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리포트] 바비 인형을 꿈꾸는 소녀들 '프로아나'

 
▲ 왼쪽은 '프로 아나' 블로그에 돌아다니는 것으로, 본래 모델의 사진(오른쪽)에서 살을 빼거나 뼈를 도드라지게 해 더 말라보이도록 조작했다.
 
 
"비좁은 거푸집에서 찍어낸 듯한 실루엣, 이것이 오늘날 유행하는 몸매다. 길디 긴 팔과 다리, 조막만한 얼굴에 긴 목, 뼈가 굵으면 안 된다. 뼈를 깎아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1월 28일자 프랑스의 일간지 <리베라시옹>에서 '샤넬'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아름다운 여성'의 기준이다.

패션쇼 두 주 전부터 굶은 패션모델의 사망

라거펠트의 발언이 과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미 유행어가 돼버린 'S라인' 강박에 시달려본 일이 있다면…. 최근에 불었던 일명 '44사이즈' 바람만 보더라도 라거펠트는 진실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프레타포르테가 시작된 요즘 유럽에서는 바로 이 '아름다운 여성'의 기준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달 중순 스페인 마드리드의 파사렐라 시벨레스 패션쇼에서는 이례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지나치게 말랐다'는 이유로 모델 다섯 명이 패션쇼에서 제외된 것이다. 마드리드 시는 18사이즈 즉 '신장 175cm에 체중 56kg'을 표준으로 규정한 세계보건기구(WHO)의 기준을 적용했다 한다. 명분은 거식증과의 전쟁. 비쩍 마른 모델과 거식증을 결부시킨 것은 지난 여름의 비극에 대한 마드리드의 대답으로 풀이된다.

지난 8월 2일의 일이었다. 우루과이 출신의 패션 모델 루이젤 라모스 (22)는 패션쇼가 끝날 무렵 돌연 쓰러져 숨졌다. 패션쇼 현장을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라모스는 수개월 동안 샐러드 이파리와 코카콜라 라이트로 허기를 채웠으며 패션쇼가 시작되기 두 주 전부터는 아예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아사한 것이다, 패션쇼에 '이상적인' 몸매 유지를 위해서 였다.

라모스의 비극에서 교훈을 얻은 마드리드의 결정은 전례가 됐으며 이것은 밀라노, 파리, 퀘벡 등 세계 패션 주요도시를 돌며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이것은 패션계를 둘러싼 흉흉한 소문에 지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이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은 지난달 28일 프랑스의 공영 TV 채널 <프랑스 2 텔레비전>을 통해 방송된 르포 프로그램 '특파원 보도'였다. '다이어트 미인'이라는 제목의 이 르포는 라모스와 마드리드의 예를 돌아보며 거식증 강요하는 사회를 고발했다.

 
▲ 역시 왼쪽이 조작된 사진이다.
 
 
뚱보는 아둔하고 말라깽이는 숭고하다

TV와 여성잡지, 거리의 광고판을 통해 일상을 호흡하는 비쩍 마른 모델들은 소녀들로 하여금 '말라깽이는 곧 미인'이라 세뇌하며 그들의 식욕을 앗아가고 있다는 것. 유행의 틀에 맞추기 위해 젊은 여성들은 사실상 목숨을 걸고 있다. 과장이라고? 천만에.

'프로 아나(pro-ana)'라는 말을 들어본 일이 있는가. 옹호, 찬성, 지지를 뜻하는 접두사 '프로(pro)'와 신경성 식욕부진증 즉 '거식증'을 말하는 단어 '애너렉시아(anorexia)'가 만나 파생된 신조어다. 이른바 거식증 예찬론자. 사용자 참여 공동작업 백과사전으로 불리는 <위키피디아>에도 최근 등록될 정도로 프로 아나는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 우리가 인식 못하는 사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신장 167cm에 체중 41kg. 하지만 나는 좀 더 마르고 싶어."

프로 아나 추종자로 보이는16세의 한 소녀는 자신의 블로그 대문에 이런 글귀를 올려놓았다. 주로 10대 소녀들이 중심이 된 프로 아나 블로그는 전세계 수백여 개에 달해 구체적인 수치 확인은 불가능하다. 프랑스의 프로 아나 블로그는 '특파원 보도' 프로그램이 방송된 직후 일제히 폐쇄되거나 주소를 옮긴 상태다.

거식증을 부추기는 모든 종류의 정보가 총망라된 프로 아나 관련 블로그를 방문해 보면 공통된 규칙을 읽을 수 있다.

"친애하는 아나."

먼저 프로 아나 블로그 운영자는 방문자들을 '아나'라 부르며 친근감을 과시한다. 이때 '아나'는 'Ana'가 아닌 'Anna'라 쓴다, 마치 여자 이름과도 같은. 그리고 프로 아나 블로그의 성격은 세 문장의 선언으로 결정된다. "우리를 평가하지 말라. 우리는 옳다. 우리는 행복하다."

'뚱보는 아둔하고 말라깽이는 숭고하다', 이들의 슬로건이다. 이런 종류의 사이트를 맹신하는 이들은 모두가 '깃털처럼 가벼우며 자유롭다'는 말을 되풀이 하고 있다.

 
▲ '아나, 내 존재의 이유'라는 제목의 프로 아나 블로그. 올려진 글은 '거식증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은 프로 아나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는 내용이다.
 
 
"그녀는 아름답다, 나도 그녀처럼 될 수 있다"

혼자만의 투쟁이 아니라 '동지'가 있어 외롭지 않다. 프로 아나 추종자들은 '오늘' 자신이 섭취한 칼로리를 고백하며 자책하고 운영자는 위로하거나 질타한다. 그리고 최면의 시간이 이어진다. '뼈가 훤히 드러나는' 유명 모델들의 몸매를 담은 사진들이 증거자료로 제시되는 것이다. '그녀는 아름답다. 나도 그녀처럼 될 수 있다'는 주문과 함께.

증거 사진은 프로 아나에서 유용한 경전처럼 퍼지고 있다. 도저히 사람의 몸이라 할 수 없는, 아사 직전의 미인들이 프로 아나들의 눈에는 이상형으로 둔갑되는 것이다. 그리고 증거 사진 아래로 '날씬하기 위해서는 건강도 포기해야 한다'거나 '이뇨제를 먹고 금식하는 등 살을 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해라', '과도하게 마른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와 같은 이른바 프로 아나 10계명이 전개된다. 마치 사이비 종교의 교리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무려 스무 개에 달하는 '거식증의 혜택'도 나열돼 있다. '초미니 사이즈의 옷을 입을 수 있다', '남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다', '요리하거나 먹거나 설거지 할 시간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다'

'말라깽이는 선이요 뚱보는 악'이라는 이분법에 10대 소녀들은 현혹되고 있는 것이다.

"뚱보는 게으르고 역겹고 탐욕적이나 말라깽이는 영민하며 자신의 삶을 완벽하게 제어할 줄 안다!"

그러나 프로 아나들이 찬양해 마지 않는 세계 유명 모델들의 사진은 태반이 조작된 것이다. 실제의 사진에서 살을 빼고 뼈를 도드라지게 하거나 본래 사진 속에는 없는 사람을 끼워넣은 방식으로 눈속임을 시도하고 있는 것. 프로 아나 현상에 분노한 누리꾼들은 안티 프로 아나 사이트를 만들어 프로 아나의 감언이설을 반박하며 이같은 사실을 알리고 있다.

프로 아나는 풍만함이 미의 척도였던 19세기가 20세기를 지나면서 병약하고 마르고 창백한 미로 대체됐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1959년 느닷없이 출현한 바비 인형은 이같은 현상에 불을 당기며 '날씬함'과 '연약함'을 동의어로 만들어버렸다. 짐작했겠지만 프로 아나들이 꿈꾸는 것은 바비 인형의 바스러질 것 같은 몸이다.

 
▲ 본래 사진(오른쪽)에 없는 인물을 끼워넣어 조작했다.
 
 
사진속의 말라깽이들은 태반이 조작된 것

여성의 몸을 거부하고 성숙을 거부하고 유년으로 돌아가려는 소녀들, '프로 아나'는 바비 인형의 이미지를 모델에 투영했고 이제는 '그녀'들을 꿈꾼다. 물론 그 역도 가능하다. 바비 인형에 길들여진 사회는 바비 인형과 꼭 닮은 모델을 양산했고 이것은 소녀들의 꿈이 됐다는….

현재 밀라노에서 열리고 있는 패션쇼는 마드리드의 전례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반면 캐나다에서는 자성의 움직임이 보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패션 잡지의 사진을 수정하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 즉 실제 모델보다 좀더 긴 다리와 좀더 마른 몸으로 사진을 조작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20여년 전 패션모델의 체중이 전체 평균 체중에서 8%가 부족했다면 오늘날은 23%가 부족한 수준으로 일반인 몸무게의 4분의 3을 조금 넘는 형편이다."

최근 캐나다의 한 아동잡지가 제시한 통계는 라모스, 마드리드, 프로 아나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패션계에 쏟아지는 집단포화에 힘을 실어준다.

그러나 유명 디자이너를 비롯한 패션계 종사자들은 최대한 말을 아끼고 있다. '더 어리고 더 야윈 모델은 오늘날 패션계의 추세이며 이것은 광고주들의 요구사항이라는 것이다. 대체로 억울하다는 반응이다.

"프로 아나를 강요하는 분위기는 패션에 한정되지 않는다. 코카콜라 라이트를 비롯해 칼로리 0%를 내세우는 각종 식료품, 몸에 바르면 살이 절로 빠진다는 화장품, 다이어트 헬스 기구들은 무죄인가."

지난달 27일자 일간지 <르몽드>에 기고한 소니아 리키엘의 딸이자 아트디렉터 나탈리 리키엘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한편 프랑스의 심리학자 제라르 아펠도르페르는 그의 저서 <다이어트의 독재>를 통해 "거식증은 정신병의 징후"라고 말한 바 있다. 거식증은 패션 모델을 흉내내려는 단순한 의지라기 보다는 자기도취적 착란으로 풀이된다는 것.

12~18세에 해당하는 프랑스 젊은 여성의 1~2%가 현재 거식증 증세를 보이고 있다. 이 수치는 나날이 증가추세에 있는 섭식장애 중에서도 최근 몇 년 동안 변동없이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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