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57) 오시로 사다토시, 김재용‧박지영 편역, ‘저승의 목소리’, 소명출판, 2022

1.
오키나와 문학의 대부분은 오키나와 전쟁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오키나와 작가들은 오키나와 전쟁(후)의 양상과 그 과정에서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일어난 대참사는 물론, 전후의 트라우마와 미군기지로 전락한 채 전쟁과 결별하지 못하는 오키나와의 현재적 삶 등을 치열히 다루고 있다. 오키나와 문학은 그러므로 오키나와 전쟁에 대한 ‘기억의 정치윤리학’을 문학적 재현으로 벼리고 있다. 

2.
작가 오시로 사다토시(大城貞俊, 1949~)는 오키나와 문학의 예의 서사에 투철한데, 그의 서사에서 주목할 것은 우리에게 낯익은 소설의 양식, 즉 구미중심의 문자성으로 이뤄진 재현적 진실에만 몰두하는 게 아니라 구술연행(口述演行, oral performance)과 교호하는 구연적(口演的) 재현이 어울리면서 ‘탈식민‑냉전’에 대한 오키나와 문학을 수행하고 있다. 사다토시의 작품 중 단편 「저승의 목소리」는 그 대표작 중 하나다. 「저승의 목소리」는 10장 구성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구연적 재현으로 이뤄지는데, 이 작품의 제목과 직결되듯 오키나와 전쟁 무렵 죽은 자가 들려주는 말이 구술증언 형식으로 서술돼 있다(1,3,5,7,9장). 또 다른 하나는 문자적 재현으로 나타나는데, 오키나와 전쟁에서 죽은 자의 유골을 발굴/수습하는 데 전념하는 작중인물의 삶이 서사화돼 있다(2,4,6,8,10장). 그러니까 이 작품은 두 개의 재현(구연적 재현과 문자적 재현)이 서로 교차되고 맞물리는 소설의 양식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간과해서 안 되는 것은 구술증언을 바탕으로 한 구연적 재현이 작중인물의 일상에 전면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오키나와의 ‘탈식민‑냉전’은 오키나와 주민의 일상과 동떨어진 게 결코 아니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이렇듯이 「저승의 목소리」에서 구술증언은 매우 중요한 서사적 역할을 수행한다. 오키나와 전쟁 전 신내림을 받아 무당이 된 소녀 ‘키요’는 무당에 대한 탄압을 피해 가족과 마을 공동체로부터 격리 생활을 한다. 제국 일본이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치르는 데 조금이라도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을 부정‧억압했듯이, “무당뿐만이 아니라, 무당에 의지하는 사람들까지도 체포”(13쪽)하는 현실에서 ‘키요’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부모의 결단이었다. 작가는 ‘키요’의 구술증언을 1인칭 화자의 대화체로 실감 있게 들려준다. 오키나와 전쟁 직전 일본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정보 단속의 하나”“무당 사냥이 심해지던 시기”(48쪽)에 무당을 대상으로 한 죽임과 고문 등의 전쟁 폭력을 증언한다. 기실 이 작품에서 무당의 증언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3.
오키나와 전쟁 직전 자살을 시도했지만 살아난 ‘키요’는 전쟁 와중 고향을 떠나 오키나와 본섬의 도시 나하의 유곽 여자로 생활하다가 일본군 참호에서 일본군과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그래서 ‘키요’는 죽은 자로서 살아 있는 작중인물 ‘케이지’에게 꿈의 형식을 통해 자신의 말을 들려준다. 그 말의 요지는 오키나와 전쟁 무렵 죽은 자의 ‘마부이’를 온전히 진혼(鎭魂)하기 위해서는 “이승과 저승의 가교 역할”(27쪽)을 맡는 무당의 존재가 필요한데, 아시아‧태평양 전쟁과 오키나와 전쟁 때뿐만 아니라 전후의 일상에서 무당이 점차 소멸하고 있는 현실을 ‘키요’는 매우 안타까워한다. ‘키요’의 증언이 문제적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구술증언은 어떤 사건을 경험하였으나 당시 정치사회적 억압 및 제약 조건으로 말하지 못한 채 사회적 침묵 속에 있다가 생존자들의 말하기‒듣기가 실현된 것이다. 그런데 ‘키요’는 생존자가 아니라 죽은 자다. 죽은 자는 객관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현실에서 부재하는 자는 말 그대로 증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죽은 자에게 증언의 자격을 부여한다. 죽은 자가 신내림을 받은 무당으로서 비록 더는 무당의 본래 일(오키나와의 전통 무속 의례에 따라 마부이를 진혼하는 것)을 할 수 없지만,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능력을 부여받은 터에 ‘키요’는 마부이로서 숱한 “마부이를 죽은 땅에서 떠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28쪽) 자신이 전쟁 폭력으로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무당을 누군가 대신해주길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마부이를 버릴 수 없다는”(29쪽) 무당으로서 소임을 구술증언의 형식을 빌어 죽은 자는 말한다. 

4.
그런데 ‘키요’의 이러한 구술증언에서 우리가 숙고해봐야 할 대목이 있다. 오키나와에는 전쟁을 겪은 숱한 마부이들이 있듯, ‘키요’에게 오키나와 주민들, 야마토 사람들(일본군 포함), 미군들의 마부이들은 오키나와 전쟁에서 모두 뒤엉켜 있다. 이들 중에는 ‘키요’에게 젠더폭력을 행사한 자들이 있어 ‘키요’가 아무리 무당이라고 하지만 모든 마부이들을 동등하게 위무하는 일은 쉽지 않을 터이다. 작가의 바로 이 구연적 재현이 함의하는 서사적 진실은 일반적 구술증언의 채록이 겨냥하는 수행성 면에서 차이를 띤다. 작가에게 여성 무당으로서 ‘키요’의 구연적 재현은 ‘철(鐵)의 폭풍’으로 불리운 전쟁 폭력의 대참사를 겪은 사람들의 마부이를 온전히 진혼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물론, ‘키요’의 이 간절한 바람은 자칫 가해자/피해자를 구분하지 않고, 전쟁에 대한 추상적 휴머니즘으로 죽은 자의 개별 목숨을 전쟁 폭력의 일방적 희생으로 수렴시킴으로써 전쟁의 비극성과 역사의 허무주의로 전락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 귀 기울여야 할 ‘키요’의 구연적 재현은 그의 증언이 자기동일성의 독백으로 일관되지 않고, 생존자 ‘케이지’를 향해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키요’는 ‘케이지’의 일상으로 틈입하여 그에게 오키나와 곳곳에 방치돼 있는 유골을 발굴/수습하여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주워지기를”(59쪽) 기대한다. 하필 ‘케이지’를 대상으로 설정한 데에는, 그가 “베트남전이 시작되었던 1960년대 중반”(40쪽) 미군기지의 군무원으로서 일하던 중 “훌륭한 남자 무당이 될 수 있을”(41쪽) ‘신기(神氣)’를 체험하면서부터다. 그래서 ‘죽은 자‒키요’와 ‘산 자‒케이지’는 서로 소통이 가능한 서사적 지위를 얻는다. 여기서, ‘케이지’에게 무당의 영험한 능력이 베트남전을 치르는 미군기지에서 근무할 때 발현되었다는 것은 작가의 주도면밀한 서사적 재현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살펴봤듯이, 오키나와 전쟁은 현상적으로 끝났으나 작중에서 베트남전이 언급되듯 냉전체제의 군사적 거점으로서 오키나와는 여전히 그 역할을 맡고 있으므로, ‘키요’와 ‘케이지’의 소통은 오키나와가 직면한 ‘탈식민‑냉전’의 문제를 주목한다. 

5.
그리고 그들의 소통은 ‘케이지’의 아내 ‘다에’로 심화․확산된다. ‘다에’는 ‘케이지’와 같은 미군기지의 군무원으로서 1970년대 초반 오키나와의 조국복귀 투쟁 시기 노동 부문 활동가였다가 ‘케이지’와 결혼하여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다. ‘다에’는 오키나와 전쟁으로 부모와 가족과 친척 모두를 잃고 미군의 젠더폭력의 실제와 위협 속에서 조국 복귀 전과 후가 별반 다르지 않는, 일상의 무기력에 속수무책이다. 하지만 ‘다에’는 어느 날 남편 ‘케이지’를 따라나섰는데, ‘케이지’가 그토록 찾고자 했던 전쟁 유골이 있는 일본군 참호가 발견되고 현장을 목도하면서, 그곳을 어떻게 현재화(顯在化)하느냐 하는 의견을 내놓는다. 

“평화 학습도 좋지만, 이러한 참호를 찾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남편은 몇 년 동안 열심히 찾아다녔어요. 전사자의 유해를 찾기 위한 예산을 시에서 확보한다든지, 현에서 적극적으로 협조를 한다든지……. 미군기지 철거를 외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꾸준히 과거에 있었던 전쟁을 돌이켜 보는 건 어때요? 이번이 좋은 기회니까 시내 어르신들의 체험담을 모은다든지, 당시의 기억만을 되살리기 위한 유물을 모은다든지……, 모든 것을 잃기 전에 손을 쓰지 않으면 후회할 거예요.”(67쪽)

“옛 기억을 잊어서는 안 돼. 하지만 새로운 기억도 만들지 않으면 안 돼…….”(69쪽)

지금까지 ‘키요’가 전념한 전쟁 유골의 발굴/수습에 소극적이었던 ‘다에’의 발언은 ‘탈식민‑냉전’에 대한 오키나와의 기억 투쟁을 위해 구술증언의 채록과 그와 연관한 유물 수집을 통한 구연적 재현의 진실을 지속적으로 탐구할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분명 앞서 살펴본 ‘죽은 자‑키요’와 ‘산 자‑케이지’가 무격(巫覡)으로서 수행하는 일과 다르되, 살아남은 자가 제의적(祭儀的) 기억과 함께 역사를 체현(體現)․육화(肉化)하는 재현의 부단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함을 말한다.

따라서 ‘다에’식 기억 투쟁의 수행은 ‘키요’와 ‘케이지’ 사이의 구연적 재현이 자칫 낳을 수 있는 전쟁의 추상적 이해와 ‘수난사중심주의(suffering‑centrism)’ 해석과 평가를 넘어 동아시아의 ‘탈식민‑냉전’에 대한 오키나와의 창조적 상상력을 한층 구체화한다. 


# 고명철

1970년 제주 출생.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1998년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에서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가 당선되면서 문학평론가 등단. 4.3문학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새로운 세계문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연구와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문학(문화)을 공부하는 ‘트리콘’ 대표. 계간 <실천문학>, <리얼리스트>, <리토피아>,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 역임. 저서로는 《세계문학, 그 너머》, 《문학의 중력》, 《흔들리는 대지의 서사》, 《리얼리즘이 희망이다》,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뼈꽃이 피다》, 《칼날 위에 서다》 등 다수.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mcritic@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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