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75) 능소화가 내 등에 툭!하고 떨어졌네 / 임성구

담벽을 타고 넘는 능소화. ⓒ김연미
담벽을 타고 넘는 능소화. ⓒ김연미

속울음 흩뿌리는 한 남자 등허리에
한 방울 이슬 맺히네 한 무리 별 쏟아지네
어깨를 툭!치며 오는 위안 정거장 꽃향기

애절히 건네주는 소리없는 주홍노래
무표정의 쇠가 녹듯 뜨거운 눈물이 녹네
힘없이 떨어진 것이 참, 큰 힘을 가졌네

사내야 일어나라 사내야 일어나라며
따뜻한 등燈을 켜네 밤이 다 환해졌네

흙 묻은 엉덩이를 털면
내 갈 길이 보이겠네

-임성구, <능소화가 내 등에 툭!하고 떨어졌네> 전문-

강한 것들에게 눈이 갈 때가 있다. 한여름 강한 태양, 강한 소나기, 강한 매미소리, 오래된 골목을 돌아가면 쇠락해진 골목과는 아랑곳없이 담벽을 타고 넘는 능소화가 그 강한 빛깔과 향기를 뿜으며 이방인을 맞는다. 낯익은 풍경 속으로 웬 낯선 이가 끼어들었냐는 듯 경계심도 보인다. 주위를 압도하는 당당함에 슬몃 기가 죽다가도 어느새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어떤 힘이 솟아오름을 느낀다. 능소화의 그 당당한 기운이 내게도 전염이 되었는가. 

세상이 불공평한 것 같아도 그 속성을 알고 보면 결국 평행을 근본에 두고 있는 것. 다른 사람들은 저 만큼에서 빛나는데, 나만 이 만큼에서 허덕이는 것 같다.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의 삶의 허점을 내가 채우고, 내 삶의 허점을 그가 채운다. 들고 남이 결국 0에 수렴하는 것. 그렇게 세상은 또다시 굴러가게 되는 것이다. 

강한 것들에게 눈이 가는 것은 내가 약해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내 약한 부분을 채워줄 무언가를 찾기 위한 시선이 오늘은 능소화에 가 꽂혔다. 담벽을 타고 넘는 능소화 아래, 벽을 기대고 앉으면 내 허한 부분을 채우라는 듯, ‘툭!’ 떨어지는 꽃. 그 하강의 기운에 담긴 ‘큰 힘’을 주워든다. ‘일어나라’는 속삭임이 들린다. ‘따뜻한 등’불이 켜진다. ‘흙 묻은 엉덩이를 털면’ 이제껏 보이지 않았던 길 하나 어둠속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내 갈 길이’이 바로 그것이다.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오래된 것들은 골목이 되어갔다』, 산문집 <비오는 날의 오후>를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글만 쓰면서 먹고 살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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