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왓 칼럼] 아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원한다. 단절된 보호가 아니라 / 신강협

14일 오후 2시 제주도의회 도민카페에서 '제주도 위기영아 보호상담 지원 조례안 2차 공청회'가 열렸다. <br><br>ⓒ제주의소리 자료사진
14일 오후 2시 제주도의회 도민카페에서 '제주도 위기영아 보호상담 지원 조례안 2차 공청회'가 열렸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베이비박스 지원조례 관련 공청회(?)가 다시 열렸다. 위기영아 보호상담지원조례에 관한 공청회(송창권 의원 주최)라는 이름으로 열렸다. 논쟁을 의식해서인지 ‘베이비박스’라는 단어는 전혀 들어가지 않았지만, 위기영아 보호상담 지원조례 조례안은 기존의 베이비박스 지원조례의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어 논란은 재연됐다. ( 관련 기사 : 다시 불붙은 ‘베이비박스’ 공방 “영아유기 조장”vs“최소한 보호책” )

공청회장은 베이비박스 찬성 측의 무리한 주장으로 한 순간 아수라장이 되기도 했다. 조례 제정 중단을 요청하는 측에서 ‘제주도의 아동 유기 사례가 많지 않다면, 조례가 반드시 필요한가’를 따지던 도중, 찬성 측으로 참석한 한 청중이 한 마디 내뱉었다. “여러분! 제주도가 전국에서 범죄율 3위인거 아시죠?” 한 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베이비박스가 얼마나 필요한지 모르겠으나 제주도를 범죄가 가득한 도시로 비하하면서까지 조례를 제정해야 하는지 참으로 기가 막혔다. 공청회 이후에 찬성 측 관계자는 이번 공청회에 참가한 해외 입양 당사자에게 여전히 ‘자신들은 인권은 나중 문제이고 생명이 우선’이라는 주장을 했다고 한다. 존엄한 생명이 인권이라는 기본적 상식도 이해하지 못하는 인식이다. 

베이비박스 찬성 측은 한 기독교 교회 관련 인물들이 주로 참여하고 있다. 기독교 계통의 중앙 일간지에는 갈대바구니에 놓인 아이를 구하는 심정으로 베이비박스를 운영하고 있으며, 아이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임을 드러내고 있다. 필자로서는 고개가 많이 갸웃해지는 이야기이다. 

아주 오랜 옛날, 한 아이가 태어난다. 목숨이 위태로운 사회 때문에 아이를 갈대바구니에 놓고 강물에 흘려보낸다. 아이는 부유한 여인에게 발견되어 길러진다. 아이가 누구였는지, 그 어미가 알고 있었고, 세상의 조물주인 하나님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후 하나님은 그 아이에게 아이의 정체성을 밝혀준다. 두려움에 자신의 정체성을 거부하다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삶이 역동적으로 변화하며 억압받는 민족의 해방자가 된다. 그 아이가 바로 모세이다. 

이 이야기에서 아이의 정체성이 숨겨져 은폐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렸을 때 버려진 불쌍한 입양아가 되진 않았을까? 아니면 산속 깊이 숨어 사는 목동이 되진 않았을까? 사실 기독교의 성경은 모세 이야기를 통해 사람은 그 생명 자체 뿐만 아니라 그 삶도 매우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발산한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바로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이지 않은가? 거기에서 정체성을 삭제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현대사회의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살펴보자. 예수 그리스도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단순하게 생명을 살려주고 동정을 베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이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사람답게 살게 해주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베이비박스를 찬성하는 사람들이 왜 아이 생명, 그 자체만 강조하는지 모르겠지만 아이의 생명을 구한다는 생각에만 집중해 성서가 보여주는 전체 이야기를 미처 떠올리지 못하지 않았나 싶다. 존엄한 아이의 삶을 전체적으로 고민하는 것이 좀 더 기독교적 행위에 부합할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 사회의 인권적 삶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번 공청회는 다시 한 번 아쉬운 점이 반복됐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찬성 측은 여성들이 겪는 혐오적 인식과 사회적 시선으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여성들에게 집중하면서, 그 과정에서 위협받는 아이의 생명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들은 여성들에 대한 부담감을 줄이는 방식으로 아이의 생명을 구하려 한다. 아이의 생명과 삶은 그저 그들 행동의 대상일 뿐이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여성들의 상황이 결정적이다. 

베이비박스를 선택한다는 것은 아이의 선택이 아니다. 이제 갓 태어난 아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묻고 듣는다는 말인가? 하지만 우리는 기존의 사례를 통해, 성장한 입양 당사자들이 던지는 질문을 통해 아이들의 질문을 유추하고 그에 성실히 답해야 한다. 하지만 베이비박스는 그런 질문 기회 자체를 봉쇄해버린다. 결국 베이비박스는 성년이 되어가는 아이의 삶에 치명적인 위험이 되고 있다. 정체성을 찾지 못해 혼란스러워 하는 삶에 대해 우리는 깊게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고, 조례가 절실하다고 하더라도, 상대를 문제투성이로 만드는 언사는 참으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베이비박스의 문제에서 여성의 선택과 삶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만큼, 아이의 생명과 삶이 그에 못지않게 다뤄져야 한다. 공청회에서 출생신고에 관한 법률이 마치 모든 문제의 원인인 것처럼 이야기 되는 것에 결코 동의하지 못하겠다. 왜냐하면 출생신고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누리는 출발점이다. 이 과정은 당연히 엄격해져야 한다. 그래서 유엔아동권리협약을 통해 아동의 국적 부여를 2개의 항에 걸쳐 자세하게 아동의 권리로 설명하고 있다. 출생신고와 관련된 국가 책무가 무엇보다도 강조되는 이유이다. 

인권은 어디에서든 누구든지 간에 보류되거나 포기될 수 없다. ‘위기영아 보호’에 있어서 여성과 아동의 생명과 삶이 모두 존중될 수 있는 방식이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베이비박스 관련 논의를 중단하고, 국가적 책무로서 위기영아에 대한 기존체계의 보강하여 위기영아와 함께 위기에 빠진 모든 사람들이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조례를 새로 논의해야 한다. / 신강협 제주평화인권연구소왓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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