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사건 당시 정뜨르비행장(현 제주공항)과 대전 골령골에 암매장된 행방불명인들의 재심청구를 법원이 받아들였다.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장찬수 부장판사)는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불법 군사재판을 받고 사라진 재심청구 4.3행방불명인 74명에 대해 최근 개시 결정을 통보했다.

이들 중 절반 가량은 1948년 4.3을 전후해 행적이 끊기고 이후 정뜨르비행장에 암매장 당한 희생자들이다.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 출신인 故 문기호(1925년생)씨의 경우 구엄국민학교 교사이던 1949년 봄. 퇴근후 집으로 가던 길에 느닷없이 군경에 붙잡혀 제주경찰서로 끌려갔다. 

재심청구인인 여동생 문정어(86) 할머니는 당시 13살 국민학생이었다. 초토화작전과 소개령으로 고성리 마을이 불바다로 변하자, 어머니를 모시고 제주시내 외가댁으로 몸을 피했다.

수소문 끝에 오빠가 제주경찰서에 끌려간 사실을 확인했지만 이후 행적이 끊겼다. 1999년 4.3수형인명부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오빠가 사형을 선고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후 19년만인 2018년에 제주공항 유해 발굴 현장에서 오빠의 유골과 마주했다. 정뜨르비행장 4.3유해발굴 사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머지 절반은 대전 골령골 총살 암매장의 희생자들이다. 재심청구인인 백여옥(80) 할머니의 경우 4.3사건으로 아버지(백운기)와 오빠(백대경)를 모두 잃었다.

백 할머니는 1948년 4.3 당시 만 6세였다. 마을이 불바다로 변하자 산에 숨었지만 이듬해 1월17일 오빠는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총살을 당했다. 당시 10살 남짓 어린이였다.
   
주정공장으로 끌려간 나머지 가족들은 몇 달후 풀려났지만 아버지는 불법 군사재판을 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징역 7년을 선고 받고 옥살이를 시작했지만 이후 연락이 끊겼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7월초 대전에서는 치열한 교전이 있었다. 그 사이 군 헌병대와 경찰은 그해 6월28일부터 7월17일까지 세 차례 골령골에서 수형인 등을 집단 학살했다.

당시 희생자는 4.3 관련 수감자와 보도연맹 등 최소 3000명에서 최대 7000명에 이른다. 이중 4.3희생자는 300여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법원의 재심 결정에 따라 이들 74명에 대해서는 73년 만에 정식 재판이 열린다. 법원은 앞선 1월21일 4.3행방불명인 재심 청구인 10명에 대해 사상 첫 무죄를 선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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