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숙의 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 (17) 길 위에서 모든 걸 비울 수 있어 좋다는 청년과의 만남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코로나 시국으로 서로 거리를 두고 온전한 마음을 나누기 어려운 지금, 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이 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길이 품고 있는 소중한 가치와 치유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를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 편집자

길에서는 늘 우연이 따른다. 책으로만 접한 세계적인 작가 파올로 코엘류를 짧은 순간이지만 직접 만난 것도, ‘나는 나의 길을 낼 테니, 너는 너의 길을 내라’는 말로 내 인생을 바꿔놓은 영국 여자 헤니를 만나 반나절 함께 걷다가 헤어진 것도 길 위에서였다. 

그 청년을 만난 것도, 헤어진 것도 길 위에서였다. 얼마 전 제주올레 후원회원분들께 보낸 2021년 상반기 뉴스레터에서도 언급한 이야기이지만, 블로그 글에서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 청년 박시준 또래의 청년들 이야기도 더 나누고 싶어졌다.

사진=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
사진=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

# 남원포구에서 만나서 위미 동백마을에서 헤어지다

6월 초 제주올레 5코스 시작점 남원포구 입구에 도착한 것은 오전 9시 반경. 제주올레 완주팀 프로그램에 참가한 여자 7명을 이곳 안내소에서 만나기로 한 터였다. 그들 7명은 이미 전날 만나서 4코스를 온종일 같이 걸었지만, 나는 그들과 초면인지라 서로 어색한 표정으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헌데 옆에서 한 청년이 반갑게 말을 건네 왔다. “올레 이사장님이시라면서요? 길 만들어주셔서 너무 고맙고, 반갑습니다.” 나도 약간은 어색한 상황에서 구해준 이 청년이 무척이나 고마웠던지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검정색 마스크로 얼굴의 절반을 가린 채 검정색 티셔츠에 반바지에 엄청 커다란 배낭을 멘 청년. 그러나 마스크도 그의 웃음을 가리진 못했고, 검정색 옷은 그의 밝은 에너지를 더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올레길에서 부쩍 청년들이 자주 보이기 시작하더니, 올 들어서는 나날이 더 많아지고 있는지라 청년과의 조우는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알바로 돈이 조금이라도 모이면, 방학이 찾아오면, 무조건 외국을 떠나는 쪽을 택했던 청년층들이 외국 여행길이 막히자 울며 겨자 먹기로 제주 여행을 택하는 경우가 많아진 듯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어디선가 정보를 듣고선 올레길을 찾는 청년들도 늘어난 것일 테고. 

사진=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
사진=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올레길에 얽힌 스토리를 모르는 듯했다. 그러니 누가 옆에서 나를 ‘올레길을 만드신 분’이라고 소개하면 ‘뭔 소리지?’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기 일쑤였다. 난 옆에서 소개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곤 했지만, 이미 어색한 상황은 벌어지고 난 뒤였다. 헌데 이 청년은 자기가 먼저 다가와서 인사를 청하고 고맙다고 하다니 신통방통했다. 그래서 물었다. “어떻게 올레길을 알고 왔나요?” 그의 대답을 듣고서는 그제서야 그의 태도가 이해가 되었다. “저, 산티아고 길도 다 걸었고, 안나푸르나 트레킹도 다녀왔어요. 이사장님 쓰신 책도 군대 도서관에서 우연히 읽게 돼서 제대하자마자 걸으러 온 거예요.” 

여자들, 그것도 대부분 중년 여성들인 우리 일행에 자연스레 그도 끼어들게 되었다. 문제는 속도였다. 그는 나흘 전에 제주에 도착했단다. 공항에서부터 배낭을 메고 출발해서 나흘만인 오늘 5코스 시작점에 왔다니, 나흘 만에 17, 18, 19, 20, 21, 1, 2, 3, 4코스까지 9개 코스를 걸은 셈이다. 하루에 두 코스 넘게 걸은 날도 있다는 이야기다. 

반면 우리 제주올레 완주팀 여성들은 어제 겨우 첫 발걸음을 뗀 초보자들이고, 어제 제법 긴 4코스를 하루 걷고 난 뒤에 과연 목표대로 일주일, 혹은 이주일, 한 달 완주할 수 있을까 다들 걱정스럽다고 하소연하고 있었다. 

난 이 이질적인 두 팀에 중재안을 내놓았다. 일단 남원 큰엉 산책로와 그 뒤 이어지는 바닷길은 되도록 천천히 걸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가 설문대할망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그러니 그 길까지 만이라도 같이 ‘놀멍 쉬멍 걸으멍’ 해보자, 그런 뒤에는 서로 자기의 속도대로 걷도록 헤어지면 된다고. 다들 좋다기에 우리는 동행을 시작했다. 

사진=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
사진=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
사진=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
사진=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

큰엉 산책로를 지나서 바당길로 접어들자 우리는 너른 너럭바위 위에 둘셋씩 띄엄띄엄 앉아서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지난 1차 올레 완주팀 걷기 때부터 시작했던 제주의 창조신 설문대할망 이야기를 다시 꺼내 들었다. 고조선 창조신화의 주인공이 단군 할아버지라면 제주 창조설화의 주인공은 설문대할망이다, 그 할머니는 한라산을 만들고 흙을 빚어서 제주의 오름 368개를 다 만들었다, 할망은 머리를 한라산에 베고 누우면 엉덩이는 7-1 코스 고근산에 걸치고 두 발은 7코스 법환포구 앞 범섬에 드나들 만큼 체격이 컸다, 그녀는 물 부족에 시달리는 제주 주민들을 위해 행주치마에 물을 담아서 여기저기 자연부락에 흘려주었으니 그 자리에서 용천수가 솟아나서 물 걱정이 없게 되었다, 그런 그녀는 어머니를 닮아 장군의 체격을 가진 오백 명의 아들을 낳았으나 그 아들들이 사냥에서 돌아와서 먹을 팥죽을 끓이다가 그 죽솥에 빠져서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다….

바닷가 파도소리가 철썩이는 가운데에서 설문대할망 이야기를 들려주니 효과만점인 듯했다. 다들 엄청난 과장과 현란한 비유가 뒤범벅된 설문대할망 스토리를 눈을 반짝이면서 경청했다. 특히 더 눈이 빛나던 그 청년은 다시 길을 걷는 동안에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알고 보니 그는 문화재청 산하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서 문화재관리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란다. 그는 조근조근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사진=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
사진=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

“사람들은 문화재 하면 유적이나 유물만 떠올리곤 하는데요. 자연유산도 우리가 지켜야 할 중요한 문화재예요. 게다가 최근의 추세는 좀 더 복합적이고, 범위도 넓어지고 있어요. 특정 문화재만을 지정한 점 단위에서 요즈음은 문화재 주변 환경까지 모두 포함한 면 단위로 지정 구역과 보호 구역이 넓어지고 있거든요. (1993년 유네스코가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도 이런 추세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수 있다. ) 또한 자연유산과 문화유산의 구분 없이 그 둘을 포괄하는 복합유산으로 지정하는 게 오늘날의 문화유산 보호 흐름이고, 이런 흐름에 딱 맞는 여행이 트레일 여행이거든요.”

아하, 그래서 이 친구가 산티아고 길,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떠났었구나. 갑자기 그 모든 게 다 일목요연하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 친구가 점, 선, 면 이야기를 꺼내다니 너무나도 신기했다. 난 그동안 특강을 다닐 때마다 그 이전에 정방폭포, 천지연처럼 특정 장소에서 또 다른 장소로, 점에서 점으로 이동하는 여행에서 그 사이를 이어주는 길을 냄으로써 선으로 잇는 여행을 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강조해 오지 않았던가. 게다가 1사 1올레 결연을 맺게 함으로써 길이 지나가는 지역에도 혜택이 돌아가게 만드는, 선에서 면으로 확장하는 일을 도모하고 있던 터였다. 헌데 길에서 만난 젊은 청년에게 문화재를 통한 점, 선, 길 이야기를 듣게 되다니.

2007년  고향  제주로  돌아와서  걷는  길을  내면서  제주  곳곳에  흩어져  있는  유무형 문화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길을 제대로 보호하고 유지하려면 문화재로 지정되는 것이 가장 유효하고 확실하다고 깨닫게 된 터였다. 서로 시작한 경로는 달랐지만, 같은 길에 서 있는 셈이었다. 

위미 동백마을까지 동행한 그는 중간 도장을 찍는 스탬프 박스 앞에서 다가와서 꾸벅 인사를 했다. 이제부터는 자기 속도대로, 오늘 예정한 7코스까지 가야 하겠기에 아쉽지만 이만 가야겠다면서. 나는 그의 완주 소감을 듣고 싶어서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다. 그도 내 전화번호를 받아갔다. 완주하면 소식을 드리겠노라면서. 휙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는 쉼 없이 빨리 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고, ‘놀멍 쉬멍 걸으멍’이 반드시 길을 걷는 유일하고도 가장 좋은 방식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서, 모든 걸 비울 수 있어서 좋다”

사진=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
사진=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

그날 저녁 두 코스를 완주한 그 청년과 한 코스를 완주한 우리 팀은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서 잠깐 마주쳤다. 서로 십년지기나 된 듯 펄쩍 뛰면서 반가워했음은 물론이다. 그 뒤 얼마나 지났을까. 그에게서 완주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18일 만의 완주였다. 그에게 축하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길에서 무엇을 느꼈는지를 물었다. 그는 이런 답장을 보내왔다. 

“걷는 여행을 통해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을 함께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저에게는 큰 배움이고 행복이었습니다. 그리고 발길을 빠르게 하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는 게 제게는 너무 좋았습니다. 누군가는 사색의 시간을 갖기 위해, 누군가는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길을 나서지만, 저에게 길이란 제 모든 것을 비울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제 몸이 피곤해질수록 걱정과 쓸데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걸 느꼈습니다.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걸을수록 편해졌습니다. ...중략... 우리나라에도 이런 트레킹 코스가 있다는 게 참 행운이고, 이 길을 만들고 가꾸어 나가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내가 나이 오십에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느낀 것이랑 이렇게 비슷할까. 인생 스물셋이나 나이 오십이나 힘들긴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그렇다. 우리는 길에서 비우는 법을, 내려놓는 법을 비로소 배운다. 그동안 너무 채워놓고 쟁여놓은 것을 털어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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