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희의 시네마 줌⑦] 「인어공주」

우리 아버지 이름은 김진국(박해일 분), 우리 엄마 이름은 조연순(고두심 분), 내 이름은 김나영(전도연 분).

세 식구가 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우리 집은 우중충한 날이 많아요.

엄마는 맨날 돈타령이고, 볼일 본 뒤 바지 지퍼 올리는 것도 잊고 사는 아버지는 바보천치 같아요.

엄마 말을 빌리자면 그 모든 것이 빚보증을 잘못 선 '느그 아버지' 탓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아요.

그래요, 한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해보니 알 것도 같아요.

남자는 왜 여자를 만나고 싶어 하고, 여자는 왜 남자를 보고 싶어 하고, 함께 있고 싶어 하는 지.

그런데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하나 있었어요.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나를 낳은 우리 엄마와 아버지가 미심쩍은 거예요.

저 남자와 저 여자는 어떤 인연으로 만났을까? 어떤 인연으로 만났길래 허구헌날 싸움질만 하는 것일까?

우체국에 근무하는 나는 그게 궁금했어요.

   
그래요, 우리 엄마는 억척스러워요.

여자가 침을 뱉어도 참 더럽게 뱉지요.

카악, 퉤! 카악, 퉤!

듣기만 해도 불결하지요?

그뿐인 줄 아세요.

아버지를 닦아세울 때면 나중에 나도 저런 여자로 변할까봐 더럭 겁이 나기도 했어요.

아버지가 담배라도 한 개비 피울 참이면 뭐라고 소리 지르는 줄 아세요?

"그것이 먼 보약이라고 줄기차게 피어싸까!"

다른 여자하고 춤바람 나서 그런 것도 아니고, 도박에 빠진 것도 아니고, 남한테 보증을 잘못 서서 그런 것인데….

흥! 그러는 엄마는 뭐가 그리 잘났다고.

목욕탕에 온 여자들이 때밀이라고 그러면 눈에 쌍심지를 켜며 나는 목욕관리사라고 대들지를 않나, 아버지가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도 화장실 문을 열어놓고 오줌을 누지 않나….

참 싫어요, 이런 우리 엄마.

그 엄마의 등살에 못 이겨 집을 나간 아버지, 나영은 뉴질랜드 여행을 포기하고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도착한 곳은 자그마한 섬마을 하리.

그곳에서 나영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스무살 시절을 만난다.

아버지와 엄마는 어떻게 만났고, 어떤 사랑을 나누었으며, 무슨 연유로 섬을 떠나 도시에서 살게 되었을까?

한 발을 내딛으니 우체부가 나타나고, 또 한 발을 내딛으니 해녀, 잠녀가 나타난다.

그 옆에 공부는 지지리도 못하는 것이 노래 하나는 끝내주는 소년(외삼촌) 하나가 혹처럼 붙어 다닌다.

그리고 보니 월남에서 돌아온 새카만 김상사 시절이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들이 펼쳐지던 시절이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줄기들의 존재이나 우리 엄마 조연순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억척스럽다.

스무살의 청순함과 때 묻지 않은 순박함을 제외한다면 지금의 엄마를 꼭 빼 닮았다.

   
아버지라고 예외일 수 없다.

김진국, 이름에서 나타나듯 우체부인 아버지는 진국 그 자체다.

그런데, 그런데 아버지에게 먼저 꼬리를 친 게 어머니라니…!

순서가 좀 다르면 어떠랴.

누가 앞서고 누가 뒤서면 또 어떠랴.

아무리 둘러봐도 고적한 섬 하리에 꽃다운 스무살 처녀가 연애를 걸어볼 만한 사람은 없어 보인다.

보이느니 아저씨들이요, 보이느니 아줌마들뿐이다.

   
그러나 스무살 조연순은 정작 매일같이 마을을 찾아오는 우체부에게 자신의 마음은커녕 메시지 한 장 전할 길이 없다.

나는 왼종일 그만을 기다릴 수 있지만 그 사람은 가가호호 소식을 전하는 우체부.

제 이름 석 자도 쓰지 못하는 해녀 조연순은 궁리 끝에 유학길에 오른 중학생 동생을 이용하기로 한다.

남동생이 매일매일 보내오는 편지의 내용이야 읽을 수 없지만 지금처럼 행복한 때가 또 있었을까.

사랑의 문이 열리자 버스가 개통된다.

버스가 개통되는 날, 기념촬영을 마치고 나자 사랑의 속도도 빨라진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또 하나 생겨난다. 대체 ‘오라이’는 무슨 뜻일까?

“아, 그거요! 앞으로 갈 때는 오라이고, 뒤로 갈 때는 오라이 오라이에요. 연순 씨도 한번 해볼래요?”

사랑은 그래서 좋은가보다.

내가 모르는 것을 그 사람이 일러준다.

짜증내지 않고, 무시하지 않고, 하얀 치아를 다 드러낸 채, 자전거에 나를 태우고 한번 해보라고 한다.

그리고는 다음 다음날, 너무 자상한 얼굴로 소포 하나를 내민다.

“연순씨. 연순씨가 이름을 쓸 수 있을 때까지 이 책으로 공부해요. 내가 도와줄게요”

사랑의 힘을 누구라 막을 수 있으랴.

연순은 선생님도 하나요 학생도 하나뿐인 바닷가 교실에서 받아쓰기 시험을 친다.

   
그저께는 20점. 어저께는 80점. 그러나 오늘은 받아쓰기 시험문제가 낯설다.

교과서에 없는 낱말들이 진국의 입에서 튀어나온다.

나는 하리에 잠녀로 남아야 하고, 우체부인 그 사람은 이제 발령을 받아 뭍으로 떠나야 할 시간인가.

아버지를 찾아 외딴 섬 하리를 찾은 나영은 그제야 어머니 조연순과 아버지 김진국이 뭍에서 살게 된 내막을 알았다는 듯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

그래요, 엄마도 아버지도 아름다웠어요.

그런데, 그 아름다운 시절이 어디로 다 사라진 것일까요.

   

미워하고 싶은데 이제 미워할 수가 없네요.

잘못 선 빚보증 한번으로 월급을 차압당하고 딸년의 대학등록금까지 날려버린 아버지도, 다시 태어나면 나도 물질하지 않고 남들처럼 공부하고 싶다던 엄마도.

그래요, 엄마. 엄마 말이 맞아요. 공책은 옷이에요. 지우개로 글씨들 다 지우고 나면 멀쩡한데 왜 버려요. 옷도 더러우면 빨아 입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엄마,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버스가 개통되던 날 아버지도 사진 찍었어요?

"거기 있었으믄 찍었겄제"

그럼 아버지가 그날 웃었어요 안 웃었어요?

"찍고자파서 찍었으믄 웃겄제 울겄냐!"

※ 필자인 박영희 시인은 1962년 전남 무안군 삼향면 남악리 태생으로 1985년 문학 무크 「民意」로 등단, 시집 「조카의 하늘」(1987), 「해 뜨는 검은 땅」(1990), 「팽이는 서고 싶다」(2001)를 펴냈으며, 옥중서간집 「영희가 서로에게」(1999)도 있다. 시론집 「오늘, 오래된 시집을 읽다」와 평론집 「김경숙」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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