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그리고 아시아 - 아시아 3개국 탐방기 (2)]
민주항쟁지도자 출신 탁신정권이 민주화 말살에 앞장서

광주의 「5.18 재단」은 올해로 3년째 국내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5.18 아카데미 해외연수 프로그램을 실시해오고 있다. 이번 아카데미는 태국, 네팔, 필리핀를 대상으로 ‘민주화, 민주주의, 그리고 아시아’라는 주제로 이뤄졌다. 3박4일의 국내 사전워크샵과 8박 9일의 해외연수 일정으로 이뤄진 이번 아카데미에 제주에서는 참여환경연대 고유기 사무처장이 참가하였다. 제주의 소리는 고유기 사무처장의 연수기를 5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주>

▲ 10.14 민주화운동을 기리기 위해 방콕 시내에 만들어진 민주주의 기념탑
민주와 반민주의 공존(?)

얼마 전 태국 남부의 ‘파타디’지방에서는 300여구의 시신이 발견됐다. 현재 NGO 등의 공조로 진상규명이 추진되고 있지만 오리무중이다. 정부의 태도는 미온적이다. 2004년에도 78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 58명 관련자를 대상으로 재판이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 1/3정도의 진척이 있을 뿐이다.

1500여명이나 되는 증인이 있어도, 재판은 빈번하게 연기되고 취소된다. 1991년 반부패를 표방하며 일어난 군부쿠데타와 이른바 ‘검은 오월’이라 불리는 92년 국민항쟁 과정의 희생자와 실종자들에 대한 진실규명도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정부의 비협조이다. 오히려 유가족에 대한 공공연한 회유와 협박이 벌어진다. 실종사건의 경우 법원의 법집행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군출신이라는 것도 실종사건 규명이 지지부진해지는 한 이유다

한편, 태국은 73년 ‘10.14 항쟁’이라 불리는 국민봉기를 통해 민주화의 초석을 마련한 이후, 92년 ‘5월 항쟁’을 통해 2차 민주화의 시기를 경험하였다.

▲ 1973년 민주화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October 14 기념관' 10.14 민주화운동은 태국의 민주주의 물꼬를 튼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92년 5월 항쟁은 군부 파벌에 의한 쿠데타만이 정권교체의 유일한 방법이 돼 왔던 태국 정치체제 있어서 군부를 퇴각시키고 점진적 문민통제로 나아가는 ‘민주주의의 이행’을 위한 결정적 사건이었다. 여기에 1997년 맞이한 IMF 파국은 오히려 정치개혁을 가속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해, 개혁헌법 공포를 통해 의회와 행정부의 권한이 강화되고, 국가인권위 등이 설립되었으며, 언론자유와 시민권이 헙법상 새롭게 명시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빈번했던 쿠데타의 경험을 의식해서인지 ‘정부전복행위 엄금금지 규정’이라는 것도 동시에 만들어졌다.

73년 10월 항쟁과 92년 5월 항쟁, 그리고 80년대를 통틀어 성장한 시민사회의 기반을 통해 태국의 민주주의는 일정한 궤도에 진입했지만, 한편으로 사회전반적으로 열악한 인권상황, 아직 진실조차 제대로 규명되지 못하는 과거사등의 문제는 민주화 이후 여전히 공존하는 반민주의 실체를 엿보게 한다.

인권탄압 은폐하면서, 규명노력에는 인권표창 수여

태국 남부의 무슬림들에 대한 인권탄압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이 지역에서 이미 100명 이상의 강제실종사건이 일어났지만 그 진실규명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현재 유가족 30여명이 단체를 결성해 정부에 진정서를 내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지만,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유가족들은 공식적인 100여 건 외에 더 많은 강제실종 사건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증거인멸을 위해 실종자 주변 친인척 살해가능성이 점쳐지는 상황에서 많은 유가족들이 선뜻 나서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 앙카나 닐라파이짓 여사. 그녀는 인권탄압으로 눈감는 국가로부터 인권표장을 받은 것을 놓고 '태국만의 정신문화'로 이해해 달라고 했다.
지난 4일 만난 닐라파이짓(Angkhana Neelaphaijit) 여사는 바로 이 문제를 위해 활동하다 2004년 강제실종된 남편인 솜차이 변호사의 부인이다. 솜차이 변호사는 태국 남부 이슬람인들의 인권보호활동을 해오다 지난 2004월 3월 강제실종됐다. 이후 닐라파이짓 여사는 남편의 실종사건을 규명하기 위해 UN등과 접촉하며 활동을 지속해 오고 있다. 남편의 실종사건과 그녀의 활동은 태국 무슬림 인권실태를 국제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 공로가 인정돼 닐라파이짓 여사는 지난 3월 태국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훌륭한 여성인권운동가”로 선정되어 표창을 받기도 했다. 물론, 국가인권위원회가 국가로부터 독립적이라해도 사회전반의 열악한 인권실태에 대한 개선의지가 없음은 물론, 공공연히 자행되어지는 인권유린에 대해 눈감는 국가가 이의 규명노력에 앞장서는 인권운동가에게 표창을 수여한 사례는 태국의 민주주의 정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로 받아들여진다. 닐라파잊 여사 자체의 노력은 그 자체로 충분한 귀감이 된다. 때문에 그녀는 올해 아시아이원위원회와 5.18재단으로부터 각각 아시아 인권상과 광주인권상을 수상하였다.

10월 선거에서 탁신정권 무너뜨릴 수 있을까

최근 태국국민들은 탁신정권의 폭정에 새로운 저항으로 일어서고 있다. 올해 2월 4일 벌어진 대규모 국민저항은 92년 이후의 ‘최대의 시위’로 얘기된다. 무엇보다도 민주화운동 지도자 출신인 탁신 스스로가 민주주의 탄압에 앞장서 온 것이 국민들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여기에 관주도의 개방경제와 극심한 빈부격차, 언론통제와 안보정치, 남부 무슬림에 대한 인권탄압, 친인척 부패비리와 독재기반 강화 등이 2월 항쟁의 복합적 배경이 되었다.

▲ 수리아스아이 민주국민연합(PEA)사무총장. 그는 10월 선거에서 탁신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탁신정권의 폭정을 고발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그러나 2월 항쟁으로 집권여당의 내부균열 등 일정한 성과도 있었지만, 탁신정권은 여전히 건재하다. 때문에 태국 민주화운동의 대표적 지도자격인 PAD(민주국민연합) 수리아스아이 사무총장은 10월 선거와 관련, 탁신의 재집권과 그에 따른 민주화운동 탄압을 걱정스럽게 전망했다.

방콕을 제외한 농촌지방 대부분이 여전히 탁신의 강력한 지지기반이 되고있기 때문이다. 탁신총리는 ‘농가부채 탕감’을 지지기반의 미끼로 활용하고 있다. 즉, 재집권하게 되면 100만바트(약 3000만원)정도를 마을별로 융자지원해 부채를 탕감시켜주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수리아스아이 사무총장은 이러한 농가부채탕감책이 융자형태를 띤다는 점에서 고스란히 또 다른 농가부채가 될 뿐 아니라, 무원칙하게 국가재정을 고갈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때문에 태국의 수리아스아이를 비롯한 태국 민주화운동단체들은 이 정책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탁신정권의 폭정을 고발하기 위한 지역투어 형식의 전국단위 토론회에 나서고 있다. 그리고 선거직전인 9월 말 이를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마련에 집중하고 있다.

여전히 정권에 의한 언론통제와 민주화운동이 제도적으로 탄압받는 상황에서 태국 시민사회의 이러한 노력은 이번 선거에 어떤 영향으로 작용할까?

▲ 차오프라야강의 저녁하늘. 방콕시내를 가르는 이 강을 오가는 배들은 시민들의 주요한 교통수단이기도 하다.
92년 이후 최대의 저항이라는 올해 2월의 대규모 국민저항의 기운이 다가오는 10월 선거에서 탁신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민주정권을 세우는 에너지로 이어질지 주목되고 있다.<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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