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희의 시네마 줌⑥] 「투모로우」

예매를 한 뒤 잠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한 영화관에서 세 관(館)을 차지한 채 상영되는 영화는 어떤 영화일까 하는. 그만큼 영화가 안팎으로 좋다는 것일까, 아니면 쏟아 부은 제작비만큼 흥행을 염두에 둔 탓일까?

「투모로우」의 줄거리부터 옮겨보자.

기상학자인 '잭 홀'(데니스 퀘이드 분) 박사는 남극에서 빙하 코어를 탐사하던 중 기상이변이 일어날 것을 감지한다.

얼마 후 그는 국제회의에 참석하게 되고, 지구 온난화로 인해 빙하기가 도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로부터 남극은 너무 먼 곳에 있거나 일상의 피부에 와 닿지 않는 탓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상이변은 참혹한 현실로 나타난다.

끔찍한 토네이도가 L·A지역을 휩쓰는가 하면, 일본에서는 우박으로 인한 엄청난 피해가 보도되고, 뉴욕시 전체가 잠길 정도의 폭우가 쏟아진다.

이는 지구의 북반구가 빙하로 덮이기 시작하는 징후로서, 미국정부는 그제야 주민들을 남쪽으로 이동시키는 대피령을 발령한다.

한편 홀 박사의 아들 '샘 홀'(제이크 길렌할 분)은 여자친구 '로라'(에미 로섬 분)와 함께 퀴즈대회 참가 차 뉴욕에 갔다가 아버지의 마음을 애타게 한다.

아버지의 한마디는 그 어떠한 경우라도 장소를 옮기지 말고 도서관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

   
인류의 운명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을 남쪽으로 대피시켰던 홀 박사는 뉴욕 국립도서관에 고립되어 있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죽음의 땅인 북쪽으로 향한다.

헐리웃 영화가 대개 그러하듯 「인디펜던스 데이」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투모로우」 역시 거대해 보이나 아주 소박한 가족영화다.

이제 두려운 건 총칼의 전쟁이 아니라 핵전쟁이듯, 투모로우는 그 선상에서 다음 전쟁을 예견한다.

그러나 투모로우는 파국이 아니라 전멸이며, 말살이 아니라 그동안 인간이 쌓아온 그 업적까지도 한순간에 삼켜버릴 세기(世紀)의 종말이다.

천지창조를 찾아가는 듯한 어지럼증 나는 화면이 닿은 곳은 남극의 라센B 빙하.

탐사 중인 대원들을 휩쓸어버린 「투모로우」는 뒤이어 뉴욕거리를 물바다로 뒤덮어버린다.

   
순식간에 빌딩가(街)를 장악해버린 해일과도 같은 물길은 베스트 컷이 여기에 숨어 있다는 양 그 질주를 멈추지 않는다.

깨어 있으라, 그날이 올지니, 높은 곳으로, 저 높은 곳으로 몸을 피하라?

그러나 인간이 갈 곳은 없다. 몸을 숨길 곳도 없다. 하늘이 진노한 노아의 방주와 같은 전쟁에서 몸 숨길 높은 곳이 어디 있으랴.

거세게 몰아붙인 물의 전쟁은 잠시 숨을 고른 뒤 홍콩보다 더 큰 빙하가 녹았을 때를 내세우며 도쿄로 향한다.

거기엔 아름다운 시도, 흥얼거리며 불렀던 간밤의 노래도 없다.

땀흘려 지은 농작물 피해는 뉴스거리도 안 된다.

골프 공 크기의 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도쿄 치요가는 한 셀러리맨을 통해 21세기의 정보통신 발달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가를 핸드폰으로 보여주고 있다.

남편의 응답을 기다리는 아내. 간절한 아내의 목소리에 아무런 대답도 남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는 남편.

예고편이 없는 대자연의 기습은 콘크리트 바닥에 더는 교신할 수 없는 핸드폰을 통해 애타하는 여자의 목소리를 끝으로 두 번째 막을 내린다.

이제 어디로 향할까? 한 권의 성경으로 인해 인간이 이성의 시대를 열었다는 신이 나오고, 그 신이 다스리는 인류가 나왔다.

   
뉴욕을 시작으로 마이애미, 텍사스, 플로리다, 하와이, 델리, 멕시코, 캐나다, 알래스카, 조지스뱅크가 뒤를 잇는다.

북쪽의 미국인들은 국경을 넘어 남쪽인 멕시코로 향하건만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는 북쪽(뉴욕국립도서관)으로 향한다.

아, 미국역사에서 빠트릴 수 없는 휴먼의 길이라니! 사랑이 충만한 죽음의 길이라니!

거대한 화면들이 사라지자 처녀작 「노아의 방주」로 베를린영화제 문을 두들겼던 롤랜리 에머리히 감독은 휴먼스토리로 방향을 전환한다.

아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아버지는 사지(死地)로 떠나고, 의사인 그의 아내는 주위의 사람들이 남으로 남으로 대피해 갈 때 차마 꼬마환자를 남겨두고 떠날 수 없어 피터와 남는다.

그런가하면 퀴즈대회에 참가했다가 예기치 못한 일기변화로 도서관에 갇힌 평범한 아들은 카리스마 넘치는 젊은 영웅으로 새롭게 태어나면서 여자친구와의 사랑을 확인해 나간다.

여기에 빠트려서는 안될 인물이 또 하나 있다.

개와 함께 살아가는 한 거지다.

가장 자연적이면서 가장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 거지.

그래서 그는 예언자의 기질을 갖고 있다.

한 기상학자가 "나는 미래를 위해 열심히 살았어. 그런데 지금 그 미래가 사라지고 있잖아"라며 허탈해할 때 거지는 "이놈, 저년들이 다 차를 끌고 나와 뉴욕이 이 모양이 되었다"며 야생의 목소리를 높였던가.

아니나 다를까, 영화가 시작되면서 간간이 얼굴을 내비치던 그는 성경 속의 한 인물처럼 숨은 조연으로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 생사의 갈림길에 자식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아버지의 여정은 동이나 서나, 남이나 북이나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

도처에 죽음의 덫이 도사리고 있는가하면 그 덫을 벗어나면 험준한 산과 계곡으로 이어진다.

투모로우도 예외는 아니다.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길을 떠난 아버지는 동료를 잃고 만다.

바로 그 장면에서 보여준 두 남자의 동지애는 무엇이었을까?

말단 경찰과 학자들이 빈번하게 주연으로 등장하는 헐리웃 영화를 반추한다면 그 답은 자명하게 드러난다.

인류를 사랑하고, 인류를 책임지고자 하는 인간애의 표상이 촘촘하게 박힌 별들의 성조기로 휘날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자유의 여신상을 향해서 말이다.

   

바로 그 시각, 아버지의 구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아들이라고 해서 기다림만으로 시간을 허비하진 않는다.

감동의 컷을 연출해내며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아버지처럼 명석한 두뇌를 가진 아들 또한 패혈증으로 신음하는 여자친구를 살리기 위해 고립된 도서관을 뛰쳐나가 항생제를 구해오는 영웅적인 화면을 연출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부자간의 극적인 만남은 생략하기로 하자.

지구촌의 우등국가가 3세계에 의존했다는 백악관의 군소리도 생략하기로 하자.

너무 흔하게 보아온 헐리웃 특유의 마지막 장면이 아닌가.

대신 이런 질문 하나쯤은 던져볼 수 있을 것 같다.

당신은 도심의 가로수들이 신음하는 소리를 들어보았는가?

당신은 숲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가로수들의 간절한 발버둥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가?

※ 필자인 박영희 시인은 1962년 전남 무안군 삼향면 남악리 태생으로 1985년 문학 무크 「民意」로 등단, 시집 「조카의 하늘」(1987), 「해 뜨는 검은 땅」(1990), 「팽이는 서고 싶다」(2001)를 펴냈으며, 옥중서간집 「영희가 서로에게」(1999)도 있다. 시론집 「오늘, 오래된 시집을 읽다」와 평론집 「김경숙」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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