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평화기행(3)] 진실규명 첫 단추 메기시작한 '여순사건'

▲ 구례군에 세워진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탑.ⓒ고유기
# 한국전쟁의 기억을 압도하는 여순사건
구례, 여수, 함평 등 지리산권 일대에 있어 전쟁의 기억은 한국전쟁보다 여순사건이 더 강렬하게 부각된다.

전남대 정호기 교수(사회학)에 의하면 이는 반란군에 대한 국가보복 형태로 진행된 여순사건의 기억이 한국전쟁의 그것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순사건 피해는 반세기가 넘도록 그 진상규명조차 이뤄지지 못했다.

여순사건의 빌미가 된 제주4.3이 특별법 제정과 대통령 사과 등으로 해결의 전기를 맞고 있는 것과 견주어 이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아마 여순사건만이 아니라 전쟁의 피해 또한 혼재돼 있어, 제주4.3과 같은 개별사건(?)에 비해 그 폭의 면에서 큰 한국전쟁 전후 양민학살 사건이야말로 국가적 범주의 해결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지리산 서부지역에 비해 동부지역은 여순사건 보다 한국전쟁의 피해의식이 더 강하게 작용한다고 한다.

 # 여순사건 해결전기 마련되나

아직은 섣부른 감이 있지만 여순사건이 본격적인 해결의 국면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작년 5월 국회를 통과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의한 진상조사 작업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구례의 희생자 위령탑 준공행사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여순사건 구례유족회 박창근 회장. 그는 작년 과거사법제정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이제야 위령하게 되었다고 말했다.ⓒ고유기
하지만 아직은 복잡해 보인다. 희생자 위령탑 준공행사 현장에서 만난 구례희생자유족회 박창근 회장은 '처벌'을 이야기 한다.

여전히 여순사건 당시 토벌을 주도했던 당시 12연대장 대리역을 했던 백인엽이 여순사건의 가해를 부정하며 버젓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과거사법은 진실과 화해의 법률이다. 하지만 가해자의 '인정하지 않는 과거'를 그는 용납할 수 없는 것 같아 보였다.

앞서 전남대 정호기 교수는 과거사법에 의한 해결이 어려운 핵심적인 이유가 '유족들의 보이지 않는 입장변화'에 있음을 조심스럽고도 솔직하게 드러낸다. 유족들의 생각과 말이 적어도 뉘앙스가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지리산권 학살피해와 관련된 지역별 유족회들의 사정과 그에 따른 입장과 태도가 다양하게 걸쳐있는 것도 큰 과제다. 그는 "여순사건의 해결은 유족에게 달려있다"고 말한다. .

오랜 동안 '묻혀있지는 않았지만-드러내지 못했던' 여순사건의 해결전기가 '과거사법'에 의해 마련되었다. 이는 유족의 입장에서 그렇기 때문에 '일단 받고 보자'였다.

그러나 또한 과거사법이 가해자의 규명과 처벌을 넘어 용서와 화해를 모토로 하고 있고, 개별사건 보다 한국전쟁 전후의 양민학살을 총체적으로 다룸으로써 '한계'가 있음을 유족들은 또한 보고 있는 것이었다.

진상조사는 이제 시작인데 이미 유족들의 생각은 적어도 현상 이면에서 여러 가지로 표상되고 있는 듯 하다. 여순사건의 해결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주목되는 대목이다.

# 구례 위령탑 조성은 여순사건 해결의 상징적 단계

▲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탑에 분향하는 참가자들.ⓒ고유기
여순사건에 대한 연구는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구례'는 연구작업의 사각지대였다. 그래서 여순사건의 진실찾기에 있어서 구례는 사실상의 '마지막 단계'로 얘기되고 있다. 그런면에서 이번 위령탑 조성은 여순사건 해결과 관련해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또한 구례 위령탑 조성은 여순사건 해결을 위한 '최초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올해 4월 순천의 위령탑이 조성되었지만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비롯한 온갖 소설의 소재로 등장하는 구례의 위령탑은 여순사건 민간인 학살 위령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 상징적이다.

▲ 기행 참가자들이 지리산 문수골 계곡에서 정호기 교수와 대담을나누고 있다.ⓒ고유기
정호기 교수에 따르면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희생된 민간인의 수는 약 100만명에 이른다. 여기에서 지리산의 '전쟁과 학살'은 소위 '빨치산 투쟁'으로 인해 휴전 이후까지 지속되는 한국전쟁 '제2의 전선'이다. 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이후 이듬해 후반에 들어서 사실상 전쟁의 광포는 끝을 보지만 지리산 일대의 '전쟁'은 56년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구례의 위령탑 조성을 시발로 이어질 전망인 여순사건 진상규명과 위령의 사업은 이 '기나긴 전쟁'의 정리와 청산의 일로 보인다.

하지만 난관은 있다. 여순사건의 진실찾기에 있어 여순사건의 특성상 '당사자'로부터의 기억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박창근 구례 유족회장은 작년 과거사법 제정 이후 피해신고가 접수되고 있지만 건수가 많지 않단다. 그것은 당시에 죽어간 희생자들이 주로 '미혼자'라는 점 때문이다. 신고가 이뤄지더라도 대부분이 희생자의 형수, 사촌과 같은 간접연고가 전부라고 한다.

여순사건의 해결이 당시 희생자 유족들이 주동력이 되지 못하고 연구작업의 성과측면에서 조금은 협소하게 다뤄지지 않을까하는 노파심은 그래서 생긴다. 그러나 여순사건의 진실찾기가 본격 시동되어지는 지금, 우리는 제주4.3의 연장에서 이를 주목하고 함께 해야 하지 않을까? 구례 위령탑 준공행사에 제주의 유족들이 함께 했었으면 어땠을까?

# "뼈와 뼈는 서로 통한다"
이번 구례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탑 준공행사에서도 어김없이 그 곳에 함께 한, 그러나 이제 너무 늙어버린 유족들의 눈물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눈물은 상심의 눈물이기도 하지만 비로소 시작되는 '드러내기'에 대한 회한의 눈물이기도 했다.

그래서 위령탑에 새겨진 헌시는 이를 이렇게 말한다.

"마침내 생명평화의 때가 무르 익어 하늘이 부르고 땅이 화답을 하니 아버님, 어머님, 형님, 오빠, 동생 -- 마음 놓고 울어도 보고 대성통곡도 하며 살아남은 우리가 분명히 대답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 헌시의 전문을 싣는다.(실제 위령탑에는 헌시의 주요 내용만 새겨져 있었다)

뼈와 뼈는 통한다

                                  이원규 (지리산 시인)

마침내 대가 되었으니
하늘이 부르고 땅이 응답하였습니다

옛말에
뼈와 뼈는 서로 통한다 했습니다.
죽은 자들의 뼈가 아프니
살아남은 자들으 뼈도 일생 동안 아프고
아프다 못해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
마침내 억울하게 죽어간 희디흰 뼈들이 일어섰습니다

어디선가 수십만 마리의 되새 떼가 날아와
온 하늘 먹구름의 군무를 추더니
1948년 여수 순천을 지나 구례 지리산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요
재판도 없이 죽어간 수많은 민간인들
지리산 구례 땅의 모든 마을 마을은
희망의 삶터가 아니라
온통 학살의 땅이었습니다.
죄 없는 백성들이 죽고 또 서로 죽이는
학살의 역사, 야만의 역사였습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살아남은 자들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분단 반세기가 지나도록 재갈이 물려야 했지요
밤마다 원혼들이
반딧불처럼 날아다녀도
살아남은 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혀을 깨물며 무릎을 꺾어야 했지요

그리하여
죽은 자와 산 자의 소통은
뼈와 뼈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봉분도 없는 저 캄캄한 구덩이 속의
부모 형제와 선후배 죽마고우들
그 분들의 희디흰 뼈가 아프니
살아남은 자들의 뼈도
일생동안 쑤시고 아플 수밖에요

지난 반세기 동안
죽은 자는 형이요
죽인 자는 동생이었습니다
죽은 자는 아버지요
죽인 자는 아들이었습니다
죽은 자는 스승이요
죽인 자는 제자였습니다
살기 위해 그렇게 강요당해야만 했습니다

총을 든 자가
붓을 든 지식인을 죽이고
캉을 든 자가
호미를 든 농부를 죽이고
무고한 민간인을 재판도 없이 학살했으니
법도 아닌 법, 국가보안법의 날들이
차라리 전쟁보다 더 무서운
집단 광기의 날들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한심하고 부끄러운 일입니까
마침내 때가 되었으니
하늘이 부르고 땅이 응답하였습니다
마침내 희디힌 뼈들이 일어서서
죽임의 역사, 광기의 역사와의
단절을 선언했으니
이제는 살아남은 우리가 대답할 차례입니다

마친내 생명평화의 때가 무르익어
하늘이 부르고 땅이 화답을 하니
아버님, 어머님, 형님, 오빠, 동생 -
마음 놓고 울어도 보고 대성통곡도 하며
살아남은 우리가
분명히 대답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못난 국가도 국가요
못난 조국도 조국이라면
마침내 때가 왔습니다
국가의 이름으로, 조국의 이름으로
반성할 것은 반성하며
분명히 대답을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지리산 노고단이 환하게 바라보이는
바로 여기 이 자리에 위령탑을 세우나니
원혼들이시여, 원혼들이시여
이제 그 모든 한을 풀고 고이 고이 잠드소서

"제주야말로 '평화' 하나만 꼬옥 붙들고 갔으면"
- 지리산 계곡에서 만난 전남대 정호기 교수와의 인터뷰

▲ 전남대 정호기 교수는 '평화도시'가 유행처럼 번지는 것이 오히려 아픈역사의 치유를 왜곡할 수 있음을 우려했다.ⓒ고유기
Q. 꾸준한 진상규명운동이 있었지만 제주4.3특별법은 마치 '기적처럼' 만들어졌다는 평가도 있다. 당시 중진 위치에 있던 제주 출신 국회의원들, 여야 정치구도들이 법제정 과정에 작용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떻게 생각하나?

A. 당시 제주4.3특별법만 상정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약간의 시차는 있지만 '민주화 보상법'과 '의문사 진상규명법'이 패키지로 작동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법들이 국회에 올라오게 된 배경에는 민간 차원의 오랜 진상규명 요구가 있기 때문이다. 결코 기적이 아니다. 바로 '민주화의 힘'이라고 본다. 또 5.18이 비교적 근래의 사건이긴 하지만 법제정이 이뤄지는 등 5.18의 시너지도 있을 것이다.

Q. '과거사법'의 의미와 한계는 뭐라고 보나? 과거사법으로 표현되는 노무현 정부의 과거청산 과업이 결국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딜레마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A. 법제정 과정에 논란이 있었다. 우선 책임자 처벌규정이 누락됐다. 또 당시 좌익에 의한 학살도 공평하게 다룰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우익의 준동을 오히려 불러온다는 위험 또한 있었다. 그리고 그 범위의 문제이다. 일제때 해외에서 벌인 독립운동까지도 포함시킬 것이냐와 같은 것이다. 또 의문사 문제도 있다. 하지만 의문사 문제만큼은 지금 분리돼 다뤄지고 있다. 과거사법은 분명 태생적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의미있는 진전이다. 이것이 혼란이지만 또한 역사적 성과이다. 문제는 이러한 한계를 누가 보완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유족의 역할이 그래서 중요하다고 본다. 유족입장을 우선 고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의 힘이 모아지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Q. 제주는 평화의 섬을 지향한다. 실제로 국가에 의해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었다. 객관적 위치에서 평화의 섬 제주의 진로는 어떻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A. 최근 평화도시가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다. 미군기지 이전으로 용산도 평화도시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여수도 평화도시 컨셉을 얘기한다. 강원도도 그렇고…. 그런데 광주는 '문화수도' 이야기를 도입하면서 5.18을 바탕으로 한 평화 메시지를 왜곡시키고 있다. 실제로 여러 5.18의 사적지들이 문화도시 개발로 사라지고 있고 또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하나만 합시다"라고 얘기하고 싶다. 이는 아픈역사 - 평화로의 승화와 같은 단계식 단순도식을 추종하지 말자는 얘기도 된다. 지역별로 자신의 역사를 더욱 풍부화 시키는 일이 더 중요하고 이런 차원에서 할 일이 아직도 많다. 그러 면에서 특별법 제정에 이어 대통령 사과, 평화의 섬 지정으로 이어진 제주의 행보에 있어서 '평화'는 부여잡아야 할 숙명이라고 본다. 번영(경제개발) 따로, 평화 따로 식의 설정은 오히려 제주의 번영마저 기형화 시킬 수 있다고 본다. 이는 과거청산이 평화로 이어지는 체제가 자연스러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면에서 더더욱 그렇다. 제주에 벌써 군사기지 건설이 추진되고 있지 않나? 광주에도 미 패트리어트 미사일 문제가 있었다. 과거의 전쟁터가 다른 유형일 수 있지만 또 전쟁터가 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평화의 정착은 미래전략일 수도 있지만 진정한 과거청산의 길일 수도 있다.

Q. 그러면 '평화'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A. 개인적으로 평화는 "자연수명을 누리자"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그런데 자연수명을 누릴려면 여러 가지 조건이 따라 붙는다. 우선 건강해야 되는데 이는 현대사회의 스트레스와 강박에서 안전해지는 일이다. 인권도 더욱 고양되어야 한다. 일상의 행복과 관련된 여러 환경도 조건이 된다. 때문에 평화란 '적극적 평화'라야 진짜 평화가 되는 것이라고 본다. '전쟁이 없는 상태'가 평화라면 이는 오히려 '전쟁이 있는 상태'를 염두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소극적 평화가 어디 있고 적극적 평화가 어디 있냐? 다만, 편의상 진짜 평화를 말하려면 적극적 평화를 얘기해야 하는 구조이다.

※ 고유기 님은 제주참여환경연대 사무처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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