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긴 생각] 여든 두 번째

시간이 지날수록 제주다움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제주출신의 공학자, 이문호 전북대학교 초빙교수가 '제주의소리' 독자들과 만난다. 제주다움과 고향에 대한 깊은 성찰까지 필자의 제언을 ‘짧은 글, 긴 생각’ 코너를 통해 만나본다. / 편집자 주

234년 전 바람의 땅, 대정에서 유언호가, 아들에게

5월 8일은 어버이날, 234년 전에 아버지 우의정 유언호가 바람의 땅 모슬포에서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의 6대손이 그 선대 할아버지 유언호가 3년 간 귀양와서 머물렀던 인성리 고부이씨댁을 찾았다.

2022년 2월 유언호(1730년 영조 6 ~ 1796년 정조 20)가 1789년부터 3년 간 안성리에서 위리 안치된 우의정 지낸 학자)의 6대 후손 유성준(63세 경기안성)이 대정 안성리에 임영일 교장을 찾아왔다. 유언호가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옛집인 안성리 12통 1호 고부이씨 이춘원을 찾았지만 그 이씨 후손은 234년 전 일이라 아직 알 길이 없어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5월 16일 마침내 대정호적중초 및 고부이씨 족보에서 이춘원의 7대손 이종훈(인성리 추사로) 형제를 찾았다. 그리고 유언호가 아들에 보낸 편지는 안대회 교수가 책에서 공개한 바 있다. 유언호(俞彦鎬)의초상화는 보물 제1504호이다.

유언호 초상 (兪彦鎬 肖像). 1787, 비단에 채색, 116.7×57㎝, 보물 제1504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사랑하는 아들에게

올해 내가 육십일 세이니 어느새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구나. 생각해보면 옛날 어릴 적에는 이 정도 나이가 든 사람을 보면 바싹 마르고 검버섯이 핀 늙은이로 알았건마는 세월이 흘러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하지만 그 속마음을 들여다보면 팔팔한 소년의 마음뿐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세상에 나온 이래로 서른 해 동안 세파에 부침(浮沈)하고 고락(苦樂)을 겪은 일들이 번개같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려서, 아련히 몽롱하게 꾸는 봄날의 꿈보다도 못하다. 남들 눈으로 보면 나이가 육십을 넘겼고 지위가 정승에 올랐으므로, 나이에도 벼슬에도 아쉬울 것이 없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내 스스로 겪어 온 일들을 점검해 보노라니, 엉성하고 거칠기가 이보다 심할 수가 없구나. 평생토록 궁색하고 비천하게 지내다 생을 마친 자들과 견주어보아, 낫고 못하며 좋고 나쁘고를 구분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지금처럼 제주섬에 갇힌 몸으로 곤경과 괴로운 처지를 당하지 않고서 일백 세까지 살면서 편안하고 영화로운 복록을 누린다고 쳐보자. 그렇다고 강물처럼 흘러가고 저녁볕처럼 가라앉는 시간이 또 얼마나 되겠느냐? 신숙주(申叔舟, 1417~ 1475, 국제적 안목과 실무적 능력을 겸비한 조선 전기의 명신) 어른이 임종을 앞두고 “인생이란 모름지기 이처럼 그치고 마는 것을…….”이라며 탄식했다고 전한다. 그 분의 말에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잘못을 후회하고 죽음을 앞두고서 선량해지는 마음이 엿보인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몸에 아무 일이 없고, 마음에 아무 걱정이 없이 하늘로부터 받은 수명을 온전하게 마치는 것은 그 이상 가는 것이 없는 복력(福力)이다. 다만 굶주림과 추위에 밀려서 과거를 치르고 벼슬에 오르기 위해 바쁘게 다니지 않을 수 없다. 형편상 그렇게 사는 것이므로 한 사람 한 사람 그 잘못을 꾸짖기도 어렵다.

그러나 이제 선친께서 남겨주신 논밭과 집이 있어서 죽거리를 장만하고 비바람을 막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분을 편안히 지키려 들지 않고 다른 것을 찾아서 바삐 돌아다니다가 명예를 실추하고 자신에게 재앙을 끼치는 처지에 이른다면, 이야말로 이로움과 해로움, 취할 것과 버릴 것을 전혀 분간할 줄 모르는 짓이다.

내가 지어야 할 농사를 내가 지어서 내 삶을 보살피고, 내가 가진 책을 내가 읽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추구하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 마음대로 하며 내 인생을 마치려 한다. 이것이 바로 옛 시에서 말한 ‘만약 70년을 산다면 백사십 세를 산 셈이라’는 격이니 어찌 넉넉하고 편안치 않으랴? 나도 그런 삶을 살지 못 하고서 네게 깊이 바라는 연유는 방공(龐公)이 자손에게 편안함을 물려주려 한 고심과 다르지 않다. 주1). 방공은 후한(後漢)의 은사이다. 관직이란 몸을 망칠 수 있는 위태로운 것이지만 초야에 묻혀 사는 것은 자손에게 편안함을 물려준다고 했다.

1788년, 바람의 대정땅 안성리에서 - 유언호(兪彦鎬),〈여아서(與兒書)> - 부족해도 넉넉하다. 성균관대교수 안대회 역. 김영사. 2009년 1판 2쇄.


다음은 위키백과에 나와 있는 유언호의 약력을 요약했다. 유언호는 1761년(영조 37)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다음 해 한림회권(翰林會圈)에 선발되었다. 이후 주로 사간원 및 홍문관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1771년에는 영조가 산림 세력을 당론의 온상이라 공격해 이를 배척하는 『엄제방유곤록(儼堤防裕昆錄)』을 만들자, 권진응(權震應)·김문순(金文淳) 등과 함께 상소해 경상도 남해현에 유배되었다.

다음 해에 홍봉한(洪鳳漢) 중심의 척신 정치의 제거가 청의(淸議)와 명분을 살리는 사림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정치적 동지들의 모임인 이른바 청명류(淸名流)사건에 연루되어, 붕당의 타파를 탕평으로 생각한 영조의 엄명으로 흑산도로 정배의 명령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왕세손이던 정조를 춘궁관(春宮官)으로서 열심히 보호했으므로 정조 등극 후에는 홍국영(洪國榮)·김종수(金鍾秀)와 함께 지극한 예우를 받았고, 『명의록(名義錄)』 편찬을 주관하였다. 이름이 『명의록』에 올라 있다.

그 뒤 이조참의·개성유수·규장각직제학·평안감사를 거쳐, 1787년(정조 11)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경종과 희빈 장씨(禧嬪張氏)를 옹호하고 영조를 비판한 남인 조덕린(趙德隣)이 복관되자, 이를 신임의리에 위배되는 것으로 공격하였다.

이에 정조의 탕평을 부정한다는 죄목으로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에 유배되었다가 3년 뒤에 풀려났다. 이후 향리에 칩거했다가, 1795년 잠시 좌의정으로 지낸 후 다음 해 사망하였다. 1802년(순조 2) 김종수와 함께 정조묘(正祖廟)에 배향되었다.

정조 즉위년에 왕과의 대담에서 김구주·홍봉한 양 척신의 당을 모두 제거하려는 정조의 뜻을 잘 보좌하였다. 또, 영조 때 탕평책 하에서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통청권(通淸權)을 혁파하고, 개정한 한림회권법을 회천법(會薦法)으로 되돌리려는 논의에서도 소시법(召試法)의 중요성을 인정해, 정조의 청의와 의리를 우선해 조제하는 탕평책을 옹호하였다.

김우진(金宇鎭)·심환지(沈煥之)·김종수와 친하게 지내고, 홍봉한의 당을 공격함이 의리라는 김구주 당의 견해에 동조했다. 이에 순조대에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된 이후에는 시파(時派)로부터 정조에 대한 배신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안성시 대덕면 건지리에 위치한 유언호 묘(안성시향토유적 제21호). 6대손 유성준 씨 제공.
 안성시 대덕면 건지리에 위치한 유언호 묘(안성시향토유적 제21호). 6대손 유성준 씨 제공.

어려서부터 문학으로 이름이 나 있었으며, 외유내강의 인물로서 평가된다. 저서로는 연석(硏石), 귀결록(歸潔錄), 즉지헌집(則止軒輯)이 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고 충문공의 호(號)는 ‘즉지헌’, ‘則止軒’의 ‘則’ 字가 <법칙, 곧즉>으로 발음된다. <연석>에 공의 자서에서 호를 정한 이유를 기술하고 있는데, 대장괘의 ‘대장즉지’에서 인용한 것으로 설명을 하셨으므로 ‘곧 즉’으로 한글표기를 함이 옳다는 6대손 유성준 씨의 증언이다. 유언호의 묘는 경기 안성에 정갈하게 묻혀있다. 그의 6대손이 제주유배지에서 3년 간 머물렀던 집 주인을 찾는 일은 처음이라고 임영일 교장은 말한다.

유언호의 6대 후손 유성준(63세 경기안성) 씨.
유언호의 6대 후손 유성준(63세 경기안성) 씨.

상단 그림은 정조 때 초상화로 이름난 이명기가 그린 유언호의 상이다. 관복을 입고 오른쪽으로 몸을 약간 튼 자세로 서 있는 모습이다. 이명기의 다른 초상화들과 마찬가지로 얼굴의 입체감과 옷주름의 음영이 뚜렷이 드러나 있으며, 왼팔 소매 끝을 쥔 오른손이 살짝 보이도록 그렸다. 상단에는 정조의 화평이 쓰여 있다. 유언호의 6대 후손 유성준(63세 경기안성)씨와 통화하면서 대정 안성리 고부이씨 이춘원씨 후손을 꼭 찾아 뵙고 할아버지에게 베풀어 준 은혜를 갚고 싶다고 신신당부하면서 유언호의 초상화 등 일체를 보내왔다.

제주 대정 호적중초 내용. 제공=유성준 씨.
제주 대정 호적중초 내용. 제공=유성준 씨.

# 이문호

이문호 교수는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 출신 전기통신 기술사(1980)로 일본 동경대 전자과(1990), 전남대 전기과(1984)에서 공학박사를 각각 받고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서 포스트닥(1985) 과정을 밟았다. 이후 캐나다 Concordia대학, 호주 울릉공- RMIT대학, 독일 뮌헨,하노버-아흔대학 등에서 연구교수를 지냈다. 1970년대는 제주 남양 MBC 송신소장을 역임했고 1980년부터 전북대 전자공학부 교수,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며 세계최초 Jacket 행렬을 발견했다. 2007년 이달의 과학자상, 과학기술훈장 도약장, 해동 정보통신 학술대상, 한국통신학회, 대한전자공학회 논문상, 2013년 제주-전북도 문화상(학술)을 수상했고 2015년 국가연구개발 100선선정, 2018년 한국공학교육학회 논문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제주문화의 원형(原型)과 정낭(錠木) 관련 이동통신 DNA코드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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