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제주소재 창작연극 ‘돗추렴’, 가람 ‘해경 무렵’, 공육사 ‘맥베스’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 영향일까, 올해 제주 연극계는 유독 연말에 일정이 집중되는 모습이다. 이 가운데 교집합으로 묶이는 작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1970~80년대 제주가 배경인 두 작품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고, 무대 위 제주어 사용에 대한 나름의 고민들이 엿보인다. 나아가 제주 문화 전승과 제주어 보전을 위해 도립극단이 왜 필요한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바로 제주소재 창작연극 다섯 번째 작품 ‘돗추렴’(11.01.), 극단 가람의 ‘해경 무렵’(11.05.~06.), 극단 공육사의 ‘맥베스’(11.03.~11.05.)다.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돗추렴' 출연, 제작진들의 기념사진.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 돗추렴

‘필요한 사람끼리 돈을 모아 공동으로 돼지 잡는 일.’

이 작품은 지금도 남아있는 제주 공동체의 풍습 ‘돗추렴’을 다룬다. 제주 해녀 유옥순(배우 김정희)에게 돗추렴은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제주4.3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돼지를 잡아서 마을 주민들에게 나눠줬다가 빨갱이로 몰려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 자신이 키우는 돼지가 필요하다는 요청도, 아들이 돗추렴으로 얻어온 고기마저도 진저리가 나는 이유다.

작품은 4.3으로 조부모와 부모를, 군사정권 삼청교육대로 아들을 떠나보낸 주인공의 기쁜 반전으로 끝맺는다. 베트남에서 온 손자며느리의 임신 소식에 기어코 거부하던 집돼지의 돗추렴을 흔쾌히 승인한 것이다. 비극의 돗추렴이 행복의 돗추렴으로 바뀌는 극적인 순간, 자신을 평생 얽맨 불행은 화합의 기쁨으로 승화된다. 자신을 모질게 괴롭힌 시댁 식구의 진심어린 반성이 먼저 있었음을 빠뜨려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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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경 무렵' 출연, 제작진들의 기념사진.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 해경 무렵

‘마을마다 기간을 정해 미역 채취를 금하다 음력 3월초가 되면 채취를 허가하는 일.’

지금은 규모가 크게 축소됐지만, 제주 미역이 시장에서 상품 가치가 높았던 시기에 ‘해경(解警)’은 마을의 큰 행사였다고 알려진다. 연극 ‘해경 무렵’에서 식당 주인 이막순(배우 고가영)은 다가올 해경으로 돈을 마련해 빚을 갚으려 한다. 자신이 소유한 땅 ‘작지왓’을 담보로 낸 빚이다. 작지왓은 뱃일하다 실종된 남편을 모신 헛묘이자, 탐욕스러운 어촌계장이 주도하는 마을 개발 사업에 꼭 필요한 땅이다.

작품은 4.3 당시 얽힌 악연이, 시간 지나 관광 개발이라는 갈등을 계기로 드러난다. 시기 질투에 눈이 멀어 공동체를 망가뜨린 어촌계장의 뒤늦은 참회, 개발에 반대하며 분신한 아들, 늙은 시어머니와의 갈등·화해까지…. 현대사를 관통한 제주 여인의 힘겨운 삶은 잔잔히 관객의 마음을 울린다. 어느덧 미역 채취를 알리는 신호가 바닷가에 울려 퍼지고, 그렇게 삶은 다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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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스 '출연진들의 기념사진.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 맥베스

적을 물리친 위대한 장군에서, 왕을 시해한 반역자, 결국 왕위에 올랐지만 몰락한 폭군으로 끝나버린 인물 '맥베스'를 그린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 제주 극단 공육사는 파멸로 치닫는 욕망의 이야기에 제주어를 입혔다.

작품 속 버남 숲과 던시네인 언덕은 소낭밭과 남원골로 바뀌었다. 맥베스(배우 조성진)와 그의 부인(배우 박설헌), 맥베스의 라이벌 격인 뱅코 장군을 비롯한 등장인물들, 그리고 세 마녀의 대사를 제주어로 만나는 기회는 흔치 않으면서 동시에 이질적이다. 특히, 출연진이 5명인 소극장 공연이라는 여건을 감안하더라도, 구성에 있어 가급적 원작에 가깝게 보여주려는 각색·연출자의 시도가 더해졌기에 작품은 동·서양이 묘하게 섞이는 매력을 풍긴다.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무수하게 재해석된 고전이기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개인적으로 2022년 대한민국에서 만난 맥베스는 위태로운 군주에 눈길이 갔다. 

아, 불쌍한 나라!
못 알아볼 지경이오. 어머니가 아니라
무덤이라 할 수밖에 없는 그곳에선
무지한 자 말고는 어떤 것도 웃지 않고
탄식과 신음과 대기 찢는 비명을 토해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으며, 격렬한 슬픔은
흔해 빠진 감정 같소. 조종(弔鐘)을 듣고도
누구인지 안 물으며, 착한 사람 목숨이
모자 위의 꽃보다 더 빨리 시들어
병들기도 이전에 죽습니다.

- ‘맥베스’ 가운데 

백성을 위한 통치는 온데간데없고 정적을 없애는데 몰두하는 국왕, 위기에 대처하는 자세는 합리적인 판단보다는 마녀들의 예언에 의존한다. 1606년에 쓰인 문학이 400년이 넘는 긴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 날 교훈과 깨달음을 안겨주기에, 위대한 고전의 힘을 다시 한 번 체감한다.  


11월 초에 연이어 막을 올린 세 작품은 여러 특징으로 묶을 수 있다. 동시에 시사점도 안겨준다.

‘돗추렴’과 ‘해경 무렵’은 제주 극작가 강용준의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현 시점에서 대략 40~50년 전 제주를 시대 배경으로 삼고 있다. 차이점이라면 ‘돗추렴’은 제주어를 활용한 웃음과 과감한 각색을 통해 관객의 문턱을 크게 낮췄다. ‘해경 무렵’은 일부 각색이 더해졌지만 자연스러운 시간 흐름을 살리는 선에서 원작의 틀을 유지했다. 

이런 차이는 연출과 극단의 개성에 기반 한다. ‘돗추렴’은 강상훈·변종수 공동 연출로 제작됐는데, 연극 ‘제나 잘콴다리여’ 등에서 능력을 십분 발휘한 변종수의 제주어 활용 능력이 이번에도 비중 있게 사용됐다. ‘해경 무렵’은 연극인 이동훈이 연출했는데, 탄탄한 중견 배우진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구성을 선호하는 가람다운 무대였다. 

‘돗추렴’은 제주시가 지원하는 제주소재 창작연극 사업의 일환인데, 이전 창작 공연(홍윤애·강평국)과 비교할 때 제주 극작가의 작품이라는 취지나 산업화시기라는 배경 설정 등에서 운신의 폭을 더 넓혔다. 특히 ‘재미’라는 기준으로 보면 ‘돗추렴’은 고른 연령층이 즐길 만한 작품으로 평가할 만하다. 객석에서는 웃음과 눈물이 교차하며 박수가 쏟아졌다. 향후 완성도를 높인 재현 역시 충분히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협회에 속하지 않은 지역 극단이나 극단에 몸담지 않은 지역 배우들을 적극 활용해 제주 연극의 영역을 넓히는 효과는 이번 ‘돗추렴’을 통해 기대하는 대목이다. 원로 제주 극작가들의 작품을 보다 유연한 해석으로 만나는 시도 또한 유의미하다. 뿐만 아니라 제주소재 창작연극 사업은 앞으로 전국 공모 등으로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겠다.

‘맥베스’에서는 연극인 류태호가 고전을 대하는 확고한 기준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극단 공육사 창단 작품인 ‘유리 동물원’도 마찬가지였지만, 고전이 품은 깊은 맛이 우러나오도록 최대한 원작에 집중한다. 대사를 제주어로 변환하지만 그 역시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공육사의 ‘제주어 고전’은 대중적인 재미보다는 가치 비중이 높다고 여겨진다. 

‘맥베스’, ‘돗추렴’, ‘해경 무렵’ 세 작품을 보며 제주어 연극에 대해서도 고민해본다. ‘맥베스’는 극단 놀이패한라산 소속 연극인 신제균이 제주어 감수를 맡았다. ‘돗추렴’은 협력 연출인 변종수가 원작에 없는 제주어 대화를 추가했다. ‘해경 무렵’은 원작 속 제주어 대사를 베테랑 배우들이 자연스럽게 살려냈다. 

연극 대사의 제주어 감수·각색을 할 수 있는 자격증이나 기준은 마땅히 존재하지 않는다. 저마다 제주어를 구사하는 데 기준이 되는 경험도 다를 수 밖에 없다. 누구는 틀리고 누가 맞다 식으로 나누기보다는, 제주어를 사용한 연극이 조금이라도 더 많아지는 게 중요하다 본다.

소멸 위기 언어를 살리는 길은 간단하다. 사람들이 더 많이 사용하면 된다. 연극은 이 부분에 있어 어느 예술 분야보다 강점을 지닌다. 동시에 앞서 언급했던 제주소재 창작 등을 고려하면 고유문화를 알리고 전승하는 측면에서 극 예술은 독보적인 능력을 지닌다. 

제주다움을 다루고 제주어를 전면에 내세운 연극 세 편을 정리하면서 결국 제주도립극단을 떠올리는 이유다. 운영 방법에 따라 가용 예산을 비교적 유연하게 책정할 수 있는 도립극단은 현재 타당성 검토 단계에서 절차가 멈춰있다. 마침 내년 제주에서는 전국에서 가장 큰 연극 행사인 ‘대한민국연극제’ 본선이 열린다. 전국 유수의 극단들이 작품을 들고 제주에 찾아올 예정이다.  

언젠가 제주도립극단이 공연하는 ‘돗추렴’, ‘해경 무렵’, ‘맥베스’를 마주할 날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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