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덕의 뜻과 편액,벽화에 깃든 이야기도 관심거리

 

   
 
▲ 제주읍 성문을 지키던 돌하루방은 여전히 관덕정 앞에서 늠름한 모습으로 서있다
 
일제에 의해 처마가 잘리는 등 훼손됐던 보물 제322호인 관덕정이 옛 모습을 되찾았다.

제주시가 국비 27억여 원을 들여 지난 2003년 12월 11일 공사를 발주한지 2년 8개월, 그리고 광복을 맞은 지 61년 만에 관덕정 복원공사가  마무리된 것이다.

관덕정은 복원과정에서 전면해체 후 부식과 변형된 목부재를 교체하는가 하면, 원형을 크게 상실했던 지붕보수와 정자 내부의 대수렵도·십장생도·적벽대첩도 등 총8점의 벽화도 복원했다. 또 오랜 세월에 빛바랜 단청의 보수도 마무리했다.

 
 
▲ 전면해체후 복원한 관덕정 전경. 중수식을 앞두고 있는 2006년 8월18일 오전 촬영
 

#관덕정은 세족30년 안무사 신숙청이 창건, 당초 편액도 안평대군 글씨

관덕정은 안무사 신숙청이 정사에 임한 다음 해인 세종 30년(1448) 가을에 창건한 것이다. 당시 관덕정에 대해 “여기에는 기둥이 셋으로 되었고 그 앞뒤를 보태고 그 좌우를 보태어 넓혀 단청을 엷게 하니 크고 밝고 아름답고 격식을 얻어 진실로 온 고을의 장관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탐라지(耽羅誌)에서도 ‘1448(세종30년)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창건되었으며 1480년(성종 11년) 양찬 목사가 중수한 바 있고, 1690년(숙종 15년) 절제사 이우항이 재건한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와 개축과정을 거쳤으며 1882년(고종 19년)에 박양선 목사가 관덕정을 중건하였다고 한다’고 전하고 있다.

   
 
▲ 관덕정, 호남제일정, 탐라형승이란 편액이 정자 처마 아래로 차례차례 보인다.
 
편액을 쓴 것은 안평대군이나 화재로 없어지고 지금 걸려있는 것은 아계(鵝溪) 이산해의 필적이다.

그리고 관덕이라는 이름은 '사자소이 관성덕야(射者所以 觀盛德也)'라 하여 '평소에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닦는다'는 뜻이며, 문무의 올바른 정신을 본받기 위해 지어진 이름이다.

#날아갈 듯 한 팔작지붕의 15척 처마 되찾아, 일제의 잔재 완전히 씻어내

창건이후 성종 11년(1480)부터 고종 20년(1883)에 이르기까지 여덟 차례 중 · 개건한 기록이 나온다.

일제하 1924년에 15척 이상 나온 처마를 2척 이상 잘라버리고 제주도 처마 곡선의 맛을 일본식 지붕으로 바꾸고 말았으며 흰 페인트를 칠한 문을 다는 등 관덕정의 원래 면모를 변질시키고 말았다.

   
 
▲ 관덕정이 복원을 마치고 제주도민과 한결 가까워진 모습이다.
 
이번 완전한 해체보수로 이제 광복61주년만에 일제에 훼손됐던 관덕정은 그 잔재를 완전히 씻어냈다.

해방후인 1969년에 다시 대대적인 해체수리를 하고 단청을 했지만 제주건축의 개성을 살리지 못하고 육지의 동시대의 어느 건물과 유사한 건물로 변모해 지역적 특징을 잃은 채 30년 이상을 지내왔다.

관덕정은 이중 기단 위에 세워진 전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익공계 팔작지붕으로 면적은 69.4평이다.

관덕정의 평면은 정면 3칸에 좌우익(날개)이 있고, 측면 2칸에 전후퇴(마루)가 있다. 주칸 치수는 정면이 12척 4촌, 좌우 협칸이 역시 12척 4촌, 좌우 익칸이 10척 2촌이고 측면의 전후퇴칸이 10척 2촌, 측칸이 각각 11척 1촌 8분이다.

   
 
▲ 정자 내부의 창방에 그려진 벽화에는 각각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정자에 걸린 편액과 정내 7점의 벽화 보는 재미도 ‘쏠~쏠해’

‘觀德亭’이란 편액을 최초로 쓴 것은 안평대군이나 그 편액은 화재로 없어지고 지금 걸려있는 것은 아계(鵝溪) 이산해의 필적이다.

정자내 천장의 '탐라형승'은 방어사 김영수(1780년)의 편액이고, '호남제일정'은 방어사 박선양(1881-1883)의 편액이다.

호남제일정이라는 것은 호남에서 제일가는 정자라는 것으로 이를테면 밀양영남루가 영남의 제일누인 것에 비견된다.

그리고 관덕정 대들보 아래 창방 부분에 7점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오랜세월에 퇴색되어 알아보기 힘들었던 벽화들도 이번 보수과정에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벽화를 차례차례 감상해보자.

   
 
▲ 정자 내부의 창방에 그려진 벽화에는 각각의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다.
 
'취과양주귤만헌(醉過楊州橘滿軒)' - 두보가 귤을 던지는 여인의 교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자약 했다는 고사를 그림이다.

'상산사호(商山四浩)' - 난을 피해 바둑을 두는 선비들의 모습이다.

'십장생도(十長生圖)' - 장수를 상징하는 열가지 생물의 모습이다.

'적벽대첩도(赤壁大捷圖)' - 유비와 손건이 조조를 격파하는 모습이다.

'대수렵도(大狩獵圖)' - 고려 관원들이 수렵하는 모습이다.

'공명탄금도(孔明彈琴圖)' - 적군을 앞에 두고 태연하게 거문고를 타서 적군을 물리치는 제갈공명의 모습이다.

'홍문연(鴻門宴)' - 유방에게 연회를 베푼 후 역습하려다 후환만 얻은 항우
이들 벽화와 함께 관덕정은 보물 제322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관덕정은 제주역사의 영욕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어

관덕정은 제주인들 에게는 단순한 정자 이상의 의미가 있다. 관덕정은 제주도 역사의 산증인이며, 관덕정만큼 제주도 역사의 영욕을 말없이 지켜본 목격자는 없다.
인조반정 이후 실각한 광해군이 제주에서 사망하자 당시 제주목사였던 이시방은 광해군이 시신을 염습하여 관덕정에서 안치하였다.

   
 

▲ 백여년 전의 쇠락한 관덕정의 옛 모습

 

   
 
▲ 일제시대 관덕정 앞에서 시장이 열리던 모습
 
근대로 들어오면 일부 천주교도들의 횡포와 봉세관의 조세 수탈에 항거하여 일어난 '신축년 항쟁(이재수난)'의 무대도 관덕정 광장이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한 때 오일장터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며 4·3의 기폭제가 된 3·1 시위사건이 있었던 지역이기도 하다.

또 1949년 6월, 4·3 기간 동안 무장대를 지휘했던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의 주검이 나무 십자가에 매달려 도민들에게 전시됨으로써 4·3의 종언을 알린 곳도 관덕정 광장이었다.

   
 
▲ 1960년대, 관덕정 앞에서 한라산등반대회의 개회식 모습
 

87년 이후에는 재야 및 시민단체의 각종 집회가 단골로 열려는 지역으로 여전히 제주인의 마음속에는 중심지로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제주성문을 지키던 돌하르방 3기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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