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규명과 은폐·왜곡 간 치열한 기억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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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72주년 기획] 4.3피해 회복탄력성 (2) 제주4.3 관련 사회 변화와 회복탄력성 ①
제주4.3은 현재 진행형인가? 아니면 70여년이 지난 이미 끝난 일인가? 최근 법원의 군법회의 공소기각 판결을 보더라도 4.3이란 족쇄를 풀지 못한 억울한 시민들이 여전히 고통 받고 있다. 긴 시간이 흐르면서 4.3을 겪은 피해자들의 마음은 어느 정도 나아졌을까. 전 국무총리소속 4.3위원회 전문위원 김종민은 최근 제주학연구센터의 지원을 받아 ‘4.3피해자 회복탄력성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4.3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긴 피해자들의 이야기와 함께 그들의 내적 회복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제주의소리]는 4.3 72주년을 맞아 김종민 전 전문위원의 연구를 1월6일부터 매주 월요일, 목요일 총 8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주]

Ⅱ. 제주4.3 관련 사회 변화와 회복탄력성

1. 제주4.3 관련 사회 환경

4.3피해자들의 회복탄력 계기 및 시점과 관련, 민주화운동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것인가 혹은 제주4.3특별법 제정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것인가는 연구자의 관점에 따라 분류된다. 시민적 관점에서 민주역량의 강화에 초점을 둔다면 민주화운동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게 되며, 정치적 현상과 맞물리면 제주4.3특별법 제정에 따라 구분하게 된다. 또한 정치적 변화에 따라 개인의 회복탄력성을 연구하게 된다면 결정론적 연구방법을 채택할 공산이 높다. 따라서 본 연구는 4.3피해자의 일상 사회생활과 회복탄력성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연좌제 등 사회제도 그리고 공동체의 변화에 주목해 민주화운동을 기준으로 구분하고자 한다.  

1-1 제주4.3 당시 피해

1-1-1 제주4.3과 피해 현황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35년간 계속된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벗어났으나, 곧 미군이 제주도를 비롯한 한반도의 38도선 이남 지역을 점령해 직접 통치하는 ‘미군정’이 3년간 실시됐다. 

‘제주4.3’은 바로 미군정 시기인 1947년 3월 1일, 즉 제28주년 3.1절 기념식과 곧이어 미군정의 실정(失政)을 비판하는 시위가 벌어지던 날, 다른 지방에서 온 응원경찰의 무분별한 발포로 6명이 숨지고 8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이 사건은 제주도를 순식간에 혼란의 도가니 속에 빠뜨렸다. 경찰 발포에 항의하는 대대적인 ‘민·관 총파업’이 벌어지자 미군정 경찰은 느닷없이 ‘제주도는 붉은 섬’이라 규정하며 검거 선풍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경찰과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들로 구성된 서북청년회 단원들은 4.3무장봉기가 벌어질 때까지 1년간 무려 2500명가량의 청년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고문했다. 그 무렵 미군 감찰반이 “제주유치장은 최악이다. 작은 유치장 안에 365명의 죄수가 수감돼 있다. 10×12피트(3.3평)의 한 감방 안에 35명이 갇혀 있다”고 보고할 정도로 유치장은 차고 넘쳤다. 무장봉기 한 달 전인 1948년 3월에는 마침내 사달이 나서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받던 청년 3명이 잇따라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탄압의 국면’이었다.

강요배 화백의 4.3연작 '동백꽃 지다' 가운데 '넘치는 유치장'.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강요배 화백의 4.3연작 '동백꽃 지다' 가운데 '넘치는 유치장'.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이처럼 가혹한 탄압이 1년 넘게 지속되고 고문치사 사건들이 이어지자 이에 저항하는 ‘항쟁의 국면’이 펼쳐졌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경, 한라산 중턱에 산재해 있는 오름 정상에 일제히 봉홧불이 붉게 타오르는 것을 신호로 하여 약 350명의 청년들로 구성된 무장대가 경찰지서 12곳을 동시에 공격했다. 또한 경찰과 서북청년회, 대동청년단 등 극우단체 요인의 집을 지목, 습격해 살해했다. 무장대는 “경찰과 극우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조국의 통일독립”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한편 이 무렵은 이승만과 미국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던 때였다. 1945년 12월 미국, 영국, 소련 등 3개국 외무장관이 모스크바에 모여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질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이른바 ‘모스크바 3상회의’를 개최했는데, 이때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는 당시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분할 점령돼 분단 상태에 놓여있던 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시키기 위해 ‘통일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로 하고 이를 추진하기 위한 논의 구조로서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한다’는 데 합의한 바 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이 서로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힘겨루기와 갈등 끝에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될 상황에 이르자 이승만과 미국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단독정부를 추진했다. 4.3무장봉기는 남한만의 첫 국회의원 선거를 한 달 여 앞둔 때에 발발한 것이다.

무장대는 5.10총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해 주민들을 산간 지역으로 올려 보냈다. 결국 제주도는 3개의 선거구 중 북제주군 갑구와 을구 등 2곳의 선거가 무산되었다.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의 2개 선거구만이 무효화된 것이다. 그런데 항쟁 못지않게 탄압도 중첩돼 나타난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다.

제주도에서 선거가 무산되자 곧이어 참혹한 ‘대학살의 국면’이 전개됐다. 특히 1948년 8월 15일 3년간의 미군정이 끝남과 동시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같은 해 9월 9일에는 38도선 이북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됨에 따라 제주4.3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미군정 시절 발발한 3.1절 발포사건과 총파업, 그리고 검거선풍과 고문치사의 결과로 발생한 제주4.3 무장봉기의 발발 원인과 전개과정 등 그 본질이 바뀐 것은 아니었으나, 남과 북에 각각 적대적인 정부가 수립됨에 따라 제주4.3은 대한민국에 대한 반역으로 규정되고 제주도민들은 더욱 더 가혹한 탄압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이 법적 근거도 없이 ‘계엄령’을 선포한 1948년 11월부터 약 4개월간 벌인 ‘초토화작전’ 때 군·경 토벌대는 엄청난 ‘대학살’을 자행했다. 중산간마을을 포위한 군인들은 다짜고짜 집집마다 불을 붙였고, 불기운에 놀라 집에서 뛰어나오는 주민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급히 피신해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은 점점 조여 오는 토벌대의 포위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부녀자들도 어린아이들을 양손에 붙들고 살을 에는 듯이 추운 한라산으로 향했다. 숨었던 굴이 발각돼 온 가족이 몰살되기도 했고, 굴 밖으로 잠시 나와 있다가 요행히 목숨을 구한 사람은 굴속에서 끌려나온 가족이 총살당하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숨죽여 흐느꼈다.

중산간마을에서 해변마을로 소개(疎開·강제 이주)한 사람들의 희생도 컸다. 두려움에 떨던 청년이 도망치면 토벌대는 남아있는 가족을 ‘도피자 가족’이라 하며 도망친 청년의 늙은 부모와 처자식을 수시로 학살했다. 본래 해변마을에 살던 주민들도 희생을 피해갈 수 없었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학교 운동장에 집결시킨 후 뚜렷한 근거도 없이 ‘무장대 지원 혐의’가 있다며 청년들에게 총질을 했다. 야수로 돌변한 토벌대에 의해 자행된 여성들의 수난은 차마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다. 

이처럼 무자비한 불법 행위의 책임은 당시 군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과 미군에게 있다. 이승만은 당초 1948년 12월 말로 예정된 미군 철수를 앞두고 불안정한 권력을 강화하고자 초토화작전을 자행했다. 미군 철수는 국무부의 반대로 인해 1949년 6월 말로 연기됐는데, 미군 철수 직전인 1949년 6월 3건의 중대한 사건이 벌어졌다. 즉 반민족행위처벌법에 근거해 구성된 반민특위가 친일파 경찰의 습격을 받아 와해됐고, 이승만 정권은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에 앞장서거나 국가보안법 제정에 반대하는 등 정부에 비판적인 국회의원들에게 북한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씌어 검거하는 소위 ‘국회프락치 사건’을 일으켰다. 또한 국민들에게 여전히 인기가 높았던 정치인 김구가 서북청년회 출신인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이로써 이승만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친일파반민족행위자들을 보호했고, 국회를 겁박했으며, 또한 최대의 정적인 김구가 사라짐에 따라 미군 철수 직전에 비로소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미군 역시 무차별 강경진압작전에 관한 책임으로부터 단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 미군은 미군정이 끝난 후에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8월 24일 이승만 대통령과 주한미군사령관인 하지 중장 사이에 맺은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에 따라 한반도에서 철수할 때까지 대한민국 군과 경찰의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었다.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군사협정을 맺은 지 한 달여 만인 9월 29일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인 이범석에게 공한을 보내 “한국 국방경비대의 작전통제권은 여전히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있으며, 경비대의 작전에 관한 모든 명령은 발표되기 전에 해당 미군 고문관을 거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로버츠 고문단장은 심지어 제주 주둔 제9연대의 송요찬 연대장이 잔인한 초토화작전을 한창 벌이던 1948년 12월 18일 이범석에게 공한을 보내 “송요찬이 대단한 지휘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를 신문과 대통령의 성명을 통해 일반에 크게 알리라”며 초토화작전을 조장했다.

1948년 5월 5일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1948년 5월 5일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그 결과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엄청난 인명이 희생되었다.

1-1-2 군사정권 하 제주4.3 대화 단절 이유

첫 진상규명 운동은 1960년 4.19혁명에서 비롯됐다. 1954년 한라산 통행금지령이 해제돼 사건이 종결된 지 6년만의 일이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 열기가 무르익던 1960년 5월 23일, 국회는 한국전쟁 당시 거창·함양 등지의 양민학살 사건에 관한 조사단 구성을 결의했다. 그러자 이 소식을 접한 제주도민들 사이에서는 “제주4.3도 진상규명해야 할 것 아니냐”는 여론이 비등했다. 제주대학생 7인은 ‘4․3사건 진상규명동지회’를 결성해 자체 조사활동에 나섰고, 모슬포에서는 진상 조사를 촉구하는 궐기대회가 열렸다. 결국 국회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 특위는 조사 대상 지역에 제주를 포함시킬 것을 승인, 6월 6일 조사반이 내도했다.

이처럼 갑자기 국회조사단의 제주 방문이 결정되자 지방지 '제주신보'는 촉박한 일정에 맞추기 위해 부랴부랴 희생 상황 접수를 받았고, 제주도의회나 제주시의회, 그리고 진상규명동지회도 나름대로 자체 조사 수집에 나섰다.

그러나 경상남도 조사반에 곁다리로 끼어 마지못해 실시된 단 몇 시간의 국회 조사는 부실할 수밖에 없었고, 공교롭게도 조사반장 최천 의원은 4.3 당시 제주경찰감찰청장으로 재직한 토벌대 주역인데다 태도마저 강압적이어서 물의를 빚었다. 조사 과정을 보도한 제주신보는 “질문하는 방법이 마치 죄인 다루는 식”이라고 꼬집었다. 최천 반장이 “10여 년이 경과됐으니 처벌 시효가 지났다”고 말하자 현장에 있던 제주신보의 신두방 전무는 “그러면 뭣하러 왔느냐. 사람 죽인 놈들에게 시효가 문제 되냐”고 따졌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조사반의 다른 두 의원이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철저히 처리하겠다”고 다짐해 겨우 일단락 됐다.

또 1960년 6월 21일 재경 제주학우회는 국회 앞에서 4.3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서울과 제주도의 대학생을 망라하는 ‘제주도민 학살사건 진상규명 대책위’를 조직하는 등 열기를 더했다.

그런데 비록 우여곡절이 있었다 할지라도 국회의 조사가 계속됐다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그리고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배상 등이 순차적으로 이뤄졌을 것이다. 그러나 불과 1년만인 1961년 발발한 5.16 군사쿠데타는 진상규명 운동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쿠데타 발생 이튿날인 1961년 5월 17일 진상규명동지회원들이 검거돼 고초를 겪었고, 제주신보 신두방 전무는 옥고를 치렀다. 또 대정지역에서 진상규명에 앞장섰던 몇몇 사람들은 군 입대 중 체포돼 곤욕을 치렀다. 경찰은 또한 4.19 직후 유족들이 세운 위령비를 부숴 파묻기도 했다. 이로써 진상규명 운동은 제대로 싹이 트기도 전에 짓밟혀 원점으로 돌아갔다. 

1961년 제주출신 의원 김성숙은 국회에서 ‘제주도 양민학살 보고서’를 내고 위령탑 건립 등을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누구도 4.3을 입에 담지 못했고, 연좌제의 억압 속에서 도민들의 상처는 속으로만 더욱 곪아 갔다.

얄궂게도 1962년에는 4.3 당시 제9연대장으로서 초토화작전의 주역이었던 송요찬이 군사정권의 내각수반이 돼 제주를 방문, ‘4.3상처 치유’ 운운하며 이재민 원주지 복귀사업을 실시했다.

5.16쿠데타 이후 무려 17년간 계속돼 온 강요된 침묵은 한 소설가에 의해 깨어졌다. 이때는 박정희가 종신 대통령을 꿈꾸던 소위 유신헌법 시기였다. 국민들은 대통령 선거에 직접 투표할 수 없었고 소위 선거인단이 서울의 체육관에 모여 간접투표로써 압도적인 투표율과 찬성으로 대통령을 선출했다. 심지어 국회의원의 1/3을 박정희 대통령이 임명하던 암흑기였다. 이처럼 엄혹했던 유신정권 시절인 1978년 문예잡지 '창작과 비평'에 발표된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은 4.3의 참혹상과 그 후유증을 정면으로 다뤄 충격을 주었고 긴 세월 금기시 됐던 4.3의 물꼬를 트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이 소설은 이후 4.3연구를 촉발시켰고 문학은 물론 미술․연극계 등 문화계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작가 자신은 군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고 1979년에 출판된 소설집은 오랫동안 판금조치를 당해야 했다.

현기영 작가. 출처=오마이뉴스.
현기영 작가. 출처=오마이뉴스.

'순이삼촌'이후 누구도 4.3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했다. 1984년에 강용삼·이경수가 쓴 '대하실록 제주백년'에 4.3이 많은 부분 할애됐지만, 양민학살극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못한 채 토벌작전의 무용담만 실렸다.

1980년 광주항쟁 이후 제주지역의 학생운동이 활기를 띠면서 학내에서 4.3이 관심사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운동권 학생’들은 그 무렵 전해진 미국학자 존 메릴의 '제주도 반란(The Cheju-do Rebellion)'이나 김봉현·김민주의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등을 은밀히 복사해 읽었다. 그러나 이를 읽은 사람들은 아주 일부 대학생들이었을 뿐, 일반 시민들에게 4.3은 여전히 말해선 안 되는 금기였다.

1-1-3 연좌제

봉건왕조 시절인 조선시대 때, 백성들은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가족 또는 친족이 저지른 죄로 인해 처벌을 받기도 했다. ‘반역’을 꾀하거나 왕조를 부정한 ‘대역죄인’을 심판하며 “삼족을 멸하라!”고 외치는 것은 텔레비전 사극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장면이다.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 친족의 죄 때문에 함께 벌을 받는다는 건 ‘문명사회’의 모습이 아니다.

그래서 조선왕조는 1894년 갑오개혁을 단행하며 “죄인 이외에 연좌시키는 법은 일절 금지한다(罪人自己外緣坐之律一切勿施事)”고 규정했다. 문명국가로 거듭나겠다며 개혁을 하는 마당에 ‘연좌제’를 폐지한 건 너무나 당연한 조치였다. 그러나 1948년 제주도에서는 시대착오적인 연좌제가 부활했다. 

군부독재정권 시절, 유족들은 억울하다는 호소 한 마디조차 하지 못한 채 오히려 ‘연좌제’로 인해 장래가 막혔다. 요즘이야 감귤농사와 아름다운 풍광을 활용한 관광업, 또는 각종 사업을 하며 생계를 이어갈 수 있지만, 물이 부족해 쌀은 거의 생산되지 못하고 당시에 값이 싼 조, 보리, 메밀 등을 경작하며 겨우 목숨만을 유지하던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월급’이라는 돈을 받을 수 있는 길은 공무원, 교사, 군, 경찰 등 몇몇 직업에 국한됐다.

그러한 때에 4.3유족들은 연좌제로 장래가 막혔다. 아무리 똑똑하고 능력이 있어도 가족 중에 군·경 토벌대에 의해 목숨을 잃은 희생자가 있으면 공직에 나아갈 수 없었다. 육군사관학교에 합격해 훈련을 받다가 퇴학당했고, ‘신원조회’에 걸려 어렵게 들어간 공직에서 쫓겨났다. 이때 제주도민이 겪은 좌절감과 피해의식은 당사자가 아니면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한편 박정희가 1979년 10월 26일 부하에 의해 갑자기 죽게 되자 전두환은 1980년 5월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후 정권을 찬탈함으로써 군부독재정권을 이어갔는데, 헌법을 개정하면서 뜬금없이 봉건시대의 연좌제를 소환했다. 즉 1980년 10월 27일 개정된 제9호 헌법은 제12조 제3항을 통해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전두환이 학살자 이미지를 희석시키기 위해 제 딴에는 ‘국민에 대한 배려’라며 신설한 조항이다. 이 조항은 1987년 6월항쟁의 영향으로 같은 해 10월 29일 개정된 제10호 헌법 제13조 제3항에 똑같은 문구로 되풀이됐다. 

그런데 연좌제라는 봉건적이고 전근대적인 악습을 없애겠다며 신설한 이 조항은 오히려 그동안 연좌제를 ‘공식적’으로 적용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연좌제에 대한 피해의식은 진상규명은커녕 유족들을 더욱 움츠리게 했고 4.3과 관련한 가족의 피해을 입에 담지도 못했다.

1-2 민주화운동 이전 사회 환경 변화

1-2-1 제주에서의 1987년 민주화운동

1987년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은 정권 수호를 위해 학생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그 결과 그 해 1월 서울대 학생 박종철 군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가 물고문을 받다 사망한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임기 말에 이른 전두환은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 직선제를 실시하자는 시민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6월 10일 자신과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인 노태우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이에 장기 군부독재를 청산하기 위해 온 국민이 들고 일어나 대통령 직전제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가 전국적으로 거대한 항쟁으로 번지자 당시 노태우 후보는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겠다는 소위 ‘6.29선언’을 발표했다. 그런데 야당의 김대중·김영삼 후보가 단일화를 이루지 못해 그 해 12월에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됨에 따라 정권 교체에 실패함으로써 군부정권이 이어졌다. 

비록 군부정권을 몰아내지는 못했지만,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사회 각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는 4.3진상규명에 있어서도 결정적인 초석을 깔았다.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이 발표된지 9년만에야 다시 말문이 트인 것이었다.

특히 6월 항쟁으로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는 정치권에서 4.3을 이슈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987년 말 실시된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후보(당시 평민당)가 처음으로 ‘4.3 진상규명’을 공약으로 제시한 것이다. 김 후보가 낙선함에 따라 비록 공약이 이뤄지지는 못했지만, 이후 제주지역에서는 총선과 대선 때마다 4.3진상규명이 늘 핫 이슈로 등장하는 등 정치권의 논의가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6월 항쟁 때 제주대학교 총학생회 등에서는 일제히 ‘4.3 대자보’를 부착하며 1960년 4.19혁명 직후 제주대학교의 일부 학생들이 벌였던 진상규명 운동의 맥을 27년 만에 이어갔다.

1-3 대화의 장으로 나온 제주4.3

4.3 발발 40주년이었던 1988년은 진상규명 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년 전 벌어졌던 ‘6월 항쟁’으로 조성된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그 동안 저변에 깔려있던 4.3진상규명 운동의 열기가 한꺼번에 폭발적으로 분출하기 시작했다. 

제주대학교 학생들은 1988년 3월 28일~4월 8일까지를 4.3추모기간으로 정해 ‘4.3위령제 및 진상규명 촉구대회’를 가졌고, 서울에서는 재경 제주인 모임인 제주사회문제협의회(약칭 제사협) 주최로 4.3 학술세미나가 개최됐다. 또 일본에서는 탐라연구회 주최 추모강연회가 열렸다.

특히 1988년에는 4.3 관련 서적 등 현대사 연구성과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우선 전문연구로서 처음으로 두 편의 석사학위 논문이 발표됐다. 박명림은 '제주도 4.3민중항쟁에 관한 연구'(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양한권은 '제주도 4.3폭동의 배경에 관한 연구'(서울대 정치학과)를 썼는데, 이 두 편의 논문은 4.3연구 수준을 처음부터 껑충 끌어올렸다. 또한 각종 자료모음집과 증언채록집이 출판돼 진상규명 운동에 불을 지폈다. 이에 앞서 1986년에 발간된 미국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현대사 연구의 붐을 일으키면서 4.3 연구의 깊이를 더하게 했다.

문학작품으로는 재일동포 작가 김석범의 소설집 '화산도'와 '까마귀의 죽음'이 번역 출판됐고, 1986년 발표됐던 이산하의 4.3서사시 '한라산'이 뒤늦게 필화사건을 일으킴으로써 4.3은 전국적인 논쟁과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1988년 6월 문공부가 ‘공안차원에서 좌익서적을 뿌리뽑는다’는 구실로 '제주민중항쟁' 등을 지목해 경찰에 고발함으로써 4.3논의가 한때 위축되는 듯 했다.

1988년 7월 22일 제주국본과 제사협 등이 후원하고 서울 소재 6개 대학교의 제주학우회 및 제주동문회가 주최한 ‘4.3강연회’가 열렸다. 이 강연회는 제주에서 열린 첫 공개 강연회로서 그 동안 억눌려 침묵해 온 도민 의식을 크게 자극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4.3진상규명은 13대 총선의 큰 이슈가 됐다.

한편, 미국인 존 메릴은 1975년 하버드대학에서 4.3관련 첫 석사학위 논문 '제주도 반란'(The Chejudo Rebellion)을 쓴 바 있는 사람인데, 1988년 11월 서울에 와서 ‘한국전쟁의 기원’을 주제로 한 강연을 하면서 제주4.3을 언급했다. 그런데 이때 존 메릴은 이미 학계를 떠나 미국 국무성 정보조사국에 재직하고 있던 관리였다. 강연 내용이 '한겨레신문'에 소개된 후 제주4.3에 관한 ‘미국의 책임’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한겨레신문'은 강연 내용 뿐만 아니라 강연에 관한 반론과 재반론 등 미국의 책임을 둘러싼 논쟁을 잇따라 네 차례나 지면에 실음으로써 전국적인 관심을 모았다.

아울러 여소야대 정국 속에서 진행된 국회농수산위 제주도 국정감사에서 강보성 의원(민주당)은 4.3진상규명을 촉구했고, 이어 국방위의 제주도 국정감사에서도 황명수 의원(민주당)이 4.3의 역사적 재조명을 촉구했다. 특히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 차원에서 열린 ‘광주청문회’는 도민들의 4.3진상규명 의지를 크게 고무시켰다.

1988년 말에는 미국의 ‘4.3학자’ 존 메릴 뿐만 아니라 재일동포 소설가 김석범이 제주를 방문해 미군의 책임을 둘러싼 논쟁을 전개하는 등 1년 내내 4.3논의의 열기가 이어졌다. 또한 이 해 말에는 오성찬의 4.3증언채록집 '한라의 통곡소리'가 출판됐다. 이처럼 4.3진상규명에 있어서 1988년의 움직임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1-4 민주화운동 이후 제주 사회 환경 변화

1-4-1 제민일보, 4.3연구소, 예술단체, 진상규명운동 앞장

▶1989년: 제주도민, 직접 진상규명 위한 조사에 나서다

1989년에 접어들며 4.3진상규명운동은 또 다른 중요한 계기를 맞는다. 이는 그간의 논의가 진상규명을 촉구하던 수준이던 것에 반해 1989년에는 도민들이 직접 진상규명 작업에 나섰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4월 3일을 맞아 제주신문 4.3특별취재반(반장 양조훈)이 1년간의 준비 끝에 기획물 '4.3의 증언'을 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했고, 5월 10일에는 제주4.3연구소(소장 현기영)가 발족됐다. 또 강보성 의원은 ‘제주도문제연구소’를 설립해 4.3진상규명을 위한 자료조사에 나섰다. 

제주신문은 '4.3의 증언' 연재 외에도 4.3당시 제주 주둔 제9연대 연대장으로서 평화적인 사태 수습을 위해 미군정의 초토화작전 명령을 거부한 채 무장대 총책 김달삼과 평화협상을 전개하다 미군정에 의해 해임됐던 김익렬 장군의 실록유고 '4.3의 진실'을 연재함으로써 처음으로 미국의 책임에 관한 큰 단서를 제시했다.

1989년 처음으로 열린 ‘4.3추모제’는 특기할 만한 일이다. 서울의 제사협의 제안으로 제주민주화운동 진영과 제주지역총학생회협의회 등이 ‘41주기 4.3추모제 준비위원회’(이듬해부터 ‘사월제 공동준비위원회’로 개칭)를 구성해 주최한 이 행사는 대내외에 공개적으로 처음 열린 추모제이자 위령행사였다. 

4월 3일을 전후해 제주·서울·일본의 추모 모임이 열렸고 마당극, 노래극, 문학제, 강연회 등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이는 이후 연례행사로 굳어졌다. 이중에서도 놀이패 ‘한라산’은 매년 마당극을 열어 4.3의 대중화에 앞장섰는데, 1989년 첫 공연 때는 담당자들이 경찰에 연행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처럼 문화예술계의 활동에도 결코 적지 않은 노력과 희생이 뒤따랐다.

김기삼 작가가 촬영한 1989년 제주대학교에서 벌어진 민주화운동의 모습. 한 대학생이 경찰을 향해 화염병을 던지고 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김기삼 작가가 촬영한 1989년 제주대학교에서 벌어진 민주화운동의 모습. 한 대학생이 경찰을 향해 화염병을 던지고 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한편 1987년 12월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김영삼 후보가 단일화에 실패함에 따라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으나, 1988년 2월 취임한 지 불과 두 달 만에 열린 제13대 총선에서 여당인 민정당이 전체 의석 과반에 훨씬 못 미치는 의석을 확보했고, 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함으로써 이른바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이 형성됐다. 여소야대 정국은 4.3진상규명운동에 힘을 불어넣어주었다.

1989년 국정감사 때 강보성 의원과 최기선 의원(이상 당시 민주당)이 4.3진상규명을 촉구했고, 국정감사 사상 처음으로 ‘4.3증인’을 채택해 증언을 듣기도 했다. 이에 이군보 제주도지사는 “4.3의 올바른 조명을 위해 공신력 있는 기관에 의뢰, 이를 재정립하고 그에 따른 대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1990년: 3당합당 찬물…제민일보 탄생 불씨 살려

1990년 벽두에 ‘3당합당’이 전격 선언됐다. 여소야대로 인해 정국의 주도권을 쥐지 못하던 노태우 대통령이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야당 대표인 김영삼·김종필을 포섭해 3당 합당을 함으로써 거대 여당이 탄생했다. 이로써 여소야대 정국 속에서 무르익던 4.3진상규명 움직임은 3당합당 이후 정부의 태도 변화로 또다시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4월 제주를 방문한 안응모 내무부장관은 “4.3은 이미 법률적으로 다 끝난 사건이며 정부 주도의 재조명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라고 밝혀 1989년에 발표된 제주도의 정사 편찬 계획을 백지화했다. 

한편 1989년 말부터 언론민주화운동을 벌이던 기자들이 1990년 1월 집단 해고를 당한 ‘제주신문 사태’로 인해 4.3취재반의 기획물 '4.3의 증언' 연재도 중단됐다. 이런 가운데서도 제주신문 해직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새로 창간한 제민일보는 특별취재반을 재가동, 1990년 6월부터 기획물 '4.3은 말한다'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 연재물은 진상규명 운동을 선도했고 그 공로로 1993년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

4월 3일에 열린 4.3 제42주년 추모식은 경찰의 원천 봉쇄 속에 강행돼 대량 구속 사태를 빚었고, 7월에는 '제주민중항쟁'을 출판했던 김명식이 뒤늦게 국가보안법 위반혐의(이적표현물 제작)로 구속돼 그해 11월 징역 1년6월을 선고받았다.

▶1991년: 최루탄 난무한 4.3추모제

1991년은 1년 전 ‘3당합당’으로 인해 위축됐던 4.3진상규명 운동이 다소 활기를 되찾은 해였다.

3월에는 제주4.3연구소가 당시 신문인 '제주신보'(1947. 1. 1~1948. 4. 20)를 발굴 공개해 4.3의 배경 연구에 큰 기여를 했다.

4월 3일을 맞아 제민일보는 “1949년 4월 현재 인명피해는 1만5000명이며 이중 80%이상이 진압군에 의해 희생됐다”는 내용의 미군 비밀문서를 대대적으로 보도, 그 동안 풍설로만 전해져 오던 희생규모와 사건 성격의 일단을 밝혔다. 제민일보는 또한 왜곡된 국사교과서 문제와 관련 집필자들과의 인터뷰 결과를 실어 여론을 환기시켰다. 제민일보는 인터뷰 기사와 함께 왜곡된 국사교과서의 실태를 폭로하며 교과서 개정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1991년 4월 3일 제주지역 사회단체들이 공동으로 개최한 ‘4.3추모제’ 때는 추모제 장소인 관덕정 앞 광장이 경찰에 의해 원천 봉쇄됐고, 최루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시민·학생 등 무려 400여 명이 연행되는 사태를 빚었다. 특히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산하 전국 대학들이 ‘4.3시위’를 벌여 4.3을 이슈화시켰다. 놀이패 한라산의 공연은 제주시민회관 측이 ‘4월 내내 보수공사를 한다’는 이유로 대관 신청을 편법으로 기피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1992년: ‘다랑쉬굴 발견’…4.3논의 다시 활성화

1992년 1월에는 인기리에 방영되던 MBC대하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4.3을 다뤄 큰 관심을 모았다. 특히 이 드라마는 공산폭동이라는 관변의 시각을 극복, 탄압에 의한 생존권 수호 차원의 민중봉기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4.3을 재조명해 주목을 끌었다. 이 드라마는 또한 4.3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던 많은 국민들에게 ‘4.3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리는 계기가 됐다.

4월에는 4.3 당시 토벌대에게 무차별로 학살된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유해 11구가 다랑쉬 굴에서 발견돼 큰 충격을 주며 전국적인 관심을 모았고, 화가 강요배의 ‘4.3역사 그림전’이 열려 4.3진상규명의 논의를 다시 활성화하는데 기여를 했다.

4.3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가두진출을 시도하던 제주대학생들과 이를 저지하는 경찰 사이에 최루탄과 돌멩이가 오고갔다. 그해 말 제14대 대선 때 김대중 후보(민주당)는 제주지역에서 열린 유세에서 “4.3진상규명과 도민 명예회복을 위해 4.3특별법을 제정하겠다”고 공약했다.

▶1993년: ‘문민정부 시대’ 맞아 도의회 4.3특위 구성

1993년은 이른바 ‘문민정부’라는 다소 열린 분위기 속에서 4.3진상규명운동이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3월 20일 제주도의회 4.3특위(위원장 김영훈)가 1년간의 준비 끝에 정식 출범했다. 진상조사·역사정립·명예회복 및 위령사업 등 3단계 사업을 구상, 추진한 도의회 4.3특위는 공공기관에서 4.3을 공론화 했다는 점만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 도의회 4.3특위는 이후 희생자를 조사·발표하는 등 진상규명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4월에 들어서자 인명피해와 역사왜곡의 측면에서 제주4.3과 그 내용이 흡사한 ‘대만 2.28사건’에 대해 대만 정부가 명예회복 조치와 피해 보상을 할 것이라는 외신 내용이 '제민일보'를 통해 보도됨으로써 4.3진상규명에 대한 도민의식을 높였다. 

한편 1993년 10월에는 4.3특별법 제정과 특위 구성을 요구하는 청원서가 국회에 제출됐다. 제주지역총학생회협의회(의장 오영훈)가 변정일 의원을 대표 소개 의원으로, 제주도의회(의장 장정언)가 양정규 의원을 대표 소개 의원으로 해 각각 청원서를 제출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청원은 운영위에 회부된 이후 방치됐다가 본회의에 상정되지도 못한 채 사장됐다.

반면에 11월 12일 민자당은 ‘거창사건 명예회복 특별법’ 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에 도민들은 지역의 정치적 역량에 따라 역사 바로세우기가 좌우되는 현실을 보며 씁쓸함을 맛봐야 했다.

11월에는 조천읍 북촌리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희생자 조사를 벌인 끝에 이를 발표했다. 북촌원로회의 1차조사 결과, 전체 희생자 412명 중 409명이 군·경 토벌대에 의해 학살됐음을 밝혀 충격을 더했다. 이 조사활동은 4.3의 엄청난 충격과 피해의식에 시달려 오랜 침묵에 잠겨있던 경험세대들이 직접 조사에 앞장섰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1994년: 여․야 국회의원 75명, 4.3특위 구성안 발의

1994년 2월 2일 제주출신 변정일 의원은 1년 전인 1993년에 제출된 도민 청원과는 별도로 여·야 의원 75명의 서명을 받아 ‘제주도 4.3사건 진상규명 특별위원회 구성결의안’을 제출했다. 이로써 4.3특위안이 처음으로 국회에 정식 의안으로 발의됐다.

같은 날인 2월 2일 제주도의회 장정언 의장은 1994년을 ‘기초조사의 해’로 정하고 4.3피해 조사활동에 착수하겠다고 발표, 도민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2월 7일 도의회 내에 ‘4.3피해 신고실’이 개설돼 주민들의 신고를 접수하기 시작했다.

1994년 2월7일 제주도의회 정문 앞에서 열린 ‘제주4.3 피해신고접수처’ 현판식. 제공=제주도의회. ⓒ제주의소리
1994년 2월7일 제주도의회 정문 앞에서 열린 ‘제주4.3 피해신고접수처’ 현판식. 제공=제주도의회. ⓒ제주의소리

3월 10일에는 제민일보 4.3취재반이 그간 신문지면을 통해 연재했던 '4.3은 말한다'를 다듬고 보완해 '4·3은 말한다'(전예원)라는 제목으로 두 권의 책을 펴냈다. '4.3은 말한다'는 연재가 계속됨에 따라 현재 제5권까지 출판됐고, 비록 출판되지는 못했으나 제6권에 해당하는 내용이 연재됐다. '4.3은 말한다'는 또한 일본어로 번역됐다.

한편 1994년은 첫 합동위령제가 열린 해라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그 동안은 제주지역 12개 운동단체들이 모여 결성한 ‘사월제 공준위’가 1989년부터 5년째 4.3추모제를 열어 왔고, 반공유족회로 출범했던 ‘4.3유족회’는 1991년부터 3년째 위령제를 봉행하는 등 서로 입장을 달리하는 두 단체가 갈등을 빚으며 각각 다른 장소에서 행사를 벌여 왔다. 이에 제주도의회가 중재에 나서 ‘합동위령제’를 개최케 된 것이다.

한편 도민화합의 움직임 속에서도 수구적인 일부 인사들은 제주지역의 일부 일간지에 ‘4.3 공산폭동론’을 주장하는 기고를 연일 발표하며 진상규명 운동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또한 경찰은 4월 14일 새벽 ‘국가안전기획부 산하 애국동맹’이라는 정체불명의 단체 명의로 김일성을 찬양하는 문서가 발견됐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3월 18일 ‘국사교육 내용전개 준거안 연구위’가 발표한 교과서 개편 시안이 전국적으로 일파만파를 일으켰다. 4.3을 ‘항쟁’으로 규정한 개편 시안에 대해 역사학계의 보수적인 학자들과 보수 언론들이 많은 지면을 할애하며 크게 반발한 것이다. 시안을 마련한 서중석 교수(성균관대 사학과)에게 집중타가 가해졌고 결국 교육부는 시안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6월에는 건국청년운동협의회 제주도지부(지부장 김인선)가 주최하고 한국자유총연맹 제주도지회(지회장 강창수)가 후원한 ‘대한민국 건국과정과 제주비극(4.3)’이라는 주제의 우익단체 모임이 열려 예의 ‘공산폭동론’을 강조했다.

▶1995년: 제주도의회, '4.3피해조사 1차 보고서' 발간

진상규명 운동에 있어서 1995년이 갖는 의미는 그간의 노력들이 서서히 가시적인 성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5월 제주도의회 4.3특위는 그 동안의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4.3피해조사 1차 보고서'를 발간했다. 1만4125명의 희생자 명단을 일일이 기록한 이 책자는 향후 4.3연구의 귀중한 1차 사료가 될 것으로 평가되는 성과였다. 희생자 명단 속에는 10살 미만의 어린이 610명, 61세 이상 노인 638명의 이름도 수록돼 충격을 더했다. 도의회 4.3특위는 1차 보고서 발간 즉시 국회를 방문해 보고서를 전달하면서 앞서 1993년에 청원한 ‘국회특위 구성’이 조속히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해 줄 것을 촉구했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제주지역 지방지인 '제주일보'와 '한라일보'의 지면에는 일부 반공단체 인사들의 ‘공산폭동론’이 연일 투고 형식으로 게재됐다. 이들의 주장인 즉, ‘공산폭동으로 이미 판명된 사건을 두고 무슨 진상규명을 한다는 말이냐’는 것이었다. 이들은 또한 제주도 당국의 4·3위령탑 건립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성명을 일부 지방지에 광고 형식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1996년: 유족회와 공준위 합동위령제

1996년 새해 벽두부터 국회에서 낮잠 자고 있는 도민 청원에 대해 조속 처리를 촉구하는 여론이 드높았다. 이는 다가오는 4월 총선으로 제14대 국회가 마감됨에 따라 그간 국회 운영위에 계류 중인 두 건의 청원과 의원 75명이 서명한 특위구성안이 ‘물 건너가는 것이냐’는 회의가 일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제주도의회는 1월 19일 국회를 방문해 청원이 조속히 해결되도록 촉구하는 건의문을 전달했다. 그러나 국회 운영위는 제14대 마지막 임시국회가 끝나는 1월 27일에 가서야 청원심사 소위원회와 운영위원회를 잇따라 연 끝에 ‘시일 촉박’을 이유로 국회본회의에 부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4월에는 유족회와 공준위가 합동위령제 개최를 합의하면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해 도민 의지를 진일보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합동위령제는 1994년부터 세 번째 열리는 것이어서 새삼스런 일이 아니지만, 유족회가 그간의 입장과 달리 특별법 제정을 촉구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4.3은 공산폭동’이라는 단순논리만 내세우며 진상규명 무용론을 주장하던 유족회가 이렇게 입장을 바꾸게 된 것은 유족회 회장단이 개편됐기 때문이다. 그 동안은 과거 반공유족회 소속 인사들이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유족회를 주도했으나, 2월 25일 회장단 개편 때 토벌대에게 희생된 유족으로 회장 및 회장단이 대거 바뀐 것이다.

한편 ‘4.3 때 학살을 주도했던 군 정보과장은 아편중독자였다’는 제민일보 기사가 4월 2일자로 보도돼 큰 충격을 주면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여론을 더욱 높였다.

12월 17일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가 넘는 154명의 찬성 서명으로 ‘제주도 4.3사건 진상규명특별위원회 구성결의안’이 발의됐다. 이는 도민들의 기대를 부풀게 했으나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1997년: 제주4.3 제50주년 기념사업 범국민위원회 발족

1997년에는 4.3발발 50주년을 1년 남겼다는 시의성 때문에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어느 때 보다 높게 일었다.

특히 4월 1일 서울의 한국기독교회관에서 결성식을 가진 ‘제주4.3 제50주년 기념사업 추진 범국민위원회’는 4.3해법찾기를 향한 국민연대였다. 상임대표인 김찬국(상지대 총장) 김중배(참여연대 공동대표) 강만길(고려대 교수) 정윤형(홍익대 법경대학장) 등 각계의 명망있는 인사들이 대거 참여한 범국민위는 △정부의 양민학살 사실 인정과 자료 공개 △국회 4.3특위 구성 △4.3특별법 제정과 명예회복 조치 등을 촉구했다.

4월 '제민일보'는 “대량 학살극을 초래한 ‘4.3계엄령’은 불법이었다”는 기사를 보도해 진상규명 운동을 더욱 고조시켰다. 보도가 나가자 4.3범국민위원회의 성명과 함께 제주범도민회와 서울의 참여연대를 비롯한 전국 12개 지역 시민운동단체에서도 성명을 내어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다. 7월 8일에는 국회 천정배 의원(국민회의)이 ‘불법 계엄령’을 추궁하며 4·3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기도 했다.

2월 ‘대만 2.28사건’ 제50주년을 맞아 동아시아 인권위원회가 주최한 ‘동아시아 냉전과 국가 테러리즘’이라는 주제의 국제심포지엄이 대만에서 열려 큰 관심을 모았다. 그런데 이 행사에 참석키로 했던 제주도의회 4.3특위 의원들이 돌연 불참하게 돼 외압설이 나돌았다.

2월 27일에는 도의회 4.3특위의 '4.3피해조사보고서-수정보완판'이 출판됐다. 이는 1995년 제4대 도의회가 발간한 '1차 보고서'를 토대로 제5대 도의회가 수정 보완한 것으로 1만4504명의 희생자명단이 발표됐다. 도의회는 3월 11일 국회의장실과 여야 총무실 등을 방문, 이 보고서를 전달하면서 앞서 1996년 말 국회의원 154명에 의해 발의된 국회4.3특위 구성안이 조속히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해 줄 것을 촉구했다.

1997년은 영상으로 표현된 4.3다큐멘터리가 화제와 관심을 불러일으켜 ‘영상시대’임을 실감케 한 한해였다. 4.3영상물은 이미 ‘다랑쉬의 슬픈 노래’(1993년)와 ‘잠들지 않는 함성, 4.3항쟁’(1996년)이 대학가 등지에 널리 유포돼 4.3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해 왔다. 그런데 1997년 10월 경찰은 뒤늦게 제작자(김동만)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연행 조사해 사회적 물의를 빚었다. 이는 각계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며 오히려 4.3영상물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한편 부산 하늬영상(대표 조성봉)의 4.3다큐멘터리 ‘레드헌트’는 1년 내내 화제로 떠오르며 4.3논의를 전국은 물론 국제적으로 확산시켰다. 1997년 초 발표된 레드헌트는 그해 4월 열린 서울다큐멘터리영상제에 출품됐으나 주최측이 돌연 상영취소 결정을 내려 물의를 빚었다. 그러나 9월에 열린 인권영화제와 10월의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관객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그런데 11월 공안당국에서는 뒤늦게 이 영화를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로 규정, 인권영화제 때 이 영화를 상영했다는 이유로 서준식(인권운동사랑방 대표)을 연행 구속했다. 이에 국제사면위원회가 즉각 항의성명을 냄으로써 오히려 4.3논의를 확산시켰다. 

6월 6일에는 현충일을 맞아 ‘자유민주호국동지회’라는 유령단체 명의의 괴유인물이 시내 일원에 뿌려져 경찰이 수사에 나서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 유인물은 위령사업을 추진해 온 도지사와 도의회4.3특위위원장을 직접 거명해 비난하면서 “제주도 4.3운동 기념행사·위령제 등을 중지하고 북한의 공작선상에서 놀아나지 말고 깨어나라”고 주장했다.

9월 26일에는 제50주년 위령사업을 추진할 ‘제주4.3사건 희생자 위령사업 범도민추진위’(위원장 조승옥)가 결성됐다. 그런데 제주도가 중재해 구성한 이 단체는 위원 선정작업에서부터 밀실행정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또한 당초 위령사업을 반대하던 일부 인사들이 대거 참여해 이념논쟁을 시도함으로써 이에 반발한 시민단체가 탈퇴하는 등 물의를 빚었다. 이로써 유족회와 사월제공준위가 4년간 열어 온 화합의 위령제가 따로따로 행사를 치르던 지난날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으나 막판에 겨우 봉합됐다.

# 김종민은?

김종민(59)은 4.3의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일간지 기자 4.3취재반 13년, 국무총리 소속 4.3중앙위원회 전문위원 13년, 그리고 지금까지 30여년간 오로지 4.3 연구에만 매달리고 있다. 제민일보 ‘4.3은 말한다’ 취재보도, 정부 진상조사보고서 작성, 4.3평화기념관 전시 설명문 작성, 희생자·유족 인정, 일부 희생자를 제외시키라는 극우보수단체와의 숱한 송사를 맡아 승리로 이끌었다. 지금은 낮엔 농사를 짓고 밤엔 글을 쓰고 있다. 기자시절 무려 7000여명의 4.3유족들로부터 증언을 채록한 역사학도(고려대 사학과 졸업)로서의 집요함을 보였다. 이 방대한 증언은 4.3의 진실을 밝히는데 단초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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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규명 2020-06-12 10:35:12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역사가 지워지지 않고 기록되어야 하고 이 기록이 널리 알려져
잘못된 과오에 대한 반성과 처벌이 필수라고 봅니다
잘못된 역사는 반복되지 않아야 합니다
122.***.***.136

이상우 2020-01-12 21:42:32
옥석을 가려야 한다.
피해자.가해자를 가려야 하고 피해자는 구제해야 하지만 가해자는 민족의 반역자로 처벌해야 한다.
우리는 자정능력이 없고,정치권의 선전.선동에 오염되어 아직도 진영논리에 휘말여 영원히 불공정으로 역사의 상처로 남을것이다.
진실과 사실에 입각한 사람은 배제되고 진영논리에 이득을 보고자 하는 사람이 주도하는한 답이 없다.
39.***.***.14

도민 2020-01-12 15:22:32
좌파들은 착각하는것이 한국의 독립이 스스로 쟁취한것이라는것임.
실제 독립은 한국 스스로 이룩한것이 아니라 2차대전후 패전국인 일본이
승전국에 의해 이전 영토를 빼앗겼고 미,소가 한반도를 분할 통치
일본은 미,중에 의한 통치로 합의본것임(이후 국공내전으로 인해 일본에서 중국군의 분할 통치는 미국에 일임함)
49.***.***.237

바람 2020-01-10 09:47:54
“수괴급 공산무장 병력지휘관 또는 중간간부로서 군경의 진압에 주도적·적극적으로 대항한 자, 모험적 도발을 직·간접적으로 지도 또는 사주함으로써 제주 4·3사건 발발의 책임이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간부, 기타 무장유격대와 협력하여 진압 군경 및 동인들의 가족, 제헌선거 관여자 등을 살해한 자, 경찰 등의 가옥과 경찰관서 등 공공시설에 대한 방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한 자와 같은 자들은 ‘희생자’로 볼 수 없다” <2001. 9. 27. 헌법재판소 판결문>
182.***.***.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