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83) 간이역 2 / 양점숙

넝쿨의 위로. ⓒ제주의소리
넝쿨의 위로. ⓒ제주의소리

제 마음
놓친 사람이
오고가는 길 끝에

침묵으로 
헤매던

밤새
헤매던 길 끝에

백 년도 그렁그렁 잠시, 

왔다가 그냥 갑니다

-양점숙, <간이역 2 > 전문-

가을은 뒷모습의 계절이다. 반짝이던 빛들이 스러지고 난 후, 뒤돌아선 모습들이 바스락거리며 스러지는 계절이다. 빛의 무게에 실렸던 존재의 이유들이 그 빛과 함께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가볍고 가벼운 허공이 되어 제 몸의 세포들을 풀어놓을 것이다. 존재의 유와 무가 경계를 허물고 뒤섞이는 혼돈. 그러나 가을을 지나 겨울, 혼돈의 극점은 또 다른 질서의 탄생을 예감해 놓고 있지 않던가.  

그럼에도 뒤돌아서는 것들은 쓸쓸하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아무 것도 되지 못한 시간들이 아쉽다. 왔다 간다는 작은 표식마저 남기지 못하고, 더군다나 자신의 가슴에조차 제 존재의 이유를 밝히지 못한 채 돌아서야 하는 마음들이 툭툭 떨어져 내리는 계절이다. 가을에 유독 쓸쓸한 바람이 많은 이유다. 

‘제 마음/ 놓친’ 낙엽이 ‘그렁그렁 잠시’머문 길가를 걷는다. ‘밤새’ 어디를 어떻게 ‘헤매던 길 끝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것만 같다. 상처 가득한 얼굴이 고단해 보인다. 이대로 ‘그냥 가’야 할까. 

화단에 심어져 있던 넝쿨들이 길가에 쌓인 낙엽 위로 손을 내밀고 있다. 다독다독,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듯 낙엽을 다독이는 넝쿨의 위로. 그 손길의 따스한 체온을 느끼려는 듯 낙엽들이 넝쿨 가까이 몰려 있다. 

가슴에 바람 가득할 때마다 서로의 체온을 그리워하는 건 우리들의 본능. 그리움 깊어질수록 우리의 손은 또 누군가의 따스한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가을은 서로의 체온이 필요한 계절. 바람 가득한 어깨 위에 당신의 따스한 손, 살포시 얹어주었으면 좋겠다.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오래된 것들은 골목이 되어갔다』, 산문집 <비오는 날의 오후>를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글만 쓰면서 먹고 살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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