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100) 김준기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우산혁명으로 알려진 홍콩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들 네 지역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들의 평화예술운동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네 나라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 국적에 따른 언어가 제각각 달라 영어 일어 중국어 번역 원고도 함께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정선 정암사 말사인 적조암이 해월 최시형 활동지.<br><br>사진=김준기.
정암사 말사인 강원도 정선의 적조암은 해월 최시형의 활동지. 해월과 제자들은 이곳에서 49일 수련으로 동학 재건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 사진=김준기.

수천년을 지배해온 계급사회의 신분제도는 도도히 흐르는 인류사의 어느 대목에서 일순간 무너졌다. 천지가 개벽하듯 인문이 개벽하는 순간이다. 하늘과 땅이 열리는 천지개벽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뜻이 하늘에 닿는 인문개벽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전자의 선천개벽이 후자의 후천개벽으로 전환하는 시점에 수운 최제우가 있고 해월 최시형이 있다 자신의 노비를 해방시켜 한명은 며느리를 삼고 한 명은 수양딸로 삼으며 평등사상을 펼치던 최제우는 엄혹한 조선의 계급사회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죄목으로 대구 감영에 갇혔다. 죽음을 예감한 그는 자신의 후계자 해월 최시형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했다. 

“오순수천명(吾順受天命) 여고비원주(汝高飛遠走)”
(나는 천명을 순순히 받을 것이니, 너는 높이 날아 멀리 뛰어라.)

1864년에 수운 최제우가 죽음을 맞이한 후 동학의 교도들은 억울하게 죽은 교조의 명예를 회복하고 자신들의 종교활동을 합법화 해달라며 교조신원운동을 펼쳤다. 현재의 포항시인 영해 관아를 습격한 이 사건은 이필제의 난(李弼濟─亂, 1871년)으로 기록되었다. 영해교조신원운동 또는 영해동학혁명으로 불리는 이 운동이 실패한 후 영남의 동학 세력은 위기에 봉착했다. 조선 정부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해월은 북쪽으로 피신했다. 고비원주(高飛遠走)라는 수운의 말대로 해월은 멀리 멀리 달아났다. 

해월이 당도한 곳은 백두대간의 허리 태백산 자락이었다. 그곳의 산줄기와 물줄기를 따라 흐르는 강원도 남부 곳곳에는 해월의 길이 있다. 최보따리라는 별명이 말해주듯이 평생 보따리 하나 둘러메고 험산준령을 넘나들며 생명평화의 길을 걸어간 해월의 길이다. 해월은 한반도 남동부에서 백두대간을 북쪽으로 올랐다. 관군에 쫓기는 몸으로 단양을 거쳐 영월 직동리에 머문 해월은 이곳에서 동학 재건의 발판을 마련했다. 직동리 박용걸(朴龍傑)의 집에 머물던 시절 해월은 사인여천(事人如天)과 대인접물(待人接物)이라는 중요한 교리를 설파했다. 사람 대하기를 하늘 대하듯 하고, 사물 대하기를 사람 대하듯 하라는 가르침이다. 

정선 함백산에는 정암사라는 고찰이 있다. 몇 해 전에 국보로 지정된 정암사 수마노탑으로부터 2km 떨어진 곳에 자장율사가 열반지(涅槃地)로 알려진 적조암이 있다. 함백산 자락의 아늑한 분지에 자리 잡은 적조암은 해월 일행을 받아주었다. 해월과 제자들은 이곳에서 49일 수련으로 동학 재건의 기틀을 마련했다. 해월을 품어준 적조암 자리는 자연의 신비가 담겨있다. 함백산 기운이 웅장하면서도 부드럽게 펼쳐지는 산자락의 아늑함이 자연의 영성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정암사 적조암에 머물며 조직을 재정비한 해월은 정선을 거점으로 영월, 평창, 횡성, 원주, 홍천 등 강원도 남쪽으로 교세를 확장해갔다. 

해월의 마지막 은거지인 강원도 원주 호저면의 동학교도 원진녀 생가. / 사진=김준기.
해월의 마지막 은거지인 강원도 원주 호저면의 동학교도 원진녀 생가. / 사진=김준기.

경기도 이천시에는 앵산이라고 불리는 작은 언덕이 있다. 1897년, 71세에 이른 해월은 이곳 앵산동에서 향아설위(向我設位)를 설파했다. 그것은 4대 조상 또는 20대, 30대 조상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유교식 제사법인 향벽설위(向壁設位)의 논리를 뒤집는 것이었다. 조상의 혈기(血氣)와 심령(心靈)이 자신에게 이어졌으니 제사를 지내는 대상을 몇몇 조상으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조상을 낳은 하늘님(天主)에게 제사를 지내라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사인여천(事人如天)에서 말하듯이 자신이 곧 하늘이므로 ‘자신을 향하여 제사를 지내라’는 향아설위(向我設位)로 이어진다. 새로운 제사 형식으로 인간과 하늘의 관계를 재정립한 혁명적 발상에 대해 해월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부모는 첫 조상으로부터 몇만 대에 이르도록 혈기(血氣)를 계승하여 나에게 이른 것이요, 또 부모의 심령(心靈)은 한울님으로부터 몇만 대를 이어 나에게 이른 것이니 부모가 죽은 뒤에도 혈기는 나에게 남아있는 것이요, 심령과 정신도 나에게 남아있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제사를 받들고 위를 베푸는 것은 그 자손을 위하는 것이 본위이니, 평상시에 식사를 하듯이 위를 베푼 뒤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심고(心告)하고, 부모가 살아계실 때의 교훈(敎訓)과 남기신 사업(事業)의 뜻을 생각하면서 맹세하는 것이 옳으니라.”

치악산 자락의 수레너미(水禮村) 아래 강림마을에도 해월의 은거지가 있다. 해월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패배 후 이곳에 은거하면서 자신이 체포될 때를 대비했다. 그는 제자 3인을 세워 집단지도체제를 꾸렸다. 이중의 1인이 훗날 3.1독립운동을 주도한 의암 손병희이다. 대선생 수운 최제우의 대를 이어 동학의 교리를 정립하고 체제를 정비했으며, 갑오농민전쟁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해월의 고행은 1898년에 끝이 났다. 그는 1898년 4월 5일 원주의 호저면 고산리 송골에서 체포되었다. 교도 원진녀의 집에서 은거하던 최시형은 이곳 피체지를 끝으로 고단한 삶을 마감했고, 그의 육신은 경기도 여주 원적산 자락에 묻혀있다. 

여주 원적산 자락의 해월 최시형 묘소.<br><br>​​​​​​​사진=김준기.
경기도 여주 원적산 자락의 해월 최시형 묘소. / 사진=김준기.

백 몇 십 년 전의 일들이다. 수천 년을 이어온 조선의 운명이 국체 상실이라는 절망의 시간으로 빠져들던 시간의 일들이다. 백성들은 나라를 구하고자 했고, 그 나라의 지배자들은 그 백성들을 물리치며 그 나라를 지키고자 했지만, 서학을 앞세우며 밀고 들어온 외세의 바람은 그 서학을 조선보다 몇 십 년 앞서 받아들인 일본의 바람으로 돌변하여 일제강점기의 비극을 낳았다. 조선의 평화와 조선인의 생명은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스승인 수운 최제우의 가르침을 보따리에 담고 풍찬노숙하며 백두대간 산자락을 떠돌았던 해월의 위대한 길을 다시 생각한다. 


# 김준기

홍익대학교 예술학 학사, 석사, 미술학 박사. 한국큐레이터협회 회장, 미술평론가.

전(前) 부산비엔날레 전시기획팀장,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제주도립미술관 관장,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일본어, 중국어, 영어 원고는 추후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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