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올레 다단계라니’
‘아니, 올레 다단계라니’
  • 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 (news@jejusori.net)
  • 승인 2021.05.05 09:0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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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숙의 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 (12) 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코로나 시국으로 서로 거리를 두고 온전한 마음을 나누기 어려운 지금, 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이 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길이 품고 있는 소중한 가치와 치유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를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 편집자
사진=서명숙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

4월 초 정말 ‘봄 봄’ 소리가 절로 나는 화사한 날씨였다. 그녀들을 맞닥뜨린 건 21코스 하도리 해안가에서였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띄엄띄엄, 둘씩 셋씩 혹은 혼자서 걷고 있었다. 나는 이곳 해물칼국수와 해물파전으로 유명한 ‘석다원’ 음식점에 지인과 점심을 먹기 위해 차를 세우던 중이었다. 그래도 스탬프 박스가 있는 곳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어서 거기에 눈길을 한번 주는데, 누군가 내 곁에 다가왔다. 

혹시 올레 이사장님 아니냐고 묻는다. 예전부터 길에서 자주 받는 질문이다. 허나 요즘처럼 마스크를 써서 얼굴의 절반이나 가린 상황에서 알아보다니 참 눈썰미가 대단하다 싶었다.(나중 알고 보니 스타일을 보고 금세 눈치를 챘단다). 그렇다고 답했더니 여고생처럼 폴짝폴짝 뛰면서 좋아라한다. 

그러더니 뜻밖의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이사장님, 저희들 올레 다단계예요, 모두 다요.” 그러고 보니 그녀 옆에 또 다른 여자 둘이 수줍게 미소지으며 서 있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올레 다단계라니? 이게 웬 말인가? 누가 올레 이름을 빙자해서 무슨 다단계 사업을 벌인 건가? 본디 다단계에 대해 육지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도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었지만, 제주에 귀향한 뒤에 이곳 지역사회에서 다단계로 인해 온 일가 친척이 폭망한 사례를 많이 들었다. 

사진=서명숙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

순간 내 표정이 너무 일그러졌던 걸까. 그녀가 까르르 웃으면서 “어머어머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다단계 아니고요. 착한 다단계, 자발적인 다단계라니까요.” 그제서야 그녀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녀는 가야대학교 언어치료청각학과에 초빙교수로 재직중인데 거기서 만난 학과장 교수님과 올레 14-1코스를 패스포트 없이 따라 걸었고 올레에 반한 그녀에게 교수님께서 패스포트를 선물해 주셔서 본격적으로 올레꾼이 되었단다. 매달 한번씩 내려와서 걸으며 너무 좋아 주변 가까운 지인에게도 완주를 권하고 싶어 패스포트를 구입해 선물을 했단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또 패스포트를 두 권 사서 다른 지인에게 선물을 했더라고요. 그걸 받은 사람은 또 각자 두 권씩 사서 주변에 다시 선물하고. 저희 주변에서 일파만파로 퍼지고 있어요. 우리 연구소 올레꾼들은 자연스럽게 올레DDG라는 사내 동호회가 형성되었습니다. 이게 다단계인 거죠. 뭐.”

아, 하. 그랬었구나. 갑자기 지옥에서 천당으로 옮겨온 기분이었다. 이런 다단계라면 얼마든지 안심이고, 권장할 만한 일이지.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그런 팬심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의 꿈은 더 멀리, 더 깊은 곳에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할 이야기가 있으니 조금만 시간을 내줄 수 있는지 물었다. 뱃속은 꼬르륵 소리가 났지만 간절한 그녀의 눈길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 무슨 이야기인가요?

# 발달장애 자녀 돌보는 부모들을 이곳에 모시고 오고 싶다

사진=서명숙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

그녀는 경남 창원에서 이윤정심리언어발달연구소도 운영하며 발달이 느린 친구들에게 디딤돌이 되고자 12명의 전문치료사 디딤이들과 함께 하고 있다고 한다. 동행한 두 여자도 함께 일하는 교사란다. 아이들이 순수하고 사랑스럽긴 하지만 돌봄에 에너지가 워낙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자신들도 위로가 필요하고 치유가 필요해서 이렇게 올레길을 찾는 것이란다. 한 번씩 걷고 돌아가면 마치 배터리를 충전한 듯 한동안 기운이 나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집중할 수 있더란다. “저희들은 그나마 수업 시간에만 돌봄에 충실하면 되지만, 학생들의 엄마 아빠는 24시간, 365일 돌봄으로부터 놓여날 수가 없고 자식 걱정에서 해방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학부모와 학생들을 다 제주로 데리고 와서, 부모님들은 올레길을 걷게 하고 그 사이에 저희 교사들은 아이들과 숙소나 인근 캠프장에서 수업을 하면 어떨까 싶어요. 어때요? 괜찮은 생각이죠? 저희들은 꼭 한번 해보고 싶어요.”

윤정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몇 달 전 언론에서 접했던 기사가 떠올랐다. 혼자 발달장애 아이를 돌보다가 몸과 마음이 지친 나머지 아이와 함께 극단적인 선택을 한 엄마가 그 비극적인 기사의 주인공이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한 마을 사람들이 다 동원돼야 한다는 얘기도 있지 않은가. 독박 육아도 힘들거늘, 하물며 발달장애 자녀를 돌보는 수고야 말해 무엇하랴. 그 부모들에게 치유와 쉼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길을 걸으면서 열심히 그 방법을 궁리하는 선생님들이 어찌나 훌륭하게 여겨지던지. 착한 다단계 조직원일뿐더러, 존경받을 만한 발랄한 선생님들이었다.

난 그녀에게 또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얘들은 수업, 부모들은 힐링도 좋지만 아이들에게도 걷기 힐링을 선사할 필요가 있음을. 내가 아는 서귀포의 한 아동복지센터에서는 발달 장애아들을 한달에 한번씩 올레길과 오름을 걷고 오르도록 한다. 나도 그 길에 두어 번 동행한 적이 있는데, 자연을 그들만큼 순수하게 몰입해서 즐기는 올레꾼도 드물 정도였다. 실내에서, 닫힌 공간에서는 소리고 지르고, 싫증도 쉽게 내는 편인 친구들도 길에선 행복한 표정으로 걷는 걸 여러 번 목격했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그녀는 눈을 반짝이면서 박수를 쳤다. “아, 그럴런지도 몰라요. 센터의 마당에서 놀 때만 해도 교실에서보다 훨씬 생기가 있거든요. 저희들이 아이들을 돌보면서 걸으면 되겠네요. 부모님들은 모처럼 자유를 만끽하시고. 어떤 지점에서 다시 만나면 되죠 뭐. 아예 떼어놓으면 외려 더 마음을 쓰는 부모님들도 계시니까.”

길 위의 대화를 아쉽게 마무리 지으면서 우리는 훗날 그 꿈이 이뤄질 때까지 연락을 주고받기로 하고, 전화번호를 교환한다. 그날 밤, 윤정씨가 긴 문자를 보내왔다. 올레길을 걷는 것만도 행복한 일인데, 뜻밖에도 길에서 길을 만든 선생님을 뵈어서 마치 로또를 맞은 것 같았다고, 그리고 자신들의 꿈을 응원해주고 긍정적인 조언까지 해주셔서 넘 감사하다고. 

사진=서명숙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

나는 이 ‘올레 다단계’ 윤정씨에게 오히려 내가 로또를 맞은 기분이라고 답장했다. 우리가 낸 이 길에서 본인들만 치유받고 행복해하는 게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 패스포트를 구입해서 나누고,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모두 치유받고 행복해지는 길까지 고민하는 교사들을 만났으니. 그 덕분에 우리가 올레길을 내기를 참 잘했구나, 다시 한 번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봄날, 어느 해안길의 우연한 만남은 내게 또 하나의 즐거운 인연을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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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근 2021-05-06 10:16:27
오랜만에 훈훈한 얘기 듣습니다. 그 계획이 꼭 실행 되었으면 합니다.
220.***.***.179

입도 11년차 2021-05-05 17:46:20
예전에는 방학때 어린 자녀들 데리고 한달살기 하거나 딸린 식구 없는 비혼들 한달살기가 많았는데 요즘은 중장년 한달살기가 부쩍 늘었더라고요
그 분들이 한결같이 하는말이 올레길이 코로나블루 특효약이라고~^^
39.***.***.154

22기 2021-05-05 09:43:29
지칠줄 모르는 에너지, 다시 한번 느껴봅니다.
코로나 조심하세요~~
39.***.***.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