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188. 사람 늙으면 개 된다

* 늙으민 : 늙으면, 나이 들어 노쇠해지면

참 참혹한 얘기다.

이런 장면을 상정해 볼 수 있겠다. 

긴긴 겨울밤, 늙으면 잠도 멀리 달아나 버리고 머리맡에 외로움만 웅덩이의 물처럼 잔뜩 고인다. 게다가 밤 이슥할수록 배가 출출해 입 안에 침이 고이기 시작하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눈이 펄펄 내리니 우영밭(텃밭)에 묻어 놓은 감저(고구마)를 몇 개 파오거나, 무수(무)를 몇 뿌리 뽑아다 잘 드는 식칼로 슥슥 슥슥 껍질 벗겨 먹으면 이런 풍미(風味)라니, 천하 일미(逸味)가 따로 없다. 한순간에 요동차던 뱃속이 잠잠해진다. 

한데 어느 주책없는 노인네, 눈 내리는 추운 날씨라 배는 고프고 참다 못해 슬금슬금 정지(부엌)에 들고 말았다. 솥뚜껑을 여닫는가 하면 냄비, 찬장 언저리를 닥치는 대로 뒤적인다. 이쯤 되면 온전한 정신이 될 수 없다. 어둠 속에서 무얼 찾느라 혈안이 된 마당에, 달그락 소리가 안 나는 재주가 있으랴.

한잠중에 이 웬 소린가. 그릇 부딪히는 소리에 잠에서 깬 어느 식구, 겁도 나고 얼떨결에 “이놈의 도둑개!” 하고 냅다 소리를 지르고야 만다. 이 어디 나이 든 체면에 낯 들 수 있는 일인가. 후다닥 뛰어나오고 만다. 가장이란 사람이 가족에게 내쫓겼으니 이 일을 어이 할꼬. 그런다고 ‘간밤에 내가~’ 하고 차마 이실직고할 수 있으랴. 

남의 일 같지 않아 명치 끝이 빳빳하고 가슴이 아려 온다.

상상해 볼 일이다. 이 얼마나 처량한가. 인터넷을 열면 창 한쪽에 사진과 함께 뜨는 글귀가 떠오른다.

‘인생이 참 외롭습니다.’ 

비쩍 마른 몸에 허름하게 입은 입성만 봐도 참 외롭겠다는 느낌이 든다. 왜 그럴까. 주위에 핏줄도 없는가. 절연(絶緣)이라도 한 것인가. 긴 인생을 살아오면서, 세상에 그렇게도 인연이 없는가. 한숨과 탄식 그리고 배고픔 속에 인생 황혼기를 하염없이 보내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처참하게 다가온다. 참 딱한 신세다. 이렇게 가련할 데가.

이제 노후 대책이 인생의 중요한 문제가 돼 있다. 젊은 시절에 노후를 설계해야 한다. 자식에게 너무 의존할 게 아니다. 자식에게도 그들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 퇴직 후 월 연금이 보장되지 않을 것이면 노후를 위해 저축해야 하리라. 

그게 노후를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임을 일찌감치 자각해 반드시 실행에 옮겨야 한다. 각자도생하는 게 최상책이 아닌가. 개인주의하고는 개념이 사뭇 다르다.

시난고난 어떻게 살아온 인생 역정인가. 적어도 늙어서 ‘개 취급’은 받지 말아야 한다.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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