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욱의 제주마을 이야기] 세 분화구와 능선이 아름다운 가시리 따라비오름

따라비오름을 가려고 해도 이정표가 설치되어있지 않아서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길을 물어 보려고 해도 거리에서 행인을 볼 수 없어서, 몸국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에 들러 길을 물은 후에야 겨우 오름 입구에 도달할 수 있었다.

 
▲ 따라비오름으로 들어가려면 철조망을 넘어야 했다.
ⓒ 장태욱
 

오름은 진입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았고, 입구 표시도 없어서 이리 저리 둘러본 후에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우마의 출입을 막기 위해 설치된 철조망을 넘어야 오름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도 난생 처음으로 철조망을 통과해야 했다.

 
▲ 소나무 오솔길을 지나야 했다.
ⓒ 장태욱
 

아이들이 오르기에는 오름 경사가 너무 가파랐고, 소나무 가지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게다가 비가 내린 뒤라 길은 미끄럽고, 등반에 적합한 신발을 준비하지 않아서 아이들은 계속해서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 길이 가파르고 미끄러워 넘어지기를 자주했다.
ⓒ 장태욱
 

문득 박노해의 시가 생각이 났다.

몸의 중심은 심장이 아니다.
몸이 아플 때 아픈 곳이 중심이 된다.
가족의 중심은 아빠가 아니다.
아픈 사람이 가족의 중심이 된다.

- 박노해의 <나 거기 서 있다> 중 일부

아이들이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동안 필자와 아내는 아이들을 잡아주고, 일으켜주기를 계속해야했다. 아픈 이가 있으면 그가 가족의 중심이 된다는 박 시인의 적절한 비유를 세삼 체험할 수 있었다.

 
▲ 네살 우진이가 오름을 오르는 것은 다소 무리였다. 중간에 들어주고 업어주기를 여러 차례했다.
ⓒ 장태욱
 

아픈 사람을 마음의 중심에 놓고 보살펴 줄 것으로 기대했던 대통령은 집을 팔아 주식을 사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주가는 끝을 모르게 상승하고 있다. 대규모 대량해고가 일상화되고, 수입개방으로 농민들의 생존이 벼랑 끝에 몰려도 정부는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서 주가를 올려놓고 말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대통령 중심제와 아픈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사회는 같이 갈 수 없는 모양이다.

아이들과 더불어 겨우 따라비오름 정상에 도착했다.

 
▲ 따라비오름 정상에는 세 개의 분화구가 있다.
ⓒ 장태욱
 

오름 허리에서와 달리 정상 부분에는 바람막이가 없어서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다른 오름들과 달리 따라비오름 정상에는 세 개의 분화구가 있다. 아마도 오래 전 같은 장소에서 시간 간격을 두고 세 차례의 용암분출이 있었을 것이다.

세계의 분화구가 제각각 능선을 가지고 있고, 그 능선들이 서로 만나면서 오름의 정상은 오묘한 곡선의 문양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정상에 오를 때의 고단함을 물리치고, 아이들은 그 능선의 문양을 따라 뛰어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 오름 정상에 바람이 심하게 불어도 우진이는 머리카락 휘날리며 즐겁게 놀았다.
ⓒ 장태욱
 

정상에 강하게 부는 바람을 따라 아이들이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풀잎들도 휘날렸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고 했던 김수영의 시구(詩句)가 떠올랐다. 정규직 전환은 고사하고 집단해고를 당한 노동자들도, 개방을 강요당한 농민들도 요 며칠 비바람에 풀이 눕고 울었을 것처럼 울고 있지 않았던가?

오름 정상에서 바라본 남녘은 푸른 들판이 넓게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보이는 바다가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목가를 불러야 할 저 푸른 초원에서 과거 이 마을 주민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유격대와 토벌대의 틈바구니 속에서 도망 다니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 정상에서 바라본 들판과 바다
ⓒ 장태욱
 

사선(死線)을 넘나들며 이 넓은 땅을 지켜온 가시리 주민들에게 신자유주의와 그 충실한 집행자인 참여정부는 한미FTA라는 옷을 입고 다시 견디기 힘든 폭력을 가해오고 있다.

보조국사 지눌은 "땅에 넘어진 자, 그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한다"는 추상같은 명문으로 위기에 처한 고려 불교를 재건했다. 김수영도 풀은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고 했다.

 
▲ 지난 4월에 열린 '한미FTA 반대 농민 가두시위'현장
ⓒ 장태욱
 

지금이야 말로 다시 땅을 짚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야 할 때다. 나의 조부모, 부모 농투성이들은 이보다도 더 척박한 환경도 견디어 냈다. 1894년 전봉준이 이끌던 동학군과 1901년 이재주를 앞세웠던 농민군이 그랬던 것처럼, 탐관오리의 횡포와 외세의 주권침해에 단호히 맞서는 농민들의 용기있는 외침이 저 들판에서 다시 들려올 날이 멀지 않았다.
 
 
따라비오름 가는 길 : 제주시에서 97번 국도(동부산업도로)로 가다가 대천동 사거리에서 성읍방면으로 4km 정도를 가면 남영목장이 나온다. 남영목장 입구로 들어서서 비포장도로를 따라 들어가다 왼쪽으로 꺽으면 목장본부가 나오는데, 본부를 지나 동쪽으로 들어가면 삼나무가 끝나는 곳에서 오른쪽의 억새밭 너머에 있음(산업도로에서 약 3.5Km)

그외에 가시리 마을에서 진입하는 길과 성읍리에서 진입하는 길이 있음.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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