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탐라미술인협회 여순항쟁 74주년 기획전 ‘여순1019’

제주4.3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역사가 있다. ‘4.3 진압’을 지시받은 여수 주둔군(14연대)이 명령을 거부한 1948년 10월 19일, 바로 ‘여순사건’이다. 명목상 군인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이승만 정부는 미군 포함 병력을 대거 투입한다. 이 과정에서 여수, 순천지역 민간인들이 정부군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한다. 진압을 마친 군인들은 제주로 옮겨와 초토화 작전을 벌이며 또 다시 학살에 나선다. 

동포를 살해하라는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고 맞섰기에 여순항쟁이기도 한 여순사건은 4.3과 마찬가지로 한동안 말 하지 못했던 역사였다. 공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가족을 잃었어도 그저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세월들. 그리고 2021년 6월 29일이 돼서야 여순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를 지원하는 특별법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여수 밤바다, 순천만 정도로 두 지역을 알고 있다면 10월 14일부터 11월 30일까지 제주4.3평화기념관에서 열리는 전시는 인식의 폭을 넓혀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제주 탐라미술인협회(탐미협)가 여수 민족미술인협회(여수 민미협)와 손잡고 마련한 기획전 <여순1019>다. 

제주4.3평화기념관에서 전시 중인 기획전 '여순1019-1948 여순에 핀 동백' 입구 전경.<br><br>ⓒ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제주4.3평화기념관에서 전시 중인 기획전 '여순1019-1948 여순에 핀 동백' 입구 전경.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1.

<여순1019>는 두 개의 전시로 구성돼 있다. 

기획전시실 2관은 여수 미술작가 9명의 작품과 함께 여순사건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1948 여순에 핀 동백’이다. 기획전시실 1관과 로비는 탐미협 작가 25명의 작품을 소개한 ‘불이행’이다.

‘1948 여순에 핀 동백’은 공식 기록에 근거한 사실에 사진, 영상, 신문-잡지 보도 등을 더하며 여순사건 자체를 알리는 데 상당한 비중을 둔다.

전시장 한쪽 벽면은 년도, 일시와 요약한 사실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해 놨다. 먼저 1945년 8월 20일 여수건국준비위원회 결성을 시작으로 1948년 10월 18일 제주해안 봉쇄까지는 제주 포함 전국 상황을 굵직한 내용 위주로 나열한다. 그리고 제주 출동 명령을 거부한 14연대(봉기군)가 등장하고 정부 토벌군과 교전하며 결국 산으로 피신한 9일(10월 19일~27일) 동안 벌어진 일들은 시간대 별로 명시한다. 

여순사건 진행 상황을 기록 요약해 놨다. <br><br>​​​​​​​ⓒ제주의소리
여순사건 진행 상황을 기록 요약해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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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진행 상황을 기록 요약해 놨다. <br><br>​​​​​​​ⓒ제주의소리
여순사건 진행 상황을 기록 요약해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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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백선엽 등의 인물도 여순사건 진압에 참여했다.<br><br>​​​​​​​ⓒ제주의소리
박정희, 백선엽 등의 인물도 여순사건 진압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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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0월 21일 순천 서면 학구 지역에서 토벌군과 봉기군은 첫 교전을 벌인다. 23일 부산 제5연대는 여수 상륙에 실패하고, 다음 날 벌어진 2차 여수 공격(잉구부 전투)에서 토벌군은 봉기군에게 패배·후퇴한다. 이 과정에서 미국 AP통신 종군기자 크린튼이 사망한다. 27일 이승만 정부는 미군과 함께 육해공 합동 작전을 벌이며 강력한 군사 행동에 나선다. 결국 봉기군은 지리산과 백운산으로 들어가고 27일 오후 2시 토벌군은 여순 시내를 완전히 진압하며 국군 14연대는 해산된다.

전시는 실제 사건을 순서대로 나열하되, 여순사건이 단순한 군 반란이 아님을 짚는다. 예컨대 1948년 10월 26일 정일권 육군참모장의 국방구 출입기자 브리핑을 소개한다. 정일권 참모장은 당시 “여수반란 총 지휘자는 여수여중 교장 송욱임”이라고 발표한다. 송욱 교장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이다. 전시에서는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을) 군 반란에서 민중·학생반란으로 여론을 전환하려 시도했다. 결국 무고한 민간인과 학생들이 대거 학살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한다.

탐미협이 2019년과 올해 진행한 여순항쟁 탐방 영상은 텍스트로 읽어간 역사를 실제 장소와 상세한 설명으로 보강한다. 영상 속에서 안내자로 등장하는 주철희 위원(정부 여순사건위원회)은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인간에 어떠한 행위로 벌어지는 것을 역사라 한다. 역사를 들여다 볼 때는 이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해석을 엉뚱하게 한다”며 여수사건에 대한 올바른 접근을 강조했다.

▲75개의 작은 판넬로 1946년부터 2022년까지의 긴 세월의 인고와 바람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선영 작가 ▲1부터 0까지, 0부터 1까지 숫자의 반복과 반야심경을 뒤집어 거꾸로 나열하는 흐름 속에 피안으로의 진정한 안식은 언제 이뤄질지 질문하는 김재영 작가 ▲아이들이 꿈을 키웠던 공간에서 학살터로 변한 여수서국민학교를 보여준 곽인화 작가. 

선영&nbsp; 기억.인정, 기록.해원&nbsp; 판넬에 아크릴&nbsp; 90.1x110.7cm, 2점&nbsp; &nbsp;2022&nbsp;<br><br>​​​​​​​ⓒ제주의소리
선영  기억.인정, 기록.해원  판넬에 아크릴  90.1x110.7cm, 2점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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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영&nbsp; 피안의 세계로 2&nbsp; oil on canvas&nbsp; 20p&nbsp; 2022<br><br>​​​​​​​ⓒ제주의소리
김재영  피안의 세계로 2  oil on canvas  20p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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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색이 완연한 10월의 어느 숲길을 향하는 군인들의 ‘돌아올 수 없는 길’을 살핀 김금옥 작가 ▲검은 연기와 붉은 색으로 덮인 하늘을 서글픈 듯 바라보는 여인과 아기를 그린 정민경 작가 ▲건물 사이로 불길이 피어오르고 통곡하는 여인들이 교차하는 75년 전 여수 시내를 재현한 정채열 작가 ▲내 안의, 네 안의, 우리 안의, 사회 안의 한을 형상화한 장창익 작가 등 여수 작가들의 작품도 ‘1948 여순에 핀 동백’에서 만날 수 있다.

장창익&nbsp; 지킴이-中陰身(중음신)&nbsp; 화선지에 수묵채색&nbsp; 166x130.5cm, 2점&nbsp; 2022<br><br>ⓒ제주의소리
장창익  지킴이-中陰身(중음신)  화선지에 수묵채색  166x130.5cm, 2점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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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옥&nbsp; 돌아올 수 없는 길 1&nbsp; 캔버스에 유채&nbsp; 97x130cm&nbsp; 2022<br><br>ⓒ제주의소리
김금옥  돌아올 수 없는 길 1  캔버스에 유채  97x130cm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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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금만 작가의 ‘애국자’는 130×160cm 화폭에 한 장면을 정교하게 묘사했다. 긴 칼을 들어 학생의 목에 올려놓은 한 군인. 다른 학생 7명은 그 뒤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 이 그림은 여순사건 당시 서모대위가 악양 고등공민학교 학생 7명의 목을 베고, 그 머리를 학생 한 명이 모두 들고 마을까지 내려가게 한 엽기적인 사건을 다뤘다. 작가는 이 사건 뿐만 아니라 여순사건의 중요 순간들을 연작으로 다뤘다. “나는 이 치 떨리는 학살을 그림으로 증거한다”는 ‘애국자’ 작품 설명은 역사를 대하는 작가의 자세를 잘 보여준다.

임영욱 작가의 ‘Dark history # 여순과 제주4.3’은 섬유강화 플라스틱을 활용한 조형 작품이다. 맷돌 모양의 둥근 돌 사이로 남녀 신체가 등을 맞대고 있다. 그런데 두 신체 모두 상당히 훼손돼 있다. 목과 팔다리는 잘리고 뜯겼다. 돌과 신체는 초록색으로 마치 피 흘리듯 칠해져 있는데, 자세히 보면 흐르는 색이 특정 모양을 형상화하고 있다. 남자 쪽에는 제주섬, 여자 쪽은 여수와 순천지역을 합한 지형이다. 상징으로 표현한 두 사건의 아픔은 여운을 남긴다.

박금만&nbsp; 애국자&nbsp; 캔버스에 아크릴&nbsp; 130x162cm&nbsp; 2022<br><br>ⓒ제주의소리
박금만  애국자  캔버스에 아크릴  130x162cm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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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욱&nbsp; Dark history # 여순과 제주4.3&nbsp; FRP+coloring&nbsp; 55x40x75cm 2022<br><br>​​​​​​​ⓒ제주의소리<br>
임영욱  Dark history # 여순과 제주4.3  FRP+coloring  55x40x75cm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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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여순에 핀 동백’에서 작품만큼이나 인상적인 부분은 1948년 11월 15일자 ‘LIFE’ 잡지를 확대 인쇄한 전시다. 당시 발행본에는 종군기자 칼 마이더스 등이 여순사건을 취재한 기사 ‘REVOLT IN KOREA(한국에서의 반란)’가 실려 있다. 이 기사는 여순사건을 소개할 때 자주 등장하는 자료다. 기사에 쓰인 사진들은 이번 기획전을 포함해 여러 예술 창작에서도 인용되곤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지점은 기사 내용을 가운데 두고, 양쪽 끝에는 해당 발행본에 실제 수록된 표지와 광고를 같은 크기로 붙였다. 한쪽은 100년 전쟁의 프랑스 영웅으로 평가받는 잔 다르크, 다른 한쪽은 푸른 눈의 젊은 남녀가 밝게 웃음 짓는 은 식기 광고. 처참한 학살 현장을 목격한 기사와 표지·광고의 대비는 직관적인 인식과 역사적 해석 모두에 있어 주목을 끈다. ‘REVOLT IN KOREA’ 구성은 이번 기획전 전체 기획을 담당한 양동규 작가의 아이디어다. 

여순사건을 보도한&nbsp;1948년 11월 15일자 ‘LIFE’ 잡지 표지와 보도 내용.<br><br>ⓒ제주의소리
여순사건을 보도한 1948년 11월 15일자 ‘LIFE’ 잡지 표지와 보도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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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민미협에서 추린 작가들이 신작을 들고 참여한 ‘1948 여순에 핀 동백’은 타임라인 전시와 출품작 모두 여순사건의 사실과 장면을 그대로 전달하는 목적에 초점이 맞춰진 인상이다. 여순사건에 대한 재평가와 진상규명은 이제 본격적인 과정을 밟은 셈이니, 앞으로 진전할수록 해당 지역 작가들의 작품 역시 보다 다양하게 나타나리라 기대해본다.

2. 

탐미협 기획전 '불이행' 전시 입구 전경. ⓒ제주의소리
탐미협 기획전 '불이행' 전시 입구 전경. ⓒ제주의소리

여순항쟁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여수 작가들에 화답하듯, 제주 작가들은 ‘불이행’이란 선명한 주제 의식을 가져왔다. ‘따르지 않겠다’는 선언은 1948년 10월 19일 국군 14연대 장병들이 외침이기도 하다. 

애국인민에게 호소함

우리들은 조선인민의 아들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사람의 아들로서
조선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1. 동족상잔 결사반대
2. 미군 즉시 철퇴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

치열한 이념 충돌의 장이었던 해방 이후 상황을 고려할 때, 14연대 장병 가운데 좌익 세력이 일부 포함돼 있다고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조정래 선생이 소설 ‘태백산맥’을 통해 고했듯이, 경찰 포함 우익의 횡포에 내몰린 순수한 민족애와 절박한 생존욕구를 가진 청년들 또한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그들의 ‘불이행’을 그저 반란으로 취급하기에 앞서, 역사의 전후 사정을 인지하는 판단 또한 필요해 보인다. 

조정래 선생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3권 가운데 여순사건의 14연대에 대한 부분을 전시장에서 소개하고 있다.<br><br>ⓒ제주의소리
조정래 선생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3권 가운데 여순사건의 14연대에 대한 부분을 전시장에서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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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고 구기고 구멍을 뚫고 끈으로 묶고 칼로 찌른 팩(pack)들을 붉게 칠하며 ‘빨갱이’라는 이념의 덧칠을 노골적으로 고발한 이경재 작가 ▲여순사건 당시 희생자들 사진과 물방울, 그리고 결혼식 사진이나 아기 돌 사진을 겹치는 합성 이미지로 물거품처럼 사라진 희망을 안타까워 한 최소형 작가 ▲여순10.19와 제주4.3의 해원을 광목천 위에 연필로 그린 양천우 작가 ▲주 종목인 사진·영상이 아닌 종이 인쇄를 활용해 역사의 흔적을 주목한 양동규 작가 ▲지시하는 검지손가락과 걸음을 멈춘 발이라는 발상으로 핏빛 강을 건너지 않은 불이행을 묘사한 박진희 작가.

박진희&nbsp; 건너지 않았다&nbsp; 철, 동, 가변설치&nbsp; 2022<br><br>​​​​​​​ⓒ제주의소리<br>
박진희  건너지 않았다  철, 동, 가변설치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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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nbsp; 손가락 총과 하얀 고무신&nbsp; 미디어 혼합매체, 가변설치(단채널 비디오, 흰 고무신 한 켤레)&nbsp; 2022<br><br>​​​​​​​ⓒ제주의소리<br>
정유진  손가락 총과 하얀 고무신  미디어 혼합매체, 가변설치(단채널 비디오, 흰 고무신 한 켤레)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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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미경&nbsp; 평화로운 천국&nbsp; squid bone, oil on canvas&nbsp; 91x73cm(21 piece)&nbsp; 2022<br><br>​​​​​​​ⓒ제주의소리<br>
양미경  평화로운 천국  squid bone, oil on canvas  91x73cm(21 piece)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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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화면은 손가락총, 소리는 장전과 발사, 그리고 화면 앞 걸린 흰 고무신이라는 입체적 표현으로 비극을 각인시키는 정유진 작가 ▲당겨지고 늘어뜨리고 널브러진 털실 구멍으로 기나긴 역사의 고통에 공감한 김영화 작가 ▲짓이긴 듯 붉게 번진 동백꽃 위에 그어지고 퍼진 흰색 물감으로 ‘낙화의 노래’ 악보를 완성한 이종후 작가 ▲막대기 혹은 총열에 달린 손가락 총과 함께 불타오르는 숭시를 형상화한 고혁진 작가 ▲선(線)을 활용한 기하학적 구조로 갈등 앞에 놓인 인간의 선(善) 의지를 고민한 조이영 작가 ▲아름다운 애기섬 바다 아래 쌓인 집단 수장 유골을 통해 장소의 역사성을 강조한 강동균 작가 등 전시장에는 여순사건을 해석한 제주 작가들의 발상을 만날 수 있다.

오석훈 작가의 영상 작품 ‘여순1019’는 시작과 함께 전체 화면이 하얀색 자막으로 도배된다. 자막은 30줄이 넘는 텍스트가 쉴 새 없이 이동하는데, 텍스트 내용은 날짜, 장소, 내용만으로 간단히 요약된 정보다. 

1948~1953 여순사건 곡성 학살 ― 국군과 경찰에 의해 곡성군 일대에서 수백 명 희생
1948. 10월경. 여수 호명동 야산 학살 ― 여수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되었던 주민 일부가 경찰에 의해 여러 차례에 걸쳐 100여명 총살 후 암매장
1948.10.26.~12월 경 여수 오동도 학살 ― 진압군과 경찰에 의해 오동도에서 700여명 학살, 수장….

오석훈&nbsp; 여순1019&nbsp; 디지털 영상&nbsp; 3840x2160-4K Super(가변크기)&nbsp; 6분&nbsp; 2022<br><br>ⓒ제주의소리
오석훈  여순1019  디지털 영상  3840x2160-4K Super(가변크기)  6분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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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객은 글자가 빽빽하게 나열되는 시각 정보 자체를 마주하는 첫 번째 인식을 지나, 줄마다 적힌 내용을 읽으면서 의미를 생각하는 두 번째 인식을 거쳐, 세기도 힘든 인명 학살들이 내면을 짓누르는 세 번째 인식 과정까지 느낀다. 줄이 흐르는 속도를 다르게 설정했고, 오른쪽에서 나와 왼쪽으로 향하면서 끝에서는 사선 방향으로 빨려 들어가는 시각 효과는 단순 전달에서 탈피하려는 시도로 읽혔다.

고승욱 작가의 ‘불’은 높이와 폭 모두 2m인 거대 작품이다. 작품 안은 검은 비닐봉지들이 묶인 채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몇몇은 길게 돌출돼 세워져 있는데 그 부분들이 모여서 한자 ‘불(不)’을 형상화 한다. 불이행을 결단하면서 본인들은 종국에 마주할 결과를 충분히 예상할 만 하다. 당연히 비극에 가까울 결말을 전망하면서도 그들은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며 불이행을 택했다. 하나씩 구분하면 무척 얇고 가벼운 비닐이란 소재, 그러나 단단히 묶인 채 모이고 모여서 만들어낸 ‘不’의 묵직한 무게감은 14연대 장병들의 결심과도 맞닿아 있는 듯하다. 틀에 억매이지 않는 형식과 지역사회 문제가 꾸준히 관심을 가져온 고승욱 작가의 ‘불’ 작품은 소재 선택과 구현에 있어 흥미롭다.

고승욱&nbsp; 불&nbsp; 비닐봉지&nbsp; 200x200cm&nbsp; 2022<br><br>​​​​​​​ⓒ제주의소리
고승욱  불  비닐봉지  200x200cm  2022

ⓒ제주의소리

▲처분을 앞둔 여순사건 희생자들의 비참한 뒷모습과 유골들이 산재한 계곡을 그리면서 역설적인 제목(평화로운 천국, 여수야화)을 들고 온 양미경 작가 ▲손가락 검지를 정교한 총열로 만들면서 여순사건 손가락 총의 비극을 형상화한 강문석 작가 ▲여순사건 피해자들이 두려움에 떠는 모습 위로 여수 위령비에 새겨진 침묵 기호, 그리고 동자석을 함께 세우며 비판과 위령의 메시지를 함께 전한 김수범 작가 ▲물방울이 떨어지는 파동 현상을 깊고 켜켜이 화폭에 채우면서 역사의 슬픔에 주목한 박소연 작가.

▲재를 활용해 일반 유화보다 더 무겁고 입체감 있는 화폭 위에, 군인으로 여순사건 진압에 참여한 박정희의 최후를 감각적으로 그린 정용성 작가 ▲자신만의 ‘서랍’ 연작을 통해 공감과 다름의 가치를 응축시킨 서성봉 작가 ▲상어, 숫자14가 적힌 철모와 소총, 바위 이미지를 합성해 제주도를 삼키려는 폭력적인 세력에 맞서는 굳은 결의를 탁월하게 비유한 홍덕표 작가 ▲두 장소가 불타는 모습을 통해 여순10.19과 제주4.3의 비극을 함께 보여주는 이준규 작가 ▲민간인 학살터 발굴 현장을 그린 강요배 작가 ▲무수히 위아래를 오가는 붓질 속에 학살터로 향하는 여수 마래터널에서 느낀 영감을 표현한 오현림 작가 등도 형식과 해석을 다양하게 오가며 여순사건을 그린다.

홍덕표&nbsp; 남풍&nbsp; 디지털 프린트, blender&nbsp; 60x150cm&nbsp; 2022<br><br>​​​​​​​ⓒ제주의소리<br>
홍덕표  남풍  디지털 프린트, blender  60x150cm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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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석&nbsp; 총기번호 1948&nbsp; 동, 나무&nbsp; 20x70x65cm&nbsp; 2022 (왼쪽)<br><br>김수범&nbsp; 하얀 비명&nbsp; 한지에 수묵 담채, 오브제&nbsp; 100F&nbsp; 2022 (오른쪽)​​​​​​<br>​<br>ⓒ제주의소리<br>
강문석  총기번호 1948  동, 나무  20x70x65cm  2022 (왼쪽)

김수범  하얀 비명  한지에 수묵 담채, 오브제  100F  2022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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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한 스케일로 역사화 작업에 임하는 이명복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도 공력을 쏟았다. 폭 5.4m, 높이 2.2m 규모의 ‘광란의 기억―여순’은 여순사건의 장면 장면과 인물 인물을 구석구석 정교하게 묘사해 놨다. 여러 인물과 사건 속에서도 정점은 이승만이다. 작품 중심 최상단 위치에서 미소 짓는 얼굴 아래로는 해골이 즐비하게 탑처럼 쌓여 있다. 여기에 얼굴 아래로 촉수 혹은 뿌리로 보이는 것들이 작품 전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형상은 여순사건에서도 이승만이 만행의 근원이자 역사의 죄인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명복&nbsp; 광란의 기억-여순&nbsp; 캔버스에 아크릴&nbsp; 227x546cm&nbsp; 2022<br><br>​​​​​​​ⓒ제주의소리&nbsp;&nbsp;
이명복  광란의 기억-여순  캔버스에 아크릴  227x546cm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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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미협 작가들의 ‘불이행’은 표현·방향 등에 있어 작가 개개인과 단체의 역량뿐만 아니라 제주4.3의 저력을 느끼게 했다. 여기서의 ‘저력’이란 견제와 압박에 굴하지 않고 버텨온 시기를 지나, 늘 현장과 가까이 하며 어느덧 한 걸음 더 앞서가는 4.3을 고민하고, 이제는 다른 역사들과 연대하며 이끄는 성숙함을 일컫는다. 

민미협과 탐미협을 중심으로 한 여수·제주 간의 미술 교류는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7일부터 20일까지 여수세계박람회장에서는 제주4.3과 여순10.19 합동 전시가 열리고 있다. 여수에서 4.3을 소개하는 미술 전시는 이번이 처음으로 알려졌다. 제주 작가도 26명이 참여했다. 그렇기에 이번 제주4.3평화기념관에서의 기획전은 여수 합동전에 탐미협이 화답하는 모양새다. 

국가 폭력의 아픔을 공유한 지역 간의 연대는 단절된 역사가 아닌 연결된 역사로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더욱이 거의 동일한 시간과 과정을 공유하는 여순10.19와 제주4.3은 더욱 특별한 관계일 수 밖에 없다. 역사 진상규명이나 예술 기억운동에 있어 제주4.3은 이미 많은 세월과 노력을 쌓았는데, 앞으로 여순10.19는 그 뒤를 밟아갈 것으로 보인다. 꾸준한 교류와 활동을 기대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루 수천, 수만 명이 오가는 제주 땅과 제주 바다에 고통의 역사가 서려있다. 기획전 <여순1019>는 여수 바다와 순천 산자락 어딘가 에도 또 다른 현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제주도 진압을 거부한 14연대 장병들의 호소문.<br><br>ⓒ제주의소리
제주도 진압을 거부한 14연대 장병들의 호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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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은 하나의 사건으로 통관되어야 한다.
제주도민과 여순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이승만은 그 궐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이 없었더라면 이승만은 정권을 유지하지 못했다.
더 크게 말하면 그는 6.25전쟁의 최대 수혜지였다.
6.25전쟁이 없었더라면 이승만은 정권을 유지할 길이 없었고
오늘날까지도 태극기부대가 준동하는 우익친미기독교 국가가 될 길이 없었다.

- 우린 너무 몰랐다  해방,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  도올 김용옥  통나무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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