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67) 리춘펑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우산혁명으로 알려진 홍콩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들 네 지역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들의 평화예술운동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네 나라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 국적에 따른 언어가 제각각 달라 영어 일어 중국어 번역 원고도 함께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1945년 9월 16일 해방식 날 밤 빅토리아 항구에서 열린 영국 전함의 20분간의 불꽃놀이. 출처=영국 제국전쟁박물관. ⓒ제주의소리
1945년 9월 16일 해방식 날 밤 빅토리아 항구에서 열린 영국 전함의 20분간의 불꽃놀이. 출처=영국 제국전쟁박물관. ⓒ제주의소리

앞서 말했듯이 홍콩의 사회적 모순은 역사화 시각에서 찾을 수 있다. 이번에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일어난 변화를 살펴보자.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패전과 항복을 선언하고 대동아공영권이 붕괴되면서 곳곳에서 정치세력의 재편이 이루어졌다. 중국은 전승국의 하나로 일본으로부터 대만과 만주를 되찾았고, 구미 열강의 지배하에 있던 조계지 일부도 이 시기에 정식으로 반환됐다. 그러나 한반도처럼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되었지만 소련과 미국이 개입해 수립한 두 독립된 정권이 전쟁을 거쳐 현재까지 분단 상태가 지속되는 것과 같이 우여곡절을 겪은 지역도 있다. 한편, 오키나와는 1972년 일본에 '반환'될 때까지 장기간 미국에 점령되어 지금도 많은 미군 기지가 존재한다(물론, 일본과 한국에도 미군 기지는 있지만 수가 다르다).

또 다른 특수한 방식은 홍콩이다. 1842년 난징조약에 따라 청국 정부에서 영국에 할양된 홍콩은 조차 방식인 이상 전후에는 중국에 반환되는 것이 순리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홍콩은 결국 영국으로 넘어갔다. 이는 사실 홍콩의 지정학적 특수성을 반영한 뭔가 심상치 않은 사례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태평양전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이 패전의 다양한 징후를 보였을 때, 미영중 3국 원수가 카이로에서 만나 일본에 대한 반격 계획과 전후 동아시아의 정치적 포치를 논의했다. 이 회담에서 영미 양국은 중국이 일본군을 견제하는 전략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과 전쟁 전 잃은 대만 만주 등지의 영토 회복을 요구하는 중국의 요구에 동의했다. 그러나 홍콩에 관한 한 영국의 윈스턴 처칠의 태도가 상당히 강경했다. 우선 홍콩은 영국의 자본이나 상품이 중국과 동아시아 시장으로 진출하는 통로로서 중요한 무역 거점이고, 한편으로는 극동에서 영국 정치력의 지속을 상징하는 것이며, 만약 홍콩을 잃으면 싱가포르나 말라야 등 다른 식민지도 도미노처럼 붕괴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그래서 처칠은 회담에서 "전쟁이라도 하지 않는 한 영국으로부터 아무것도 빼앗을 수 없다!"고 말했고, 이후 주중대사에게 "중국이 홍콩을 되찾으려면 내 시체를 넘어가야 한다!"고 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그의 태도 때문에 회담은 홍콩의 운명에 대한 합의로 이어지지 못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이 정식으로 발표되자 영국은 곧바로 남태평양 전역에서 전함 항공모함 순양함 등 77척의 대함대를 홍콩에 파견해 점령작전을 개시했다. 동시에 장제스는 그의 군단(6만 명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을 홍콩으로 급행하라고 명령했다. 27일 장제스는 주중 영국대사를 불러 불만을 토로하고 영국이 홍콩을 무단 접수한다면 중국이 반드시 저항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영국이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을 게 분명했다. 30일 영국 함대는 국군보다 먼저 빅토리아 항에 도착해 거리에서 포고를 배포했고, 다음날 임시 군사정부를 수립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미국이 완수한 중요한 역할이다. 카이로 회담 당시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중국이 전후 국제질서 안정에 큰 역할을 하고 전쟁 전의 일본에 필적하는 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은 상당히 중국에 호의적이었다. 한편 장쩌민은 영국이 홍콩을 반환하면 홍콩을 국제적 공동관리의 자유항으로 전환할 것을 약속했고 미국은 혜택을 받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때문에 홍콩 반환 안이 미영 간의 우의를 해치는 것인데도 루스벨트는 회담에서 이를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항복하기 몇 달 전에 루즈벨트가 병사하고 후임 해리 트루먼이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하며 영국의 홍콩 접수를 용인했으니 역사란 때로 우연의 산물이다. 장제스의 능력에 회의적이었던 트루먼은 특히 전후 유럽 부흥과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미영의 동맹관계를 더 중시한 것이었다.

그래서 트루먼은 일본이 항복한 뒤 영국군이 홍콩을 점령했을 때 이의 없다는 미국 입장을 장에게 표명했다. 장제스는 미국의 외교적 지지를 잃었고, 영국 함대는 이미 홍콩에 진출했으며, 중국은 전후 크게 혼란에 빠져 소련에 지원된 동북 지방의 중국 공산당이 장정권을 위협해 결국 영국의 홍콩 재점령을 보고만 있었다.

1945년 9월 16일 해방식 날 밤 빅토리아 항구에서 열린 영국 전함의 20분간의 불꽃놀이. 출처=영국 제국전쟁박물관. ⓒ제주의소리
1945년 9월 16일 평화기념비 앞에서 열린 홍콩 해방식. 출처=영국 제국전쟁박물관. ⓒ제주의소리

어쨌거나 영국의 홍콩 통치권 획득에는,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이면에는 중-영-미 삼국의 정치적 흥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주의할 것은 영국이 홍콩에 성공하더라도 전쟁 전과 상황이 다르다는 점이다. 우선 중국은 더 이상 연약하고 분열된 상태가 아니라 대두하는 민족주의 중국이 되어 있었다. 둘째, 전쟁 중 영국군이 대량의 방위시설을 건설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이 홍콩을 탈취하는 데 불과 17일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점, 더구나 전후 영국이 홍콩에 군사자원을 재투입하기 어려워 홍콩의 군사방위 취약성이 갈수록 영국 정부의 골칫거리가 되었다는 점이다.

반면 홍콩 섬과 주룽 반도는 영구 할양됐지만 총 면적의 75% 이상을 차지하는 신카이와 신구룡 지역은 사실상 조차지여서 1997년까지 중국에 반환돼야 했다. 이처럼 전후 홍콩의 운명은 여러 가지 불확실성으로 특징지어지면서 사회는 항상 불확실성과 불확정성의 임계 상태에 시달렸다. 동시에, 홍콩과 일반 자치체의 차이나, 다중적인 지정학적 제약이 홍콩의 향후의 발전을 좌우하는 독특한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호주 언론인 리처드 휴스가 전후 홍콩의 특수한 상황을 Borrowed Place-Borrowed Time(빌리는 곳, 빌려 쓰는 시간)(1968년)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현재의 홍콩은 전후 영국 식민지 시대와 같지는 않지만, 상술한 바와 같은 '임계 상태'는 존재하는가? 혹은 왜 지금도 존재하는가. 이것은 고찰할 만한 문제다.

# 리춘펑

리춘펑(李俊峰, LEE Chun-Fung)은 홍콩에 거주하는 예술가이자 큐레이터이다. 그의 작품들은 공간적, 역사적, 정치적 맥락에서 공동의 관계를 탐구한다. 그는 <Can We Live Together?>(2014) 등과 같은 큐레이터 프로젝트를 비롯해 <Cycling to the Square>(2010~), <Pitt Street Riot>(2014) 등의 프로젝트에서 참여적인 예술 활동을 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홍콩의 풀뿌리 동네인 야우마테이(Yau Ma Tei)에 기반을 둔 커뮤니티-예술 공간인 우퍼텐(Woofer Ten, 2009-2015)을 포함한 여러 예술 이니셔티브의 공동 창립자였다. 한편, 그는 동아시아 멀티미팅(Multiple Meeting, 2012-2013)과 <Art/Activist-in-Residence>(2011-2015)와 같은 프로젝트와 함께 지역 간 예술/활동가 교류에 힘쓰고 있다.


香港,與戰爭的距離 III:借來的時間
李俊峰

1945年9月16日「重光典禮」的晚上,英國軍艦於維港舉行長達20分鐘的煙花匯演。(圖片來源:帝國戰爭博物館)

上回提到,從「歷史化」的視角回溯香港的社會矛盾,這回我們嘗試從二戰後的一些變化談起。

1945年8月15日,日本宣佈戰敗投降,於是各地隨「大東亞共榮圈」的瓦解而進入政治力量的重組。作為戰勝國之一,中國在戰後從日本手上收回台灣和滿州,一些曾由西方列強管轄的「租界」也在這時期正式交還。部分地區的命運有點曲折,如朝鮮半島雖於戰後脫離日本統治,但在蘇聯和美國的介入下分別成立了兩個不同的政權,及後引發戰爭及持續至今的分裂狀態。沖繩則由美軍佔領一段頗長時間,直至1972年才被「移交」日本,可是當地至今仍設有大量美軍軍事基地(當然日本和南韓亦同樣設置美軍基地,只是數量不同)。

另一處理方式較特殊的是香港。這裡自1842年因《南京條約》而由清政府割讓予英國,若按「租界」的處理方式,香港理應在戰後歸還中國。不過,奇怪的是,最終香港卻是由英國繼續接管。這裡有其 "不太理所當然" 之處,同時也反映香港在地緣政治上的特殊性。

故事或從1943年11月的「開羅會議」說起。當時「太平洋戰爭」已經過了一段時間,種種跡像顯示日本正步向戰敗,於是,美、英、中三國元首相約在開羅會晤,討論反攻日本的計劃與戰後東亞政治佈局的安排。在會議上,英美雙方都對中國在牽制日軍上有其戰略意義,亦同樣贊同中國收復戰前失地(如台灣和滿州)的要求。不過當談到香港問題時,邱吉爾的態度卻相當強硬。一方面,香港作為英國的資本與貨物進入中國和東亞市場的通道,它是重要的貿易基地;在政治上,香港象徵英國在遠東政治力量的延續,若失掉香港則恐怕其他殖民地如新加坡、馬來亞等亦會如骨牌般倒下。因此,當時邱吉爾在會議上說:「不經過戰爭,休想從英國拿走任何東西!」,往後又對駐中國大使顧維鉤說:「中國若要收回香港,除非跨過我的屍體!」。他寸步不讓的態度使會議最終沒能就香港的命運達成共識。

到了1945年8月15日,當日本正式宣布投降後,英國立即發起「鐵甲行動」,從南太平洋戰區派遣由戰列艦、航空母艦、巡洋艦等多達77艘船艦組成的龐大艦隊前往接收香港。同時,蔣介石亦命令兩新編軍團盡速趕往香港。27日,蔣召見英國駐華大使表達不滿,指出假如英國擅自接收香港,中國必予抵抗。然而,英國顯然不會在這問題上作出退讓。30日,英國艦隊比國軍早一步抵達維多利亞港,並在港九街頭派發香港重光的號外,翌日組成臨時軍政府。

值得留意的是,美國在這事情上所扮演的關鍵角色。在開羅會議時,羅斯福(Franklin D. Roosevelt)對中國的態度較為友善,他認為中國在戰後的國際秩序將會發揮重大的穩定作用,其能力甚或能與戰前日本相比礙;另一方面,若英方交還香港,蔣承諾會將香港轉成國際共管的自由港,而美國將會在這變動中有所獲益。因此,即便交還香港的建議有損美英"情誼",但他在會議上亦提出此主張。然而,歷史有時具有一定偶然性,羅斯福在日本宣布投降前數月因病逝世,接任的杜魯門 (Harry S. Truman)較傾向由英國接管香港。相對而言,他對蔣介石的能力較為懷疑,同時亦更重視與美英兩國的同盟關係,特別是後者在戰後重建歐洲,及至往後聯手對抗蘇聯等重要角色。

因此當杜魯門知悉日本投降後英國派兵接管香港事宜,他對蔣表示美方的「不反對」立場。由於失去美國在外交上的支持,而英國艦隊亦已搶先進入香港,加上戰後中國百廢待興,而由蘇聯支持的中共在東北又對蔣政權造成重大威脅,種種無奈下,蔣最終只好「目送」香港繼續由英方接管。

1945年9月16日,在和平記念碑前舉行的香港重光典禮 

無論如何,英國就此取得香港的管治權,雖然表面上屬風平浪靜,但背後蘊藏中英美三國的政治角力。這裡值得注意的是,即便英國成功接管香港,但其面對的局面卻與戰前不甚相同。一方面,中國已非軟弱、分裂狀態,而是正在崛起的民族主義中國。其次,在戰爭期間,盡管英軍築建大量防禦設施,日軍亦只花短17天便成功奪取香港,加上英國在戰後難再在港投入更多軍事資源,因此,香港在軍事防禦上的脆弱性愈加成了英國政府的頭痛問題。

另一方面,雖然香港島和九龍半島屬永久割讓,但佔總面積75%以上的新界和新九龍地區其實只屬租借性質,理論上到1997年便必需交還中國。因此,對港英政府而言,戰後香港的命運具有多重的不確定性,社會不時困擾於朝不保夕、患得患失的「臨界狀態」,同時,這亦反映香港與一般自治政體之不同,多重的地緣政治制約成了日後左右其發展的獨特背景。

這就是何以後來澳洲籍記者Richard Hughes以「借來的地方,借來的時間」(1968)來形容戰後香港的特殊處境。當然,今天香港與戰後作為英國殖民地的情況並不能同日而語,但上文描述的「臨界狀態」又是否,或為何仍然存在?這是一個值得疑問的問題。


香港、戦争との距離 III : 借りものの時間
リー・チュンフォン

写真:1945年9月16日「解放式典」の夜、ビクトリア・ハーバーで行われた英国の戦艦による20分間の花火大会。 (出典:帝国戦争博物館、イギリス)

前回述べたように、香港の社会的矛盾は「歴史化の視点」から辿ることができる。今回は第二次世界大戦後に起こった変化を見てみよう。

1945年8月15日、日本は敗戦と降伏を宣言し、「大東亜共栄圏」崩壊に伴い、各地で政治勢力の再編が行われた。中国は戦勝国の一つとして、日本から台湾と満州を取り戻し、欧米列強の支配下にあった「租界」の一部もこの時期に正式に返還された。しかし、朝鮮半島のように日本の植民地支配から解放されたものの、ソ連とアメリカが介入して樹立した2つの独立した政権が戦争を経て現在まで分断状態が続くように、曲折の運命を辿った地域もある。一方、沖縄は1972年に日本に「返還」されるまで長期間アメリカに占領され、今でも多くの米軍基地が存在する(もちろん、日本と韓国にも米軍基地はあるが数が違う)。

もう一つの特殊な方式は香港だ。1842年の南京条約によって清国政府からイギリスに割譲された香港は、「租借」方式であるからには戦後は中国に返還されるのが筋だった。しかし、不思議なことに香港は結局イギリスに引き継がれた。これは実のところ、香港の地政学上の特殊性を反映した「何か普通でない例」に違いない。

ことは1943年11月のカイロ会談に始まったと言える。太平洋戦争からしばらくして日本に敗戦のさまざまな兆候が現れた時、米英中三国の元首がカイロで会談し、日本への反撃計画と戦後の東アジアの政治的布置を話し合った。この会談で英米両国は、中国が日本軍を牽制する戦略的役割を担っていたことや、戦前に失った台湾や満州などの領土回復を求める中国の要求に同意した。しかし香港に関しては、イギリスのウィンストン・チャーチルの態度がかなり強硬だった。まず、香港はイギリスの資本や商品が中国と東アジア市場に進出する通路として重要な貿易拠点であり、一方で政治的には極東におけるイギリスの政治力の継続を象徴するものであり、もし香港を失えばシンガポールやマラヤなど他の植民地もドミノ倒しのように崩壊することを懸念したのである。そのためチャーチルは会談において「戦争でもしない限りイギリスから何も奪うことはできない!」と述べ、その後、駐中大使に「中国が香港を取り戻したいなら私の屍を越えていかねばならない!」と言った。一歩も譲らぬ彼の態度のせいで、会談は香港の運命についての合意に至れなかった。

1945年8月15日、日本の降伏が正式に発表されると、イギリスはただちに、南太平洋全域から戦艦、空母、巡洋艦など77隻の大艦隊を香港に派遣して占領作戦を開始した。同時に、蒋介石は彼の軍団(6万人近いと言われた)を香港に急行するよう命じた。27日、蒋は駐中英国大使を呼び出して不満を吐露し、イギリスが香港を無断で接収するなら中国は必ず抵抗するだろうと指摘した。しかしイギリスが一歩も退かないのは明らかだった。30日、イギリス艦隊は国軍より先にビクトリア港に到着し、街頭で布告を配布し、翌日には臨時軍事政府を樹立した。

ここで注目すべきは、アメリカが果たした重要な役割である。カイロ会談当時、フランクリン・ローズベルトは、中国が戦後の国際秩序の安定に大きな役割を果たし、戦前の日本に匹敵する能力を発揮するだろうと考え、実はかなり中国に好意的だった。一方、蒋はイギリスが香港を返還すれば、香港を国際的共同管理の自由港に転換することを約束し、アメリカはその恩恵にあずかれると述べた。このため、香港返還案が米英間の「友諠」を損なうものであるにもかかわらず、ルーズベルトは会談でそれを主張したのである。だが、日本の降伏の数ヵ月前にローズベルトが病死し、後任のハリー・トルーマンが全く異なる立場を取ってイギリスの香港接収を容認したのだから、歴史とは時に偶然の産物だ。蒋の能力に懐疑的だったトルーマンは、特に戦後の欧州復興とソ連への対抗のため、米英の同盟関係の方を重視したのだった。

そのためトルーマンは、日本の降伏後にイギリス軍が香港を占領した時、「異議なし」というアメリカの立場を蒋に表明した。蒋はアメリカの外交的支持を失い、イギリス艦隊はすでに香港に進出していたうえに、中国は戦後大きく混乱してソ連に支援された東北地方の中国共産党が蒋政権に大きな脅威となっていたため、結局はイギリスの香港再占領をただ見ているだけとなった。

写真:1945年9月16日、平和記念碑の前で行われた香港解放式典。(出典:帝国戦争博物館、イギリス)

いずれにせよ、イギリスの香港統治権獲得の表向きは平穏に見えても、背後には中英米三国の政治的駆け引きが潜んでいた。注意したいのは、英国が香港に成功しても戦前とは状況が違うという点である。まず、中国はもはや軟弱で分裂した状態ではなく、台頭する民族主義中国となっていた。第二に、戦時中にイギリス軍が大量の防衛施設を建設したにもかかわらず、日本軍が香港を奪取するのにわずか17日しかかからなかったこと、さらに戦後はイギリスが香港に軍事資源を再投入することが難しく、香港の軍事防衛上の脆弱性がますます英国政府の頭痛の種となったことだ。

一方で、香港島と九龍半島は永久に割譲されたものの、総面積の75%以上を占める新界と新九龍地域は事実上租借地であり、1997年までに中国に返還され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このように、戦後の香港の運命は複数の不確実性によって特徴づけられ、社会は常に不確実性と不確定性の「臨界状態」に悩まされていた。同時にそれは、香港と一般自治体の違いや、多重な地政学的制約が香港の今後の発展を左右する独特な背景となっていることを反映している。

オーストラリアのジャーナリスト、リチャード・ヒューズが、戦後の香港の特殊な状況を「Borrowed Place-Borrowed Time(借りものの場所、借りものの時間)」(1968年)と表現したのはこのためだ。もちろん、現在の香港は戦後のイギリス植民地時代と同じではないが、上述したような「臨界状態」は存在するのか?あるいは、なぜ今も存在するのか。これは考察に値する問題だ


Hong Kong, The Distance to War III: Borrowed Time
LEE Chun-Fung

Firework show by British battleships in Victoria Harbour during the Liberation Ceremony on 16th September 1945. (Source: Imperial War Museum)

As mentioned last time, the social contradictions in Hong Kong could be traced from a 'historical perspective', and this time we will try to look at some specific changes after the Second World War.

On 15 August 1945, Japan announced its defeat and surrender, and the disintegration of the '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 led to a reconfiguration of political powers. As one of the victorious countries, China reclaimed Taiwan and Manchuria from Japan, and the international settlements/ concessions that had been under the control of the West were formally returned back to China as well. However, the fate of some areas was somewhat convoluted, such as the Korean peninsula was although liberated from Japanese colonial rule, two separate regimes were established under Soviet and US intervention, hence led to the Korean war afterward with a continued division till this day. Okinawa, on the other hand, was occupied by the US for a long period before being 'handover' to Japan in 1972, but there are still a large number of US military bases there (of course, there are several US bases in Japan and South Korea also).

Another special case is Hong Kong. It had been ceded to Britain by the Qing government as a result of 1842's Treaty of Nanjing, it should be returned to China after the war if we take it as a similar case with other international settlements in China. However, Hong Kong was eventually taken over by Britain. This should be, in fact, an ‘unusual case’ that reflects the geopolitical peculiarities of Hong Kong.

The story may begin with the Cairo Conference in November 1943. At that time, the Pacific War had last for some time and there were obvious signs that Japan was on the way to defeat. At the meeting, both the US and the UK agreed that China had played a strategic role in defending the Japanese army, and they agreed with China's demand to recover the lost territories such as Taiwan and Manchuria before the war. However, when it came to the Hong Kong issue, Winston Churchill's attitude was unyielding. First of all, Hong Kong was an important trading port as a gateway for British capital and goods to China and East Asia, and on the other hand, politically, Hong Kong symbolized the continuation of British political power in the Far East, and if Hong Kong was lost, it was worried that other colonies such as Singapore and Malaya would fall like dominoes. Therefore, at that time, Churchill said at the conference, "You can't take anything from Britain without a war!" Later on, he told the Chinese ambassador, "If China wants Hong Kong back, it will have to step over my dead body!" As a result, the conference didn’t reach any consensus on the fate of Hong Kong.

On 15th Aug 1945, after the formal announcement of Japan's surrender, the British launched their immediate operation in sending a huge fleet of 77 battleships and aircraft carriers from Southeast Asia to take over Hong Kong. At the same time, Chiang Kai Shek ordered his garrison to rush to Hong Kong (estimated to be nearly 60,000 men), but in the end, the British fleet arrived first. On the 27th, Chiang summoned the British ambassador to express his opposition and pointed out that if Britain try to take over Hong Kong, China would definitely resist. However, it is obvious that the British were not willing to back down, the situation was deadlocked.

It is worth noting the key role that the US played in this matter. At the Cairo Conference, Franklin Roosevelt was in fact quite friendly to China, believing that China would play a major stabilizing role in the post-war international order and its capabilities might even be comparable to those of pre-war Japan; on the other hand, if the British returned Hong Kong, Chiang promised to turn it into an internationally co-managed free port, and the US could benefit from it. Therefore, he advocated the return of Hong Kong at the conference, although Churchill is not happy with it. However, history is sometimes fortuitous in that Roosevelt died a few months before the Japanese surrender, and Harry Truman, his successor, took a very different position on this issue. In contrast, he was more skeptical of Chiang's abilities and attached greater importance to the alliance between the US and Britain, especially the latter’s important role in rebuilding Europe after the war and joining forces against the Soviet Union.

Therefore, Truman was more inclined to continue the British rule in Hong Kong and expressed his "no objection" when the British troops entered Hong Kong after the Japanese surrender. At that time, since the US had turned his support to Britain, and the British fleet had already entered Hong Kong; With China was in a state of great disarray after the war, and the Soviet-backed Chinese Communist Party in the Northeast posed a big threat to Chiang's regime, Chiang had no choice but to "allow" the British reoccupation of Hong Kong.

The Ceremony of the Liberation of Hong Kong, in front of the Peace Monument on 16th September 1945. (Source: Imperial War Museum)

In any case, although apparently peaceful, it was accompanied by political battles between China, Britain, and the US. What is noteworthy here is the new situation Britain had to deal with. For one thing, Britain was no longer facing a weak, divided China, but a rising nationalistic one. Secondly, as the Japanese took only 17 days to seize Hong Kong during the war, even though the British had built a lot of defense facilities, and it is difficult for Britain to invest more military resources in Hong Kong after the war. The vulnerability of Hong Kong's military defense became a big problem for the colonial government,

On the other hand, although Hong Kong Island and the Kowloon Peninsula were permanently ceded, the New Territories, which accounted for more than 75% of the total area, were only on lease and had to be returned to China by 1997. Therefore, for Britain, the issue of Hong Kong's sovereignty has been interfered by multiple uncertainties. This also reflects the fact that post-war Hong Kong is not totally autonomous, but in a "liminal state", connected with geopolitical constraints that play a unique, influential role.

This is why the Australian journalist Richard Hughes used the phrase "Borrowed Place-Borrowed Time" (1968) to describe the situation of post-war Hong Kong. In any way, of course, Hong Kong is not the same today as it was as the post-war British colony, but does the "liminal state" described above exist? or why does it still exist? This is a question worth thinking.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