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연구소 ‘나의 뿌리, 4.3의 진실-내 호적을 찾습니다’ 증언본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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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연구소는 4일 오후 2시 제주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스무 번째 증언본풀이 마당 ‘나의 뿌리, 4.3의 진실-내 호적을 찾습니다’를 개최했다. ⓒ제주의소리

오랜 염원이었던 4.3특별법 개정안이 통과된 역사적인 해를 맞은 제주4.3. 아직 가야할 길은 멀어도 큰 산을 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여전히 4.3생존자를 비롯한 희생자 유족들은 고통의 기억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광풍이 불어닥친 그 날의 억울함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던,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인 채 살아야만 했던 서러운 세월, 그들은 잃어버린 가족과 나의 뿌리에 대해 이제야 조금씩 그 사연을 풀어놓고 있다. 

사단법인 제주4.3연구소는 4일 오후 2시 제주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스무 번째 증언본풀이 마당 ‘나의 뿌리, 4.3의 진실-내 호적을 찾습니다’를 열었다. 

이번 증언본풀이 중심 주제인 ‘나의 뿌리’는 왜곡된 가족관계등록부의 진실 앞에서 가슴 아픈 사연들을 갖고 있는 유족들의 이야기로 구성됐다. 어린 나이 부모 형제를 잃고 그들과의 연결고리인 호적조차 뒤엉킨 채 일생을 살아가는 유족들의 한(恨)이다.

이날 증언본풀이 대담은 차례대로 제주4.3연구소 △오화선 자료실장 △김은희 연구실장 △허영선 소장이 맡았다. 

호적에 1944년생 강순자 씨는 원래 1943년생이다. 제주시 하귀리에서 강상룡(아버지)와 최산옥(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인 1948년 12월 토벌대는 공회당에 주민을 모아놓고 애월읍 신엄리 자운당에서 집단 총살했는데 그때 아버지 강상룡(당시 28세)도 희생됐다. 

당시엔 흔한 일이었지만 강순자 씨처럼 제때 출생신고도 못 한 채 살다가 뒤늦게 호적에 올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강순자 씨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할 수없이 외삼촌 호적에 조카로 이름을 올려 살아오길 수십 년, 아버지의 핏줄을 이어받아 삶을 열심히 살아왔지만, 그 어디서도 아버지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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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생 강순자 씨는 "나 죽기 전에 누구네 딸이라는 말 한 번만 들어보면 좋겠다"며 흐느껴 울기도 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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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을 증언하고 있는 강순자 씨와 대담을 맡은 제주4.3연구소 오화선 자료실장. ⓒ제주의소리

가장 먼저 증언에 나선 강순자 씨는 평생소원이라며 “나 죽기 전에 누구네 딸이라는 말 한 번만 들어보면 좋겠다”며 억척같이 살아온 삶 속에서 참아왔던 눈물을 끝내 터뜨렸다. 아버지의 이름 '강상룡'. 평생 "상룡이 똘(딸)" 바로 이 말이 사무치도록 그리웠던 것이다. 

강순자 씨는 “3대 독자인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넉넉하지 못한 시절 힘들게 살았다. 19살 때는 제주시로 넘어와 단칸방을 빌려 술 공장에도 다니고 부산으로 애기업개로도 살고 했다”며 “그러다 물질할 줄도 모르는데 육지까지 올라가 물질하고 왔다. 다행히 빚은 안 내고 돌아왔다”고 말하며 웃어보였다. 

그 시절만 생각하면 끔찍해 말하기조차 싫다는 강순자 씨는 다시 그 시절을 살라고 하면 그냥 죽어버리는 게 나을 것이라며 한숨을 내뱉기도 했다. 

아버지 얼굴이 기억나느냐는 물음에는 “기억 잘 안 난다. 어스름하게 얼굴을 꿈에서라도 볼까 싶어 아무리 떠올려봐도 꿈에서는 얼굴이 잘 안 보이더라”며 “그런데 아버지가 꿈에 나타난 날이면 몸이 그렇게 아팠다. 그때마다 심방이 집에 와 장구를 늘 두드렸다”고 회고했다.

이어 “열 살쯤 어머니는 재가했고 아버지가 3대 독자라 사촌도 오촌도 아무도 없어 나는 외삼촌 호적 아래 조카로 들어가 살게 됐다”며 “호적에 아버지 흔적이 없어 골머리가 너무 아프다”고 하소연했다.

그러면서 “사람 노릇도 제대로 못 하고 산 것 같다. 우리 아버지, 강상룡네 딸이라는 말 한 번만 들어봤으면 좋겠다. 죽기 전에 우리 아버지 딸로 한번 살아보는 게 평생 소원이다. 아버지는 총각으로 돌아가신 거나 다름 없다”고 말했다.

두 번째 증인 1949년생 김정희 씨는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에서 김순(아버지)과 이춘아(어머니)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순(당시 19세) 씨는 신엄지서에 끌려간 뒤 1948년 12월 18일 신엄리 ‘원병이’ 서쪽에서 총살당했다.

어머니는 고성리에 갔다가 군인이 쏜 총에 총상을 입어 치료를 받던 중 뱃속에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김정희 씨를 낳았다. 혼란스러운 시기 아버지는 사망신고가 됐고, 혼인신고와 출생신고는 하지 못했다. 

이후 김정희 씨 할아버지는 손녀의 초등학교 입학 시기가 다가오자 가짜 아들을 만들어 이춘아 씨(김정희 씨 어머니)와 혼인신고를 하도록 했고, 김정희 씨의 출생신고도 끝냈다.

세월이 흐른 뒤 김정희 씨는 진짜 아버지를 되찾고자 2019년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소송을 제기하는 등 힘든 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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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생 김정희 씨는 4.3으로 겪은 고된 삶을 이야기하며 아버지 ‘김순’이 어머니인 이춘아 씨의 남편이자 자신의 아버지로 인정됐으면 좋겠다고 간절한 심정을 내비쳤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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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을 증언하고 있는 김정희 씨와 대담을 맡은 제주4.3연구소 오화선 연구실장. ⓒ제주의소리

김정희 씨는 “어수선했던 그 시절 제주시에 있던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걱정된다며 고성리에 왔는데 그때 경찰한테 잡혀간 이후 신엄리에서 총살당했다”며 “그때 어머니와 혼인신고도 하지 못한 채 돌아가셨고 어머니 뱃속에 있던 나는 다음 해인 1949년 태어났다”고 말했다. 

이어 “어머니 혼인신고와 내 출생신고를 해야 했던 할아버지는 1958년 아버지의 가짜 동생 ‘김홍’을 만들어 혼인신고와 출생신고를 처리했다”며 “이어 김홍의 입대 영장이 나오자 할아버지는 1959년에 김홍에 대한 사망신고를 접수해 처리했다”고 설명했다. 

김정희 씨의 어머니는 4.3후유장애인이다. 동네가 시끄럽다는 말을 듣고 산쪽으로 도망가던 중 총에 맞고 쓰러졌고 동네 주민이 부축해 집에 데려간 덕분에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후 병원에 가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딸을 임신했다는 소식을 알게 된다. 

가슴을 관통한 총상은 지금까지도 어머니를 아프게 했다. 후유장애를 인정받기 위해 병원을 찾아 진단서를 떼는 과정에서 한 의사가 “이렇게 맞으면 죽는데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냐”며 진단서를 써주지 않았던 것.

숨죽여 울어야만 했던 그 날의 기억이 떠올라 김정희 씨와 그의 어머니는 울면서 병원을 나서야만 했다. 이후 병원 관계자의 도움으로 다른 의사를 통해 진단서를 발급, 후유장애를 인정받게 됐다. 

이어 아버지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어머니와 가짜 아버지 김홍 간 혼인무효 소송을 진행하게 됐고 끝내 무효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아직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실혼은 인정되지 않았다.

김정희 씨는 “서럽게 살아온 어머니도 이제 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으셨는데 젊을 때 겪었던 수모와 설움을 씻을 수 있게 아버지 ‘김순’이 이춘아 씨의 남편, 내 아버지로 인정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세 번째 증인으로 나온 1949년생 오연순 씨는 외가인 서귀포시 성산읍 신양리에서 오원보(아버지)와 김무옥(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오원보 씨(당시 22세)는 오연순 씨가 태어난 뒤 제대로 안아보지도 못하고 잡혀간 뒤 광주형무소에서 1950년 1월 옥사했다. 

오연순 씨는 다섯 살 때 어머니의 재가 이후 출생신고도 하지 못한 채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아버지 사촌의 딸로 호적에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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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생 오연순 씨는 외삼촌 집에 살며 힘들 때면 밭에 가 혼자 돌담 길을 걸으며 울기도 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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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을 증언하고 있는 오연순 씨와 대담을 맡은 제주4.3연구소 허영선 소장. ⓒ제주의소리

통탄의 세월이 흐른 뒤 오연순 씨는 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위해 유족회 활동에 나섰고, 형무소에 같이 있었거나 아버지를 기억하는 분들을 만났다. 

아버지를 찾기 위한 소송에도 나서 몇 차례 패소와 항소를 거듭, 2019년 7월 법원으로부터 아버지 ‘오원보’, 어머니 ‘김무옥’임을 확인받았다. 호적을 제대로 정정한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다.

오연순 씨는 “성산 수산에 살던 아버지는 동경대를 졸업하고 병원을 개원하려다 제주시 주정공장에 끌려간 뒤 광주교도소에서 옥사했다”며 “주변 사람들이 내 아버지는 똑똑하고 이쁘장하게 생겼었다고 말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아버지가 잡혀간 이후 어머니는 나를 임신하고 있을 때도 고문을 당했다. 할머니 두 분과 작은아버지는 성산 터진목으로 끌려갔다”며 “끌고 간 사람이 양심이 있었는지 작은아버지는 살릴 수 있게 기회를 줬고 할머니는 근처 쌓아둔 감태에 작은아버지를 숨겨 살렸다”고 말했다.

이 같은 고초를 겪은 오연순 씨는 다섯 살 때 어머니가 재가하면서 외할머니 손에 자라게 됐다. 하지만 열네 살 무렵 외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외삼촌 집에서 지내며 아이들을 돌보고 몇천 평의 밭에서 일하는 등 고된 삶을 살았다.

오연순 씨는 “애기를 품에 안고 농사 지으러 나가고 비료 포대를 짊어지고 집에 왔다. 나중에는 너무 힘들고 속상해 한낮에 밭에 가 혼자 돌담 길을 걸으며 울었다”고 당시를 떠올리며 잠시 흐느꼈다.

그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아버지 사촌의 딸로 호적에 이름을 올려 살아오다 최근 호적을 정리하기 위해 법적 절차를 밟았고 5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 극적으로 호적상 아버지와 어머니를 되찾게 됐다. 

오연순 씨는 “아버지 사촌이 내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은 서류와 DNA 검사를 통해 겨우 인정받았지만, 진짜 아버지는 DNA 검사나 증인이 없어 힘들었다”며 “마지막이라 생각한 재판에서 치매를 앓는 고모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다가 ‘오연순이 내 조카가 맞다’고 대답했고 끝끝내 나는 오원보 씨와 김무옥 씨의 딸이 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한편, 제주4.3연구소는 지난 2002년부터 매해 4.3을 경험한 사람들의 직접적인 기억을 풀어내는 4.3증언본풀이마당을 열고 있다. 본풀이마당은 자기를 치유하는 트라우마 치유의 과정이며, 4.3의 진실을 미체험 세대에게 알리는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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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청중들은 증언을 들으며 함께 울고 웃으며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부 청중은 증언자가 눈물을 보이자 힘차게 박수를 치며 응원하기도 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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