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볶은 콩에서 새싹 키우듯 버틴 삶...4.3 응어리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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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72주년 기획] 4.3피해 회복탄력성 인터뷰 (3) 김창주
김종민 전 국무총리소속 4.3위원회 전문위원의 최근 '4.3피해 회복탄력성' 연구는 길게는 27년전 인터뷰했던 4.3피해자를 다시 만났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강산이 세 번 가까이 바뀌는 동안 4.3피해자들의 몸과 마음은 얼마나 회복됐을까. [제주의소리]는 4.3피해 회복탄력성 연구 보고서에 이어 연구 과정에서 진행한 인터뷰 11건도 소개한다. 월요일과 목요일 매주 두 차례 씩 총 11회 게재를 통해 4.3피해자들의 피해회복 과정 전반을 생생한 목소리로 전한다. [편집자 주]

연구방법은 많은 사람을 도식화된 설문조사를 통해 계량화·도표화하기보다는 심층 인터뷰라는 질적 조사방법을 적용하였다. 특히 본 연구의 책임연구원은 과거 4.3피해를 경험한 대상자를 조사한 적이 있다. 즉 책임연구원이 제민일보 기자 시절 '4.3은 말한다'를 연재하기 위해 1990년대에 이미 만나 인터뷰를 했으며(11명의 인터뷰이 중 8명), 인터뷰 내용이 신문에 게재된 바 있다. 일반적으로 사회학에서는 사생활 보호를 위해 인명과 지명을 알아볼 수 없도록 익명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은데, 본 연구의 본문은 익명이지만, 부록으로 실린 구술내용에서는 모두 실명을 사용했다. 구술자들도 이에 적극 동의했으며 사진 촬영은 물론 동영상 촬영도 허락했다. 실명을 쓴 까닭은 구술 내용이 검증될 수 있어야 하고, 그래서 구술 내용이 훗날 역사의 사료로써 기능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물론 구술자들이 구술을 마친 후 ‘어떠어떠한 내용은 빼 달라’고 한 부분은 삭제했다. [필자 주]

# 김창주(金昌柱. 제주시 이호동 출생, 거주)

1차 방문: 1999년 6월 8일
2차 방문: 2019년 7월 16일 

▲ 인적사항
* 생년: 1937년생. (호적에는 1939년으로 기록)
* 본적지(출생지): 제주읍 이호2구(속칭 ‘오도롱’)
* 학력: 외도국민학교, 제주중학교 졸업, 제주상업고등학교 야간 중퇴 

▲ 증언자 개인 정보
* 4.3 당시 가족관계: 8명(조부모, 부모, 증언자, 동생 3명). 이 중 4.3으로 인해 어머니와 증언자(1949년 당시 13살), 막내 여동생(당시 3살)만 살아남았고, 나머지 가족(조부모, 아버지, 동생 2명)은 사망. 증언자의 모친은 나중에 향년 62세로 작고.
* 현재 가족관계: 부인, 아들 3명, 손자 6명, 손녀 4명  


# 1차 방문시 증언(1999. 6. 8.)

* 증언자, 마을 희생자 자체조사

증언자는 지난 1992년부터 마을의 희생자조사를 위해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그 결과 '제주시 이호2동 4.3희생자 실태기록'(1995.5)이라는 책자를 만들었다. 출판한 것은 아니고 컴퓨터로 출력한 것을 제본한 상태이다.

[책임연구원 주: 그 책자에 의하면, 당시 이호2구 희생자는 273명(남자 185, 여자 88)으로 집계됐다. 당시 이호2구의 가구수는 222가구이며, 인구는 1060명이다.]

(어떻게 마을 희생 상황을 정리했습니까?)

“동네 어른들의 증언을 들으며 하느라고 했지만, 노인들의 기억력 감퇴와 가족이 몰살한 집안의 어린애 등은 누락됐을 것입니다.”

* 1948. 12. 07. 마을 방화 및 소개령(疏開令)

“내가 12살 때 일입니다. 이날 토벌대가 쓰러진 전봇대를 다시 세우라고 일을 시키니까 설마 죽일 거라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래도 젊은이들은 다 도망치고 없으니 장년층만 갔지요. 젊은이들은 1948년 여름철부터는 동네에서 보기 힘들었습니다. 밤에만 집에 왔다가 날이 밝기 전에 피신했으니까요. 또 그때까지는 그렇게 마구잡이 총살극이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토벌대가 이웃마을인 해안리와 노형리에 불붙이고 소개령을 내려도 우리 마을은 그때까진 아무 일 없었습니다. 그래서 해안리와 노형리 사람들이 우리 마을로 소개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토벌대의 명령에 따라 전봇대를 세우러 갔던 장년층이 주로 희생됐습니다. 그날 또한 마을을 불질렀는데 우리 마을 가몰개만 불질렀습니다. 

이호2구는 전체를 통칭해 ‘오도롱’이라고 불리는데, 이를 다시 나누면, ①가몰개(웃동네, 알동네, 섯동네, 호병밭 등) ②일주도로변 서쪽에 갈왓 ③일주도로변 동쪽 대동마을(큰가름)로 나뉩니다. 아무튼 일주도로변 마을인 갈왓과 대동마을을 제외하고 다 태운 것입니다.

[책임연구원 주: ‘오도롱’이라 불리는 이호2구는 주로 일주도로보다 산쪽에 위치한 중산간마을이 대부분이고, 이호1구는 속칭 ‘백개’라 불리는 바닷가 마을이다]

집이 불에 타니까 우리가족은 모두 대동마을에 사시던 작은아버지 댁으로 소개했습니다.”

* 소개민들 다시 산으로 피신

“우리가 이주한 대동마을 작은아버지 댁에는 우리가족 외에도 노형리에서 소개온 외조부(현명집․玄明集) 큰외숙(현창효․玄昌曉) 등 모두 20명이 같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집에 살던 노형리 사람 몇 명이 산으로 피신했습니다. 우린 “당신들이 피신하면 우리까지 피해본다”며 말렸지만 소용없었습니다.”

* 1949. 01. 11. 부친 김상익(金商翼,33) 도두지서에서 희생 ··· 노형리 외조부도

“부친이 죽기 전에도 남편이나 아들이 산으로 도망쳤다 하여 ‘남편과 아들이 어디갔느냐’고 따지며 몇 명씩 계속 학살극이 있었지만, 그날엔 특히 집집마다 청·장년이 사라진 사실에 대해 조사하고 감시를 했지요. 

그 결과, 우리와 같이 살던 노형리 사람이 피신한 사실이 들통났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김상익․金商翼)와 외조부와 큰외숙이 도두지서로 끌려갔습니다. 거기서 닷새 정도 취조를 받다가 외조부와 큰외숙이 하루 먼저 총살되고 다음날 아버지가 총살당했습니다. 

이듬해 봄에 도두리 속칭 ‘돔박곶홈’에서 시신을 찾았는데, 그곳은 매우 많이 희생된 곳으로 현재는 공항에 편입됐습니다.”

* 1949. 01. 13. 임이밭 학살극

“이날엔 우리가 소개해 살던 대동마을 사람들에게 이호국교로 모이라고 했습니다. 나를 포함해 어린 애까지 모두 집합했지요. 그리고 눈감으라 한 후 누군가에게 지목당한 사람을 끌어냈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상태였지만 청·장년이 사라진 집안은 도피자가족이라 하며 마구잡이로 죽이는 상황이라서 어머니는 아버지가 아직도 도두지서에 계시다고 우겼습니다. 일단 지서로 가면 죽는 거지만 아무튼 아직은 죄가 확정되지 않았고, 또한 거처가 확실한 것이니까요.

이날엔 ①도피자가족 ②산에 앞장서던 사람 ③감정에 의한 지목 등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불려 나갔습니다. 이날 토벌대는 불려나간 사람들을 속칭 ‘임이밭’으로 끌고 가 죽였고, 또한 대동마을 마저 모두 불태웠습니다. 그러니 이호2구 사람들이나 노형리 사람들은 갈 곳이 없었지요. 이호1구에 연고가 있는 사람들은 그 집을 찾아갔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일제 때부터 농산품 구판장이던 이호1구의 한 창고에 수용됐습니다.”

제주사람 모형을 세운 김영훈의 작가의 '군중'.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사람 모형을 세운 김영훈의 작가의 '군중'.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 1949. 01. 13 밤. 무장대, 감금된 사람들 이끌고 입산

[책임연구원 주: 이무렵 무장대가 주민들이 감금된 곳을 습격해 주민들을 이끌고 산으로 오른 사례를 여러 마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무장대가 토벌대에게 죽을 위기에 놓인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벌인 일이지만, 산으로 오른 피난민들이 굶어죽거나 얼어죽는 등 결과적으로 더 큰 희생을 초래하기도 했음]

“임이밭 사건이 나고 우리가 백개(바닷가 마을인 이호1구)의 한 창고에 수용된 바로 그날, 산사람들이 내려와 총을 팡팡 쏘면서 우리를 데리고 산으로 올랐습니다. 그땐 잠자다 그 일을 당해 모두들 정신없이 나왔지요. 그러다보니 난 고무신도 못 신은 채 그 추운 길을 맨발로 갔습니다. 정신없이 흩어져 올랐지요. 할머니와 할아버지, 난 10살과 7살 동생을 이끌고, 어머니는 3살 난 아기를 업고 각각 올라 산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처음엔 해안리 ‘오로콤밧’에서 있었는데 자꾸 쫓기다보니 ‘어승생’ 주변까지 올랐습니다. 우린 주로 어승생 서쪽에 있었습니다. ‘방아내는도’, ‘모살도’, ‘제비새통’, ‘사제비’ 위쪽, 윗세오름 아래 나무가 있는 곳인 ‘서근주먹’ 부근 등 한라산 기슭을 옮겨다니며 살았습니다. 마지막엔 ‘쳇망오름’ 부근의 초기밭(표고버섯 재배장)에까지 피난 갔다가 왔습니다. 아래서 자꾸 정보가 올라옵니다. 오늘은 토벌 온다고. 거기서도 주로 같은 마을 사람끼리 살았습니다.

눈 위에 나뭇잎을 깔고, 나뭇가지로 지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불을 피워 온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아침에 일어나면 그 연기 때문에 눈을 뜨지 못할 지경이었지요. 

먹을 것은 몰래 마을로 갔다 온 사람들이 음식을 모아 와 배급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활동할 나이의 사람이 있는 집은 그럭저럭 먹었으나 우린 활동할 사람이 없어서 딱 주는 것만 먹으니 늘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어머니와 같이 먹을 것을 가지러 마을로 내려가 타다 남은 곡식을 한 짐 짊어지고 올랐습니다. 거기서 고무신을 하나 구했지요. 처음에 오를 때 맨발이다가 이렇게 힘들게 고무신을 구했는데, 고무신은 발의 땀이 얼면서 뻣뻣해 지며 꺾어졌어요. 그래서 녹이다 태워버렸습니다.”

* 1949. 03. 29(?) 동생 김창석(金昌石,10) 김춘자(金春子,여,7) 실족사

[책임연구원 주: 동생들을 잃은 때가 음력 2월 그믐이라고 했다. 그러면 양력으로는 1949년 3월 29일이다. 이때까지 증언자는 차분히 증언했으나 동생들 이야기를 할 때는 자꾸만 눈물을 훔쳐냈다.]

“새해가 되니 난 13살, 그리고 동생들은 10살, 7살, 3살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서근주먹’ 부근에 있을 때 토벌 온다는 정보가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쳇망오름으로 피하게 됐는데 어머니는 연로해 운신이 어려운 조부모님 때문에 그냥 남았고, 난 다른 사람들과 같이 3살짜리는 업고, 나머지 두 동생을 재촉하면서 쳇망오름 부근까지 피신해 가서 거기에서 며칠 살았습니다.

그러다 ‘토벌대가 지나갔다’는 소문에 다시 서근주먹으로 돌아오게 됐는데, 나는 3살 난 아기를 업은 채 두 동생을 앞세워 재촉하며 걸었습니다. 그런데 참 먼 거리였습니다. 그래서 두 동생은 힘이 들어 막 울었습니다. 그러나 나도 아기를 업고 있는 처지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동생들을 달래기도 하고 발로 때리기도 하면서 길을 재촉했습니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주먹만한 빗방울이 떨어지고. 우린 일행에서 자꾸 뒤쳐졌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어 거의 다 돌아왔을 무렵에 내가 앞장을 섰습니다. 그런데 서근주먹에 도착해 보니 동생들이 없는 겁니다.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물으니 ‘바로 이 근처까지 오는 걸 보았는데….’라고 했습니다. 어머니와 내가 동생들을 부르며 주변을 헤맸지만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당시엔 해동기라 위에 눈이 녹지 않아도 아래로는 물이 흐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마도 그런 곳에 빠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난 동생들 제사를 지내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45세 되던 해 남의 싸움을 말리다 그들 중 한명의 주먹에 맞아 기절했습니다. 2~3일 후 의식이 회복됐는데 그때 동생들 모습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그 후부터는 부모님 제사 때 동생들 밥도 함께 올립니다.”

* 1949.04.23 할아버지 김이휴(金利休,67) 병사…1949.04.27 할머니(71) 병사

“몇 개월 피신생활을 하다 보니 조부모는 기진맥진해졌습니다. 운신도 어려웠지요. 조부모는 ‘죽어도 고향으로 가서 죽겠다’며 집터로 내려와 감자구덩이 속에 들어갔습니다. 얼마 후 5촌 삼촌이 조부모를 발견, 집으로 모셔왔으나 나흘 사이로 나란히 돌아가셨습니다.”

* 1949년 4월 말경 ‘귀순’

“우리도 결국 귀순했는데, 귀순할 때는 아마도 조부모가 돌아가실 무렵인 것 같습니다. 우리를 모르는 곳으로 귀순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오라리로 귀순했지요. 그런데 군부대로 넘겨지기 전, 함께 내려온 젊은 남자들은 우익청년단에게 무지막지하게 매를 맞았습니다. 쇳소리가 나도록 맞았습니다.

우린 주정공장으로 보내져 심사를 받았는데, 청년들이나 매에 못 이겨 실토한 사람들은 풀려나지 못한 채 육지형무소로 보내졌다가 6·25전쟁 직후 학살됐습니다.

부녀자들에게도 ‘실토하면 살려주고, 거짓말하면 죽인다’면서 마구 때렸습니다. ‘너 습격에 가담했지?, 불 지르는데 가담했지?’하며 다그칠 때 매에 못 이겨 ‘예!’하고 대답하면 형무소로 끌려가는 것이지요.

김아무개의 모친은 2살 난 어린애기를 품고 육지형무소로 끌려갔는데 거기서 둘 다 죽었습니다.”

* “볶은 콩에도 새싹난다”

“4.3 이후 아버지나 젊은 형이 있는 사람들은 생활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힘으로 밭농사 짓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밭을 갈아엎을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집안에 장정이 있고, 밭갈쇠(쟁기를 끌며 밭을 갈 수 있는 힘세고 길들여진 소) 한 마리 있으면 다른 집 밭을 갈아주며 번 돈으로 한해에 밭 하나씩 살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우리는 어머니와 같이 죽기 아니면 살기로 살았습니다.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낸 것을 보면 볶은 콩에도 새싹이 나는 것 같습니다.”

* 증언자의 트라우마

“난 지금도 붉은 벽돌만 봐도 마을이 불에 탈 때 돌이 시뻘겋게 됐던 당시가 떠올라서 가급적 피해갑니다.”

[책임연구원 주: 구술자는 담담히 증언하다가도 다시 동생 이야기가 나오면 자꾸만 눈물을 훔쳐냈다.]


# 2차 방문시 증언(2019. 7. 16.)

* 동생 김창석(金昌石,10) 김춘자(金春子,여,7) 실족사에 대해

“토벌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서근주먹에 있던 사람들이 대정면에 있는 쳇망오름으로 피신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연세가 많고 치매 증세가 있어 어머니는 함께 피신하지 못했고, 당시 13살이었던 내가 동생 3명만 데리고 피신했습니다. 며칠간 그곳에 있다가 토벌대가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어머니가 계신 서근주먹로 돌아왔는데, 3살짜리 동생들은 내가 업고 다른 동생 둘은 이불을 짊어지고 뒤에서 따라왔습니다. 10살, 7살 나이에 이불을 짊어졌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한라산 쪽인 서근주먹 동쪽은 물이 내리는 곳입니다. 처음에는 동생 둘을 앞세워서 걸었는데 길이 멀다 보니까 너무 힘들었습니다. 서근주먹에 거의 도착할 때쯤 힘들어서 잘 걷지 못하는 동생 둘이 잘 걷지 못하자 혼내면서 ‘이제부터 내가 앞에 설 테니 따라오라’고 말하며 내가 앞으로 가서 걸었습니다. 서근주먹에 도착해 뒤를 돌아보니 동생들이 없었습니다. 

당시 살얼음이 얼어있던 곳에 빠진 것 같은데 어른이면 어떻게 나올 수 있었겠지만, 이불을 짊어지고 있던 어린 동생들은 못 나온 것 같습니다. 하필이면 그 날 비가 엄청나게 내렸습니다. 겉으로는 눈이 쌓여 있어도 그 아래 물이 흐르는 곳에 빠져 이불이 물에 젖어 무거워지자 그만 빠져나오지 못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뒤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았겠지만 이야기하면 앞서가던 내가 충격 받을까봐 말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책임연구원 주: 1999년 1차 증언 때에는 실족사한 동생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계속 흘렸는데, 20년이 지난 2019년 2차 증언 때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담담하게 말함]

* 할아버지 김이휴(金利休,67), 할머니(71)의 병사 (1949년 4월 23일, 1949년 4월 27일) 

“할아버지, 할머니는 ‘죽어도 고향 가서 죽겠다’며 산에서 내려가 집터에 있던 ‘감저(고구마) 구덩이’에 들어갔습니다. 고구마를 캐서 저장해 놓는 곳이 ‘감저 구덩이’인데. 감저 구덩이는 1m가량 땅을 파고 조 짚으로 옆을 에워싸고 그 안에 고구마를 담은 후 위쪽에 다시 짚과 흙을 덮는 형태로 만듭니다. 불 타버린 집터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고 감저 구덩이만 있으니까, 거기가 그나마 좀 따뜻한 곳이니까 그곳에 숨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숨어 계신 것을 5촌 삼촌이 발견해 도두리로 모셔갔는데 두 분이 나흘 사이로 돌아가셨습니다.”

* 학력

“오도롱은 워낙 향학열이 높은 곳입니다. 옛날부터 양반들이 살았던 동네입니다. 일제 때도 글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야학도 활발하게 운영되었지요. 오도롱은 이웃마을 노형리와 더불어 원체 향학열이 높은 곳입니다. 돈을 버는 것보다도 일단 배워야 한다는 분위기가 더 컸던 마을이지요. 나는 4.3 당시 외도국민학교를 다녔고(4학년 8반), 6·25전쟁 때에는 제주중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마쳤습니다. 이후 제주상업고등학교 야간반도 들어갔지만, 집안이 너무 어려워서 중퇴했습니다. 이후 딱히 직업을 구할 수 없어서 조농사와 보리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제주사람 모형을 세운 김영훈의 작가의 '군중'.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사람 모형을 세운 김영훈의 작가의 '군중'.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 4.3 이후의 경제생활

“어머니께서는 어린 자식 둘(구술자와 여동생)을 데리고 조, 보리농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생계가 어려워서 가지고 있는 밭을 팔아 가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결국 가지고 있는 밭을 모두 팔게 되었지요. 아버지가 있는 집안은 밭갈쇠 한 마리 있으면 한 해에 밭 하나씩 살 수 있었지만, 우리 집은 밭을 팔아가며 어렵게 살았습니다. 23살에 군대에 갔는데 독자라는 이유로 의가사 제대를 했습니다.”

* 일본으로 밀항해 번 돈으로 재산 일궈

“30대 초반에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습니다. 결혼 후 아들 둘도 있는 상태인데 혼자 일본으로 가서 공장에서도 일하고 이것저것 막일들을 했습니다. 일본에서 25년간 살다가 55세가 되는 1992년에 일본에서 돌아왔습니다. 나는 ‘55세 되면 반드시 돌아온다’고 다짐했었지요. 이후 밀항으로 일본에 간 것이 문제가 되어 다시 갈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번 돈을 제주로 보내면 부인이 알뜰하게 이를 모았기 때문에 지금의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벌어온 돈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였지요. 돈은 내가 벌었지만 부인이 모든 궂은일을 다 도맡아 하며 오늘날 안정적인 삶을 구축하게 하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 제주시 이호2동 4.3 희생자 실태기록 보고서 발표 계기 (1999년 5월) 

“일본에서 돌아온 1992년 말쯤에 마을에 잔치가 열렸습니다. 그 잔칫집에서 ‘우리 동네가 이렇게 큰 희생을 당했는데 이를 기록이라도 남겨야 하는거 아니냐’라는 말이 어른들 사이에서 나왔습니다. 어른들은 나에게 그 책임을 맡겼습니다. 각 지역의 책임자들을 다 정해서 역할을 분담했지만 나중에는 결국 내가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집마다 다니면서 증언을 듣고 1995년에 보고서를 최종 마무리했습니다. 

보고서가 발표된 1995년은 김영삼 대통령 때입니다. 그때는 군사정권이 좀 마무리된 때라서 4.3에 대한 이야기를 그나마 할 수 있었던 겁니다.” 

* “지금도 4.3의 아픈 상처 회복하지 못해”

“4.3에 대한 멍에를 떨쳐냈다거나 마음이 회복되었다고 느낄 때는 없었습니다. 지금도 마음속에 응어리가 남아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겠다’라는 생각보다는 ‘옛날에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것만 자꾸 생각이 납니다. 마을을 돌아다니다보면 여기에선 이런저런 사람이 죽었는데, 저기는 어떤 밭이었는데, 저기에서는 누가 총으로 맞아 죽었는데 하는 이런 것들이 생각납니다. 4.3 때 불탄 것들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 “유족회 활동이나 4.3문제에 관심 없다”

“4.3유족회 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정치 문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대통령 직선제 등은 모두 내가 일본에 있을 때 일어났던 일입니다. 일본 가기 전에는 4.3 이야기를 아예 할 수 없었고 할 이야기도 없었지요. 당시는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그런 생각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4.3 이야기만 하면 공산주의자로 몰렸으니까요. 

이제는 4.3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은 알겠지만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4.3에 대해, 그리고 정치 문제에 관해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는 이로 인해 엄청난 혼란과 피해를 겪었기 때문에 외면하고 싶은 마음 때문인 듯합니다. 굳이 거기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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