다. 돌챙이(石工, 석공의 제주어)이었던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며 제주돌담을 체계적으로 전승하는데 삶의 목표를 정한 돌빛나예술학교 조환진(44) 대표다.

뜨거운 공기가 섬을 가득 채운 한여름 7월 19일, 제주시 한림읍 협재리 돌빛나예술학교에서 만난 조 대표의 첫 인상은 ‘단단함’이었다. 큰 키는 아니지만 햇빛으로 그을린 피부와 탄탄한 팔뚝, 과묵한 표정이지만 간혹 보이는 밝은 미소까지. 돌을 업으로 삼는 사람임이 물씬 풍겼다. 

성글지만 단단하게, 제주돌담을 쌓아 올렸던 제주 최고의 장인, 아버지를 따라 '돌챙이'의 삶을 걷고 있는 그는 원래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화가다.  

그런 조 대표가 돌담쌓기를 알리는 강의를 시작한 것은 지난 2015년. 한림읍 주민자치위원회 특성화프로그램으로 출발해 서귀포예술섬대학 프로그램에 이어, 제주연구원의 제주밭담 관리전문인력 양성 초보과정 아카데미까지 올해로 3년째다. 길다고 볼 수 없는 시간이지만, 그가 돌담 그리고 제주돌과 맺은 인연은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올해로 100세를 5년 남겨둔 조창옥 옹은 평생을 제주 돌챙이로 살아온 장인이다. 그의 아들이 바로 조환진. 아버지가 돌로 창고, 집을 짓는 모습을 기억하는 건 중학교 때부터다. 1993년 제주대 미술학과에 입학할 때 까지만 해도 직업적으로 돌을 다룬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는 “줄곧 제주에서만 지내다가 대학교 2학년 시절, 혼자 강원도 정선으로 여행을 떠났다. 청량리역에서 정선행 기차를 타고 가는데, 창 밖 풍경에 돌담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돌담이 제주에만 있는 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저 돌덩이였던 제주돌과 돌담이 보물처럼 보이기 시작했다”고 기억했다.

기차 여행 깨달음 이후로 조 대표의 인생은 신기하게도 제주돌과 엮여져 갔다.

학교 다니는 동안 제주대 사진동아리 JPC에 가입해 돌담을 찍고 그림도 돌담에 집중했다. 졸업 후 '생각하는 정원'에 취업해 성범영 원장으로부터 3년간 돌담 쌓는 일을 배웠고, 김영갑 갤러리로 찾아가 생전 김영갑 작가로부터 4개월 동안 사진을 다시 배웠다. 

조 대표는 “김영갑 작가님이 하신 말 가운데 지금도 기억나는 게 있다. ‘돌담을 사진 찍고 그림 그리고 직접 쌓는 건 제주에서 너 뿐이다. 돌을 가지고 일해라. 제주가 가진 가장 큰 특징은 돌’이라고 했다. 성범영 원장님도 제주는 돌이 보물이라고 강조했다”고 밝혔다.

조 대표의 돌챙이 삶은 2003년 결혼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특히,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지은 자신의 돌집은 여러모로 그에게 큰 의미가 있다. 본업으로 조경일을 하면서 3년 동안 설계부터 건축까지 도맡았고, 당시 80세였던 아버지와 함께 집을 지었다. 둥그런 모양으로 지어진 조 대표의 집은 누구라도 시선을 고정시킬 만큼 신기하면서 매력적이다. 돌집 덕분에 돌담 일이 늘어나면서 집중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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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씨와 조 씨 아버지가 3년 동안 지은 돌집. 독특한 디자인이 인상적이다. 제공=조환진.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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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대표(오른쪽)와 그의 아버지 조창옥 옹. 사진 촬영=이겸, 제공=조환진. ⓒ제주의소리

그렇게 평범한 돌챙이로 살 수 있었지만, 또 다른 계기는 그를 전승자의 길로 이끌었다.

조 대표는 “조경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협재리 별장 공사 현장이었는데, 돌담 쌓는 업체가 와 있었다. 지금은 흔하지만 그 분들은 돌과 돌 사이를 빈틈없이 기계로 깎아서 쌓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신기함에 배우면서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는데 안 된다고 했다”라며 “이유는 내가 기술을 배우고 난 뒤에 따로 사업을 할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걸 겪고 나니 내가 직접 돌담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설명한다.

그는 “제주사람이라면 간단히 돌담 쌓는 방법은 알아야 하지 않냐”라고 반문하며 “그 뒤로 현장에서 경험을 더 익히면서 2015년 돌빛나예술학교를 만들고 지금껏 활동하고 있다. 처음에는 돌담 쌓는 일에 집중하고 토요일 정도에 수업을 했지만 올해는 수업 비중이 더 커졌다”고 덧붙인다. 여전히 정정한 아버지는 돌담학교 교사로서 든든하게 힘을 보태고 있다.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돌담을 가르친다고 해도, 40대 젊은 나이에 아직은 많은 것을 배우고 싶은 것이 조 대표의 마음이다. 그래서 지난해부터 제주대 지리교육과 대학원에 입학했고, 지도교수인 오상학 교수와의 인연으로 오는 8월 영국·아일랜드도 방문하게 됐다. 조 대표는 일행들과 함께 영국돌담협회(Dry Stone Walling Association of Great Britain), 아일랜드돌담협회(Dry Stone Wall Association of Ireland)를 방문한다. 영국돌담협회의 경우, 올해로 창립 49년이다. 다른 문화권이지만 고유한 돌담 문화를 긴 시간 동안 어떻게 지켜왔는지 배우기 위해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찾는 것이다.

조 대표는 “나도 얼마 전까지 제주에만 독특한 돌과 돌 문화가 있는 줄 알았다. 근데 공부를 하다 보니 화산지형에 돌담 문화를 가진 나라들이 있더라. 제주만 알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 영국행을 결정했다”며 “언젠가는 제주와 영국, 아일랜드 사람들이 오고가는 교류를 하고 싶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 한림읍 협재리에 위치한 돌빛나 예술학교.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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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치원에서 진행하는 돌빛나예술학교의 찾아가는 돌담 체험. 제공=조환진.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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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귀포산업과학고등학교의 돌담 수업. 제공=조환진.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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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빛나예술학교의 불턱 만들기 교육. 제공=조환진. ⓒ제주의소리

그가 바라보는 제주 돌담의 현 주소는 관심은 높아지나 하나 된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 파편화된 상태다. 제대로 돌문화를 연구, 전승하는 대표 단체도 없다. 조 대표는 “요즘 돌담 쌓는 방식은 전통 방식이 아니다. 비용을 절약하고 효율성만 따지다보니 시멘트 같은 것도 사용한다”며 “역사가 긴 영국협회는 돌담 교본을 제작해 문화를 체계적으로 전승하고 있다. 윗 세대 기술과 전통 양식을 잘 기록해 놓고 전수해야 하는데 지금도 늦었다. 제주 전통 방식의 돌담 쌓는 교본을 만들고, 제주돌과 돌 문화를 사랑하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함께 (가칭)돌문화협회 같은 모임도 꾸리고 싶다”는 포부를 전했다.

'덕후'라는 신조어가 있다. 어느 특정 분야에 과도하게 몰입해 상당한 정보를 지닌 사람을 일컫는 일본어 ‘오타쿠’를 한국식으로 바꾼 단어가 바로 덕후다. 

조 대표가 제주돌 덕후가 된 건 어쩌면 운명처럼 보인다. 대를 이어 돌을 만지고, 살면서 만나는 인연과 경험 모두 돌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다. 결국 운명을 따라가는 그가 만들 새로운 제주돌의 역사가 기대되는 이유다. 돈벌이도 얼마 되지 않는 돌담 교육을 계속 이어가고, 여러모로 발품을 팔아가며 사서 고생하지만 제주다움에 대한 확실한 애정을 지닌 조 대표. 인터뷰 말미 '왜 돌담이 좋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 속에는 바람직한 덕후의 분위기가 가득했다.

“해가 뜨거나 질 때, 어스름한 하늘빛에 돌담이 비추면 검정색 실루엣이 보입니다. 돌담 사이사이로 빛이 탁 들어오는 모습은 언제 봐도 황홀하죠. 돌과 돌 사이 구멍 모양은 하나도 같은 게 없어요. 가지각색이에요. 그 사이로 비추는 빛의 모양들...정말 훌륭한 예술 작품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문의: 돌빛나예술학교 ( http://blog.naver.com/dolbit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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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씨가 촬영한 제주돌담. 제공=조환진.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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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씨가 촬영한 제주돌담. 제공=조환진.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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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씨가 촬영한 제주돌담과 하늘. 제공=조환진.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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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씨가 찍은 제주돌담. 제공=조환진.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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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씨가 찍은 돌담 사진. 제공=조환진.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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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직접 만든 통시 옆에 자리한 조 대표.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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