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무게로 힘겨워 하는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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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세이레아트센터 ‘먼 데서 오는 여자’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까지 다 돌아가시게 하고, 나까지 이렇게 만든 4.3이 왜 일어났는지 난 아직도 납득이 안된다. …… 지금부터 살면 얼마나 살지, 죽는 날까지 하루하루 아픈 것을 견디며 지내보자는 마음뿐이다.”

- 2019년 4.3연구소 증언본풀이, 생존자 강양자 씨 증언

“저는 건우가 살아 있는 모습만 기억하고 싶었어요. ‘웃는 모습으로 그냥 기억하고 싶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고 그래야 내 아들이 죽었다 생각이 안 들고 내 마음속에서 같이 살아가지.’”

-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 ‘금요일엔 돌아오렴’, 2학년 4반 김건우 학생의 어머니 노선자 씨 이야기

지극히 평범한 개인 앞에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과 고통이 예고 없이 닥친다면, 어떤 마음으로 대처할 수 있을까. 이름도 외우기 힘든 많은 약과 독한 술, 그 어떤 것으로도 몸과 마음의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는다는 건 제주4.3도 세월호도, 그리고 다른 사건들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수탈과 학살의 역사에서 입에서 입으로 제주 섬 민초들에게 전해진 ‘살다보면 살아진다’는 말을 문뜩 떠올려본다. 그것은 어쩌면 극도의 인내로 아픔을 응축해서 깊숙이 간직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거는 일종의 주문이 아니었을까.

35년 일제 수탈, 전국에 걸친 대규모 학살, 동족상잔 전쟁, 땅과 민족을 가른 분단, 불법 군사정변과 권위주의 정부, 무자비한 공권력, 속된 말로 인력을 갈아서 이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초고속 산업화…. 동아시아 작은 반도의 근·현대사 밑바탕에는 거대한 역사의 그림자에 가려 무수한 희생을 감내해야 했던 소시민들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이 고여 있다.

세이레아트센터가 6월 29일부터 7월 17일까지 공연하는 연극 ‘먼 데서 오는 여자’는 이러한 굴곡진 현대사에 휩쓸리며 상처 입은 두 노부부를 통해, 삶이란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만든다.

ⓒ제주의소리
'먼 데서 오는 여자'에 출연한 정민자(왼쪽), 강상훈. ⓒ제주의소리

작품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출연진은 나이든 여자(배우 정민자)와 남자(강상훈) 단 두 명 뿐. 무대는 벤치 두 개, 휠체어, 쓸쓸한 단풍나무가 전부다. 마당 있는 집이 좋다는 여자, 어딘가 공허한 여자의 말과 행동을 익숙하게 맞장구 쳐주는 남자. 여자를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남자, 그런 남자를 의아하게 여기는 여자.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리는 듯하다. 관객은 이들이 부부 관계이며 여자의 기억력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다. 

작품은 등장 인물의 가슴 아픈 사연을 하나 둘 풀어내며 갈등의 원인으로 접근한다. 특히 한국전쟁, 월남 파병, 사우디아라비아 건설노동자, 독일 파견 간호사, 대구지하철화재 등 1960년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 사회의 주요한 순간을 작품 속 두 사람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격동의 산업화 시기에 두 사람은 고된 시간을 보냈지만, 아름다운 미래를 꿈꿨다. 

“동생은 보육원으로 들어갔죠. 그땐 다들 먹구살기 힘들어서, 그 어린애 입 하나 감당하겠다는 집이 없었어요. …… 내가 열다섯, 동생이 열 살 그랬죠. 그러군 까맣게 잊고 지냈어요. 내가 얘기했었잖아요? 그때 식모살이. 새벽부터 오밤중까지 밥하랴, 반찬 하랴, 애 보랴, 불 때랴, 심부름하랴, 청소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달음질을 쳐야 하니까. 보고 싶고, 생각하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죠.”

- ‘먼 데서 오는 여자’ 가운데

“어디서 쿵 하는 소리가 났던 것 같애. 누가 소리치는 걸 들은 것도 같고. 한 10분 그러고 있었나. 나와 보니 언제 그랬냐 싶어. 하늘은 파랗고, 모래는 벌겋고……. 인원 점검하는데 박 조장 그 사람이 안보이더라. 다들 찾는데, 파이프 하나가, 지름이 사람 키보다 더 큰 파이프가, 바람에 밀렸던가, 원래 땅이 기울었던가, 비탈로 굴러 내렸더라고……. 크레인으로 들어 올리고 보니까 그 밑에 박 조장이 있데…….”

- ‘먼 데서 오는 여자’ 가운데

여자의 기억은 노년에서 시작해, 사우디로 일하러 나간 남편을 기다리던 젊은 새색시로, 불우한 형편과 불량한 동생을 버렸다는 아픈 기억 모두 잊기 위해 독일행을 꿈꾸는 1973년 처녀 시절로 점점 돌아간다. 그리고 기억의 종착지는 2003년 대구를 거쳐 어릴 적 한국전쟁 피난길이다. 

2003년 2월 18일, 중앙로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하나 뿐인 딸은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직접 언급은 없지만 192명이 숨지고 148명이 부상당한 대형사고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임을 알 수 있다.

딸 민영이의 이름을 울부짖는 여자는 전쟁통 피난 중이던 15세로 돌아간다. 잊으려고 해도 도저히 잊지 못할 ‘상처’를 입은 그때로 돌아가 “얼마나 울었는 줄 아나?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 줄, 엄마는 아나”라며 통곡하는 여자.

한국전쟁 이후 부모 없이 고독하고 어렵게 지낸 유년시절, 파견 건설노동자 남편과 떨어져 지낸 외로운 시간, 그리고 딸을 잃어버린 화재 참사까지. 자신을 짓누르는 무게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 여자의 기구한 삶이 단순히 아픈 개인사 이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한국 사회의 서글픈 성장 과정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남자의 독백에서 또 한 번 크게 울림으로 다가온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공간을 마련하려 했지만 “추모 시설은 혐오 시설”이라며 “그거 들어오면 경기도 죽어 버리고 집값, 땅값 떨어져서 먹고 살 수가 없게 된다”는 천박한 자본주의를 꼬집는다.

“그러니까 다 잊어야 합니다. 죽음 같은 건. 네. 산 사람은 살아야지요. 기억하겠다는 사람들, 입을 막아 버려야 합니다. 그건 사는 데, 살아남는 데 아무런 도움도 안 돼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애들한테, 이 사실을 똑똑히 알려 줘야 합니다. 아무도 믿지마, 살고 싶거든, 아무도 믿지 마. 사람을 믿지 마. 니 애비도 에미도 믿지 마! 니가 죽든 말든 아무도 신경 안 쓴다. 너도 신경 쓰지마! 약해 빠진 놈들이 죽는 거야. …… 살고 싶으면 이를 악물고 뛰어. 살아 있을 때까지는 뛰어. 살고 싶으면 뛰어, 도망쳐! 달아나!”

- ‘먼 데서 오는 여자’ 가운데

딸을 사고로 잃어버리고 그로 인해 남은 유일한 가족인 아내마저 기억으로서 잃어버리며 세상에 홀로 남은 남자. 처절한 그의 통곡은 어떻게든 살아남아 행복해지려 발버둥 쳐도 비극적인 역사 혹은 운명 앞에 무너진 자신과 가족, 나아가 야만의 시대를 지나오며 상실의 아픔을 겪은 모든 한국인들을 대신한 통곡이다. 

특히 '아이들이 살고 싶으면 아무도 믿지 말고 오직 이 악물고 뛰어야 한다'는 대목에서, 우리는 304명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장면을 전 국민이 실시간으로 목격한 2014년 4월 16일을 반사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먼 데서 오는 여자’는 극작가 배삼식의 2015년 작품이다. 배삼식 작가는 이 작품으로 차범석희곡상을 수상했다.

작품은 노년의 남녀, 기억상실, 과거로 돌아가는 구성 등에서 영화 ▲노트북 ▲박하사탕 등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관통하면서 투박하지 않게 접근하기에 깊은 여운을 남긴다. 

앞서 말했듯이 무대나 장치에 있어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비교적 긴 대사로 인해 전체적인 호흡도 길다. 대사 하나 하나에 집중하면서 시·공간을 오가는 흐름을 차분히 지켜보면, 한 가족의 이야기가 짧지만 고단했던 현대사로 확장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산업화 시기를 추억으로 간직한 세대, 그리고 소중한 존재를 먼저 떠나보낸 경험이 있다면 더욱 공감하고 몰입해서 관람할 수 있다.

연극은 원작에서 일부분이 수정돼 무대에 올려졌다. 딸 유골을 묻어서 수사를 받은 사연이나 여자의 20살 기억 등은 빠졌다. 공장 시다 일을 하던 여자의 독백은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자의 희생을 부각시킬 수 있는 부분이라 전체 맥락을 고려할 때 빠진 것이 다소 아쉽게 다가왔다. 여자가 훔친 돈을 들고 동생을 만나러 가는 장면에서 “…… 동생이 보여. 그 애 오른손에 감은 하얀 붕대가……. 그 손으로 담배를 피우면서”라는 부분은 공연 대사에서는 생략됐는데, 다친 손으로 담배를 피운다는 설정은 동생의 비정함을 키우고, 누나의 애달픔을 한층 키울 수 있다고 여겼다.

작품은 배우 연기가 두드러지는 구성에 시·공간 배경이 자주 달라지기 때문에 목소리, 표정, 몸짓 같은 인물 요소에 더욱 집중할 수밖에 없다. 사우디를 오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장면이나 극 마지막 장에 있어 보다 섬세한 연기 설정(목소리)이 더해진다면 어떨까 하는 사족을 더한다. 부인의 기억 이상을 알고 있는 남자 역은 기쁨과 슬픔 중간에 자리한 오묘한 감정이 중요해보였다.

‘먼 데서 오는 여자’는 올해로 연극 데뷔 40년인 제주 연극인 정민자, 강상훈이 출연한다. 극단에서 함께 활동하던 동갑내기 젊은 남녀가 사랑을 싹틔우고 결실을 맺고 희로애락 속에 세월을 살아온 지 올해로 60년. ‘늙은 부부 이야기’에서도 느꼈지만 서로 많은 시간과 감정을 공유한 실제 부부라는 특징과 어느새 작품 속 등장인물과 어색하지 않는 나이는 멋진 호흡으로 다가온다. 격한 감정 연기도 훌륭하게 해내면서 인물의 한(恨)을 이끌어 냈다.

작품은 6월 29일부터 7월 17일까지 오후 7시 30분마다 일요일과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공연한다. 관람료도 무료인 만큼 부부, 부모·자녀가 함께 방문해도 좋겠다. 

“대사를 외울 수 있을 때까지 연극 무대에 서고 싶다”는 두 연극인의 앞날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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