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감상] 추사특별전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월성위 등 종가유물 공개…보물 등 62점 선봬

 
 
▲ 세한도 복제품. 김영복 기증
 
   
 

불세출의 서예가 추사 김정희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150년이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가 이룩한 학문과 예술세계의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하고 그가 남긴 유묵(遺墨)은 민족의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칭송되고 있다. 추사선생은 국제적인 감각을 지닌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을 뿐 아니라 실사구시의 학문을 지향한 실학의 거두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추사 김정희 선생을 그토록 흠모하고 예찬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추사체를 완성해냈기 때문이다. 조선말, 정치적 격랑 속에서 절해고도의 제주땅에 유배인의 신분으로 발을 내딛은 그가 한때 ‘괴(怪)’이 하다고 혹평받기도 했던 미증유의 ‘추사체’를 낯선 땅, 모진 바람 속에서 암담한 인고의 세월을 보내며 정진 또 정진하여 제주에서 완성해내기에 이르렀다. 그를 기리는 특별한 전시회가 제주에서 열린다는 소식에 한시라도 빨리 추사를 만나보고 싶은 욕심에 기자는 특별전 개막 전날 저녁 전시중비중인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을 찾았고 이튿날인 개막일에 다시 찾았다. 지난 2002년 초여름 국립제주박물관에서 열렸던 ‘추사특별전’ 이후 만3년 만에 추사선생과 마주했다. 그의 예술세계는 여전히 높고 깊어 보였다.  추사특별전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를 만나본다. <취재,정리 김봉현 기자>

【서귀포신문】 여기 그가 떠난 지 150년 만에 의미 있는 전시회가 마련됐다. 제주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제주인으로 각인된 추사, 추사에게는 학문과 예술의 열매를 맺게 한 제2의 고향 제주에서 그를 기리는 ‘추사특별전-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가 열리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가 마련한 이번 전시회는 두 차례에 걸쳐 열리는 데 첫 전시회는 지난 10일부터 오는 25일까지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마련 중이고, 두 번째 전시회는 이달 30일부터 내년 1월 21일까지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적거지 추사관에서 열릴 예정이다.

   
 
▲ 10일 시작한 추사특별전에서 유홍준 문화재청장과 제주특별자치도 관계자 등 도내외 인사들이 전시를 둘러보고 있다.
 
#종가유물통해 추사의 학문과 예술세계를 들여다 본다

특히 이번 전시회는 유홍준 문화재청장과 남상규 부국문화재단 이사장(여미지 식물원 대표)·추사동호회 등에서 제주도에 기증한 추사유물 70여점을 포함한 총 100여점의 유물 중 62점을 가려내어 1차로 전시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종전의 추사전시회와는 확연히 다른 특징이 하나 있다. 이번 특별전의 실무를 총괄기획한 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 이귀영 과장은 이 점과 관련해 “이번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특별전의 특징은 종전의 전시회가 추사 유물 중심이었던 것에서 추사선생의 선대(先代)인 증조부 월성위를 비롯한 그의 종가유물을 볼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라고 강조했다.

이 과장은 또 “월성위 관련 유물로는 그의 미간행 시 모음집인 ‘매헌난고’, 영조대왕(월성위의 장인)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 시책문’, 양아들 김이주가 쓴 ‘선부군가장’, 추사의 외가 어른인 유척기가 쓴 ‘반가운 비(喜雨)’, 영조가 내린 ‘화순옹주를 애도함’, 그리고 숙종·영조·사도세자의 글씨가 담긴 어필첩도 포함돼 있다”며 “월성위 김한신의 관련 유물은 일반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어서 추사 김정희의 집안과 그의 학문세계 및 예술세계의 영향을 살펴보는데 귀중한 자료들을 선보인다”고 강조했다.

   
 
 

   
 
▲ 소치 허련이 제주에 귀양살이 중인 스승 추사를 찾아와 그렸다는 '해천일립상'
 
#소치 허련이 스승 추사를 그린 해천일립상(海天一笠像)

전실실 입구에서 만난 추사선생의 초상화는 150년 만에 다시 살아온 듯 당신의 향취가 가득 배인 진묵(眞墨)들을 흐뭇한 미소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그림은 추사의 제자 소치 허련이 그린 해천일립상(海天一笠像)이다. 소치 허련이 제주에 찾아와 유배중인 스승 추사의 모습을 그렸다는 초상화다.

송나라 소동파를 그린 ‘동파입극도’라는 그림을 번안한 그림이다. ‘동파입극도’는 소동파가 중국 혜주지방에 귀양갔을 때 갓을 쓰고 나막신을 신은 평복차림의 처연한 모습을 그린 그림인데 소치가 이것에 착안, 바닷가 마을에서 귀양살이하는 추사의 모습을 소동파에 비겨 그린 초상화다. 어쩌면 추사선생 스스로 유배에 처한 자신의 신세를 그렇게 소동파에 비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추사의 마지막 혼이 서린 서울 봉은사 현판 ‘版殿’

   
 
▲ 서울 봉은사 '판전' 현판탁본, 우찬규 기증.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3일전에 쓴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71세의 과천노인이 병중에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 서울 봉은사 현판 실제. <서귀포신문 DB>
 
그의 초상화 바로 옆에는 세상을 떠나기 3일전에 쓴 것으로 알려진 봉은사 현판 ‘版殿’을 탁본한 작품이 전시실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 작품은 예닐곱 살의 어린아이 글씨처럼 서툴고 어리숙한 글씨로 쓴 것 같아 보이지만 허화(虛和)로운 경지와 졸(拙)한 가운데 괴(怪)가 자연스럽게 살아난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판전’은 스스럼 없는 졸한 맛이 강한 가운데 ‘일흔 한 살 먹은 과천사람이 아픈 가운데 쓰다(七十一果病中作)’라고 써서 더욱 이 글씨의 허화로운 멋을 살려주고 있다.

#영조가 사위인 월성위 김한신부부의 묘표 직접 써

   
 

▲ 월성위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묘표. 부국문화재단 기증. 보물 제547-2호. 영조대왕은 자신이 총애하던 사위 김한신(월성위, 추사의 증조부)과 딸 화순옹주(추사의 증조모)가 열나흘만에 나란히 세상을 하직하자 이들 부부의 죽음을 슬퍼하며 직접 합장묘의 묘표를 써서 내렸다.

 
추사의 집안은 조선왕가와 깊은 관련이 있다. 추사의 고조부인 김흥경(1677~1750)은 영의정을 지냈고 그의 막내아들인 김한신(1720~1758)은 영조의 딸 화순옹주(1720~1758)와 혼례를 올려 월성위에 봉(奉)해지며 경주 김씨 집안의 영예를 드높인다.

월성위는 인물이 준수하고 총명하여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 중요한 직책을 두루 맡았으며 특히 글씨에 뛰어나 시책문을 많이 썼다.

추사의 증조부모인 월성위 김한신과 화순옹주는 각별한 부부애를 보였는데 화순옹주는 부군 월성위 김한신이 38세의 한창 나이로 후사도 없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자, 부왕 영조의 지극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때부터 식음을 전폐하여 부군을 따라 열나흘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영조는 자신이 총애하던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면서도 부왕의 뜻을 저버린 데 대한 아쉬움 때문에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으나, 후에 조카인 정조가 조선왕조 400년 만에 왕실에서 처음 나온 열녀라며 그의 순정한 뜻을 기려 충남 예산의 고택에 열녀문을 세웠다.

월성위 부부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 영조가 사위와 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충남 예산 추사고택 뒤에 합장한 월성위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묘앞에 묘표를 직접 써서 내렸다. 현재 이 묘표의 글씨는 보물 제547-2호이다.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이 쓴 시집 ‘매헌난고’도 공개돼

   
 
▲ 월성위 김한신이 13~34세 때 쓴 자필시 초고본인 '매헌난고', 부국문화재단 기증, 보물 제547-2호.
 
한편,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이 13~34세때 쓴 자필시 초고본인 ‘매헌난고(梅軒亂稿)’도 이번 전시회에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보물547-2호로 지정된 이 시집에는 모두 61수가 실려 있는데, 영조의 사위로 뽑힐 때 영조의 명으로 지은 ‘남훈금(南薰琴)’을 비롯하여 영조의 시에 화답한 시, 입춘을 축하하면서 대궐 기둥에 써 붙이는 시인 ‘춘첩자(春帖子)’가 대부분이다.

#신해년 책력 ‘신해칠정’…추사체 연구에 귀중한 자료

   
 
▲ 신해년 책력(신해칠정), 김정희가 1851년에 사용했던 책력. 부국문화재단 기증. 보물 제547-2호. 추사의 편지 등 유묵17점이 책력 사이사이에 붙여져 있어 그의 글씨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추사 김정희가 1851년인 신해년에 사용했던 책력으로 ‘신해칠정(辛亥?正)’이라는 제목과 길상여의관(吉羊如意館)이라는 소장처가 예서로 쓰여 있다.
이 책력의 속지 사이사이에는 추사가 쓴 편지와 시 등 유묵17점이 수록돼 있어 그의 글씨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책력에 실린 유묵 중 15점은 보물 제547-2호로 지정돼 있다.

그 동안 누렸던 특권층의 삶과는 거리가 먼 척박하고 고독한 유배생활 8년3개월을 보내면서 예스러운 멋과 회화적 조형미를 동시에 보여주는 '입고출신(入古出新)'의 세계를 갖추게 된다. 더 이상 어깨가 올라가는 일도 없어지며 골격은 힘있고 필획의 울림이 강하게 느껴지는 추사체의 면모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두 점의 무량수각 현판글씨로 본 추사의 '입고출신(入古出新)'

   
 
▲ 해남 대흥사 무량수각 실제 현판사진. <서귀포신문 DB>
 
   
 
▲ 대흥사 무량수각 현판 탁본. 유홍준 기증. 추사가 제주도로 향하던 1840년 유배길에 대흥사에 들러 초의선사에게 써주고간 현판. 예서체에 멋을 한껏 부렸는데 획이 기름지고 굵다.
 
   
 
▲ 충남 예산 회암사 무량수각 현판 탁본. 유홍준 기증. 추사가 제주에서 유배살이 6년여 만인 1846년에 고향의 경주김씨 원당사찰인 회암사로 써서 보내준 작품. 대흥사와 같은 예서체이나 확연히 달라진 글씨를 엿볼수 있다. 대흥사 현판에 나타난 지나치게 기름지던 획이 다 빠져나가고 이제 초연함이 느껴질 만큼 글씨에 골기(骨氣)가 느껴진다.
 
추사가 1840년 제주도로 유배 가던 도중 그의 벗 초의선사가 주석 중이던 전남 해남의 대흥사를 찾아가 남긴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추사가 대흥사의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전각 현판에 조선의 명필가 원교 이광사의 글씨가 쓰여 있자 초의에게 당장 저 촌스러운 글을 떼어내라하고 자신이 ‘대웅보전’ ‘무량수각’ 등 직접 현판을 써준 일이 있었다.

유배길에서도 그의 자신감은 그토록 지나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8년여의 제주유배생활을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던 추사는 제주 화북포구를 출발해 육지에 다다르자 곧장 초의가 머무르는 대흥사를 다시 찾았다. 추사는 그렇게 초의스님을 만나 밤새 긴 회포를 풀게 되었다. 추사는 초의에게 물었다.
“지난번 내가 제주에 내려가면서 떼어내라고 했던 원교선생의 ‘대웅보전’ 현판이 아직도 대흥사에 있나?”
“아, 그거! 물론 있지. 자네가 떼어내라고 해서 떼긴 했지만 후원 한쪽에 잘 보관해뒀지. 근데 왜 그러나?”
“초의! 그 현판을 다시 한 번 보여 주시게”
“그러지”
추사는 초의가 꺼내온 원교선생의 현판글씨를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다가 오랜 침묵을 깨고 말문을 열었다.
“초의. 내가 예전에 미처 알아보지 못했네. 이 훌륭한 현판을 다시 내걸고 내 글씨를 떼어내시게”

그렇게 해서 대흥사 대웅전에 아직까지 조선의 명필가 원교 이광사의 ‘대웅보전’ 현판이 걸려있게 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 일화는 추사의 혹독한 제주도 유배생활이 그를 정신적·학문적·예술적으로 얼마나 성숙시켰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추사가 제주에서 유배 중 일곱 해를 맞던 1846년, 그의 나이 61세 때 충남 예산의 화암사에 예서체로 써서 보낸 ‘무량수각’ 현판 글씨를 보면 초심자라 하더라도 대흥사의 무량수각과 확연히 달라진 서체를 느낄 수 있다.

대흥사의 ‘무량수각’이 획이 기름지고 두텁고 자신감이 넘치며 윤기가 흐른다면 회암사의 ‘무량수각’은 예전의 윤기 흐르던 기름기가 다 빠져나가고 앙상한 듯 골기(骨氣)마저 느껴지며 초탈(超脫)한 그의 정신세계를 엿보는 듯하다. 추사 연구가들이 말하는 추사의 중년시절 글씨에서 보여 지던 ‘쓸데없는 기름짐’이 위리안치라는 혹독한 유배생활에서 다 빠져나간 것이다.

#'입고출신(入古出新)'의 추사의 작품세계는 핍진한 제주유배가 생산해내

   
 
▲ 추사가 위리안치됐던 대정읍 추사적거지. <서귀포신문DB>
 
추사의 글씨에 대해 혹자들은 괴기하다고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추사의 서법이 해탈한 경지의 선승(禪僧)처럼 법도에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자유자재에서 비롯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평가라고 추사연구자들이나 미술사가들은 입을 모은다.

언뜻 보면 획이 삐쳐 나가거나, 획이 종횡(縱橫)으로 단순해보이기 까지 하고, 어느 때는 실처럼 획이 가늘고, 어느 때는 서까래처럼 획이 두꺼우니 ‘괴(怪)’하다는 평가가 나올 법도 하다.

이번 전시회는 그 동안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만 알려져 왔던 추사의 작품을 그의 종가 인물들의 작품까지 다수 감상함으로써 '추사체'가 형성되는 과정과 그의 진정한 개성과 자유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의 괴이한 글씨는 파격의 아름다움인 것이다. 특히 말년에 이르면 잘되고 못되고를 따지지 않는다는 '불계공졸(不計工拙)경지에 이른 무심한 글씨들에서 선(禪)의 경지로까지 승화된 예술세계를 만나게 된다. 또한 글 속에 담겨있는 내용을 통해 추사 자신의 솔직한 인생관과 인간적 체취를 물씬 느낄 수 있다.

추사는 정적들의 무고로 제주도 유배생활을 겪으면서 핍진하게 보낸 말년 생활에서 비로소 추사체로 대표되는 특유의 학문세계가 피어난다. 제주 유배시절동안 추사는 옛 것을 통해 새 것을 만들어 낸다는 고증학의 반영으로서 '입고출신(入古出新)'을 청나라 학예인들 보다 오히려 더욱 잘 구현해내고 있다.

   
 
 
   
 
▲ 10일 오후 4시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린 추사특별전에 유홍준 문화재청장을 비롯한 도내외 인사들이 테잎 커팅을 하고 있다.
 
   
 
▲ 이날 유청장은 전시실에서 추사의 작품에 깃든 일화와 미술사적 가치에 대해 강연을 펼쳤다. 세한도 앞에서 세한도의 의미를 전시관람객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 영조가 1758년에 쓴 '화순옹주를 애도함', 부국문화재단 기증, 보물 제547-2호.
 
   
 
▲ 김정희 작품. 공창호 기증. 중국 당나라 시인 맹호연이 지은 '도중우청'의 시구를 따서 지은 시다. 천개사경편...(하늘 맑자 저녁 햇살이 두루 퍼지고...)
 
   
 
▲ 영조가 직접 쓴 입춘첩. '춘축'. 부국문화재단기증, 보물 제54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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