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1948년 군법회의로 형무소 끌려간 미신고 생존수형인 박화춘 어르신
자식들 피해 갈까 묻어뒀던 74년 한(恨) 이제야 꺼내놓는 그 날의 기억

제주 서귀포시 강정동(4.3 당시 중문면 강정 월산)에 사는 박화춘(96) 어르신은 4.3당시 불법 군법회의에 회부돼 억울한 수형 생활을 했다. 지금까지 두려움과 그러지 않아도 될 부끄러움으로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다 이제서야 그날의 기억을 꺼냈다. 어르신은 4.3피해자로 등록되지도 않은 미신고 수형생존인이다. ⓒ제주의소리
제주 서귀포시 강정동(4.3 당시 중문면 강정 월산)에 사는 박화춘(96) 어르신은 4.3당시 불법 군법회의에 회부돼 억울한 수형 생활을 했다. 지금까지 두려움과 그러지 않아도 될 부끄러움으로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다 이제서야 그날의 기억을 꺼냈다. 어르신은 4.3피해자로 등록되지도 않은 미신고 수형생존인이다. ⓒ제주의소리

70여년 전 제주4.3 당시 피해를 겪고도 지금까지 피해자로 등록되지 않은 미신고 생존수형인이 확인됐다.

1948년 12월, 불법 군법회의에서 형을 선고받고 육지 형무소로 끌려간 뒤 살아 돌아온 박화춘(96) 할머니 이야기다. 서귀포시 강정동에 살고 있는 어르신은 4.3당시 끌려가 억울하게 ‘죄인’이 됐다. 

이제까지 억울함이 없었느냐는 물음에 “두려워 억울한 것도 몰랐다”고 답할 만큼 4.3은 어르신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런 어르신을 [제주의소리]가 만나 70여 년 숨겨올 수밖에 없었던 한(恨)이 서린 이야기를 들어봤다.

4.3 당시 서귀포 중문면 강정 월산마을에 살던 어르신은 마을 사람들이 어디론가 끌려가자 집이 아닌 밭에서 숨어 살았다. 어머니가 해다 주는 밥을 먹으며 며칠 살다가 따라오라는 누군가와 함께 산으로 숨어들게 됐다. 

살기 위해 어떤 영문인지도 모르게 숨어 살던 산 생활 중 집안 제사를 치르러 산을 내려와 집을 향하던 길에 어르신은 군경에 붙잡혔다. 

호근리로 끌려간 어르신은 리사무소에 있다가 서귀포경찰서로 옮겨갔고, 거기서 며칠을 머문 뒤 차에 태워져 제주시로 넘어가게 됐다. 

어르신의 죄는 제주시에서 만들어졌다. 붙잡힐 당시 죄가 있었거나 어떤 혐의로 체포돼 죄가 밝혀진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죄는 강요에 의해 만들어졌다. 

거꾸로 매달린 채 고문을 받아 어쩔 수 없이 무장대에 ‘보리쌀 두 되’를 줬다고 허위로 자백하게 된 것. 거짓 자백을 받아낸 당시 군경은 어르신을 군법회의에 회부했고, 어르신은 징역형을 선고받고 육지의 형무소로 끌려갔다. 

그냥 살기 위해 몸을 피했을 뿐인데 보리쌀을 무장대에 넘겨 도움과 편의를 제공한 범죄자가 되고 만 것. 그날의 기억은 어르신에게 죄인이 됐다는 창피함과 두려움을 안겼고, 70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겨우 이야기를 꺼낼 용기를 냈다. 

어르신은 “그때 제주시로 넘어간 사람들은 말로 못 할 만큼 고생했다. 거꾸로 매달아 놓고 바른말을 하라고만 하니 보리쌀 줬다고 이야기를 한 것”이라고 했다. 

당시 억압과 고문의 강도는 지금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어르신은 누군가의 갓난아기가 죽자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어르신도 세 살배기 딸이 있었지만, 다행히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형무소에서도  숨 죽여 지냈다. 별 탈 없이 형기를 채우던 중 모범 수형인으로 60일이 감면돼 집에 일찍 돌아올 수 있었다고 했다. 

이제까지 말 못 한 이유를 물으니 “그런 말을 누구한테 하겠나. 아기들(자식들) 피해 입을까봐 이야기 못 하지. 무서워서 억울한 것도 생각 못 했다. 그냥 사람들 마주치지 않는 외딴 길로만 다니고 싶었다”고 감 잡을 수 없는 세월의 한을 토해냈다. 

이야기를 꺼내놓는 지금에도 어르신은 무섭고 괜히 이야기했나 싶다고 했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니 자식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 같아 미안하고, 예전 기억을 다시 꺼내려니 무섭고 창피하다고 했다.

1948년, 1949년 당시 진행된 군법회의 수형인명부. ⓒ제주의소리
1948년, 1949년 당시 진행된 군법회의 수형인명부.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군법회의 수형인명부에는 박화춘 어르신(빨간 동그라미)의 이름이 적혀있다. ⓒ제주의소리

어르신이 억울하게 수형 생활을 했다는 기록은 ‘수형인명부’에 정확히 드러나 있다. 당시 어르신은 1948년 12월 군법회의를 받고 언도됐다. 이후 전주형무소로 끌려가 수형 생활을 했고, 어르신 증언으로는 서울 서대문형무소로도 끌려갔다고 했다. 

1948년에는 제주도 중산간지대 소개령으로 시작된 ‘초토화작전’ 당시 군부대에 체포당한 무고한 주민들이 제주농업학교 등 수용소에 임시 수감됐고, 무장대와의 관련 여부를 가리기 위한 조사를 받았다. 

애초에 ‘모든 저항을 없애기 위해 모든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유격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는 내용의 제9연대 대량학살계획이 있었기에 주민들은 죄 없이 잡혀와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여성들의 경우 전주형무소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희생자로 등록되지 않은 어르신의 사연이 전해지자 ‘제주4.3사건 직권재심 권고 합동수행단(단장 이제관, 합동수행단)’은 직권재심 청구 준비에 착수했다. 4.3평화재단도 조사를 시작했다. 

어르신의 아들인 윤창숙 씨는 “평생을 살아오면서 어머니께서 말씀하지 않으시니 전혀 몰랐다. 바라는 건 딱히 없고 재심 재판을 통해 지금도 창피하다고 말씀하시는 어머니 마음이 명예회복으로 편해지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연세가 있으신데 돌아가셨으면 4.3으로 고통받은 사실도 전혀 몰랐을 것”이라며 “4.3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하니 어머니도 말씀을 꺼내시게 됐다. 같이 어울리시는 어르신들 이야기를 듣고 제게 겨우 말씀해주신 것”이라고 말했다.

억울함도 두려움에 숨겨야 했던 평생의 이야기를 이제야 겨우 꺼낸 박화춘 어르신. 비단, 4.3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 희생자들은 어르신뿐만이 아닐 것이다. 늦기 전에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에 모두의 관심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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