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메데이아’

그런 경험이 있다.

으리으리한 대극장도 아니고, 이름난 출연진도 아니지만 보고 나면 기억에 오랫동안 남는 공연. 최근 제주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열린 연극 ‘메데이아’가 바로 그런 경험이었다. 

자신을 버리고 다른 여자로 떠난 남편에 분노해 그의 새부인, 장인어른, 심지어 본인의 두 자녀까지 죽인 여자. 연극 ‘메데이아’는 기원전에 쓰인 대사를 한결 이해하기 수월하게 풀어내는 빼어난 각색과 짜임새 있는 연출로 한 여인의 분노를 재현했다. 나아가 흔치 않은 제주 연극인들의 협업이 빛을 발하면서 ‘메데이아’는 올해 제주에서 올린 연극 가운데 손꼽히는 작품으로 평가 받기 충분했다.

연극 '메데이아' 출연진과 제작진 기념사진. 맨 왼쪽부터 서민우, 황은미, 홍진숙, 고지선, 신제균, 신현종, 조흠.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연극 '메데이아' 출연진과 제작진 기념사진. 맨 왼쪽부터 서민우, 황은미, 홍진숙, 고지선, 신제균, 신현종, 조흠.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메데이아’는 기원전 400년경에 활동한 고대 그리스 작가 에우리피데스가 남긴 이야기다. 메데이아(배우 고지선)는 남편 이아손(조흠)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자신의 집안을 버리고 살인까지 서슴지 않았지만, 낯선 타국 코린토스에서 남편은 자신을 버린다. 코린토스 왕국의 공주와 새로 결혼해, 자신의 자녀들에게 부와 명예를 전해주기 위해서라는 이유다. 남편을 도저히 용서 못 할 메데이아는 독한 마음을 품는다. 일단 자신에게 당장 떠나라고 명령한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신제균)에게 연민을 일으켜 하루의 시간을 벌고, 제3국에서 신변을 보장해줄 수 있는 조력자(신현종)를 구한다. 다음으로 남편에게 화해하자는 태도를 보이며 자녀들을 시켜 귀한 보물을 코린토스의 공주, 즉 남편의 새부인이 직접 받도록 시킨다. 메데이아는 그 보물에 맹독을 발랐다. 예상대로 공주는 몸이 녹아내리며 사망하고,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을 이기지 못한 크레온 왕도 딸을 껴안으며 함께 숨진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남편에게 극한의 고통을 선사하겠다는 일념으로 자녀들의 목숨을 자기 손으로 거둔다. 메데이아는 비통해하는 남편을 바라보며 작품은 끝이 난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창작된 희대의 악녀 메데이아 이야기는 2400여년이 지난 오늘 날 접해도 파격 그 자체다. 원작은 특유의 에두르는 표현과 신들을 인용하는 문장 구조가 다소 낯설게 다가온다. ‘제주 메데이아’ 공연은 일단 그리스 원전의 영어 번역본을 다시 한글로 바꾼 대본을 기본으로 삼았다. 덕분에 문장은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새장가 ▲백년가약 ▲새색시 ▲새신랑 ▲거지꼴 ▲비단옷 ▲앙탈 ▲인과응보 등 익숙한 단어들도 이해를 돕는다. 

여기에 더해 별도의 각색 작업을 통해 이야기에 알맞은 단어와 문장 등을 새로 추가했다. 조강지처, 귀향길, 개자식 같은 단어들을 추가했고 여성의 처지에 대해 한탄하는 대목에서는 “2000년이 지나면 나아져요”, 이중적인 잣대를 꼬집을 때는 “술은 마시지만 음주는 아니다” 등 대사들을 적재적소에 넣었다. 관객 입장에서는 부담스럽지 않고 깔끔하게 고전을 만나는 기분이다.

물론 고유의 맛을 살리는 원작 대사들도 재현했다. 예를 들어 “제우스여, 당신은 진짜 황금과 가짜 황금을 구별하는 방법은 가르쳐 주셨어요. 그런데 어찌하여 사악한 인간을 가려낼 수 있는 표시는 사람 몸에 남겨두지 않으셨습니까?” 혹은 “그대가 웃지 못하는 한, 고통조차 내겐 이득이라는 것을” 등의 대사는 온전히 옮겨 놨다. 

작품은 이런 세세한 부분뿐만 아니라 구조까지 재구축하는 과감한 시도에 나섰다. 재구축의 뼈대는 ‘과거와 현재의 연결’이다. 

원작은 다가올 비극을 예상하는 유모의 독백으로 막을 연다. ‘제주 메데이아’에서는 현대인의 복장으로 메데이아 책을 읽는 인물(홍진숙)을 가장 먼저 등장시킨다. 그리고 옛 그리스인 차림 두 사람을 반대쪽에 배치해 양쪽이 자연스럽게 줄거리를 주고받는다. 같은 무대 위에서 2400여년이란 시간의 간극을 잇는 영리한 연출이다. 등장인물과 배경, 주인공 이름의 어원까지 압축해 매끄럽게 설명하며 극 시작 전에 관객에게 정보를 알린다. 이후 책을 덮은 인물은 자연스레 천을 두르고 원작 속 유모로 변한다. 조명과 함께 몸동작, 목소리 톤에도 변화를 주면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고전의 매력이 있겠지만, 원작은 문장과 단어 등을 고려할 때 자칫 흐름을 이해하기 까지 꽤 긴 시간과 상당한 집중을 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제주 메데이아’는 마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진행을 통해 이해는 수월하고 흥미도 잃지 않는 멋진 시작을 만들었다.

시공간을 오가는 등장인물의 역할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2000년이 지나면 나아져요” 같은 대사와 메데이아의 만행에 책을 덮고 고민하다 다시 펼치는 행동으로 종종 무대를 환기시킨다. 그것은 과하지 않고 알맞은 순간을 택하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가 끝난 마지막에 들어 “2000여년이 지나도 무고한 아이들이 죽는다. 언제까지 이유 없이 죽어가는 아이들을 봐야 하나”라는 독백을 그의 입에서 나오게 설정하면서, 각색·연출자의 새로운 의도를 드러낸다.

원작은 복수에 사로잡힌 한 여인의 광기에 초점을 맞췄다면, ‘제주 메데이아’는 억울하고 무고한 운명을 피한 아이들과 돌이킬 수 없는 광기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 주인공을 조력자의 대사만으로 그려낸다. 이 같은 결말은 강렬함은 비교적 다소 무뎌진 느낌이다. 다만 분노한 여인은 남겨두되, 어머니까지는 버리지 말자는 방향으로 읽힌다. 최근 벌어진 이태원 핼러윈 참사와도 맞물리며 여운을 남긴다.   

이런 고유한 해석과 함께, 작품 구석구석에 등장하는 아이디어, 혹은 재치들은 관객을 끝까지 집중시킬 수 있게 만든다. 메데이아가 조력자에게 확실히 약속을 지키라고 맹세를 구하는 장면은 음악과 조명, 연기 장치가 어우러지며 흡사 메데이아가 대상을 사로잡는 고혹적인 매력을 연상케 했다. 자녀들을 살해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느끼는 연민의 정은 인형과 그림자를 활용해 감정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림자 장치는 이후 존속살해 장면에서도 사용된다. 코러스 연기자는 독살 현장을 재현하면서 기다란 천을 사용했다. 이 소품은 공주의 주검으로 분하며, 오열하는 크레온 왕의 감정을 어색하지 않고 적절히 드러내는 몸동작을 가능케 했다.

이처럼 유연하지만 가볍지 않은 각색을 독창적인 연출이 뒷받침하며 ‘제주 메데이아’는 관객의 시선을 내내 붙들어 놓는 촘촘한 작품으로 기억된다. 각색 겸 연출을 맡은 서민우, 황은미는 이번 작품이 첫 단독 연출이다. 그렇기에 더욱 공들여 만들고 싶었다는 소감을 전하기도 했는데, 그 말이 허언이 아님을 무대로 입증했다.

배우들의 연기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제주연극협회 제주소재연극 ‘섬에서 사랑을 찾다’에서 주인공 홍윤애를 연기하는 등 평소 비중 있는 배역을 소화해온 고지선은 내면의 불꽃에 휩싸인 메데이아를 훌륭하게 연기해냈다. 크레온 왕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호소하면서 하루의 시간을 얻어낸 뒤 보여주는 표독스러운 눈빛, 자녀들 숨통을 자기 손으로 끊어야 할 단계에서 느끼는 번민은 관객을 매료시키기 충분했다. 

남편 이아손을 연기한 조흠은 거만함과 여유, 분노와 절망을 온몸으로 보여줬다. 신제균과 신현종은 나이에 맞게 서로 다른 역할과 코러스역을 잘 소화했다.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홍진숙은 재발견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인상에 남는 연기력을 선보였다. 각색자의 시선을 몸소 나타내는 동시에 유모를 비롯한 코러스까지 소화하는 중책이었지만, 큰 탈 없이 수행하며 작품을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제주 메데이아’는 작품성만큼 외적으로 제주연극계에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바로 ‘협업’이란 가치다. 

이 작품은 고지선이 제주문화예술재단 예술창작활동 지원사업에 선정되면서 태동했다. 고지선은 현재 극단이나 단체에 속하지 않은 상태다. 그는 여성의 시선과 감정으로 메데이아를 풀어내기 위해 여성 연출을 물색했고, 서민우·황은미 두 사람과 접촉했다. 서민우·황은미는 현재 제주에서 ‘연극공동체 다움’이라는 극단을 운영 중이다. 극단 창단과 제주 이주 생활이 올해로 4년째를 맞는다. 그 동안 고지선과 작업한 사례는 없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첫 단독 연출인 만큼 보다 좋은 무대를 만들고 싶었던 욕심에 배우(조흠), 예술감독(우여진) 등을 자체 인맥으로 가동하며 역량을 쏟았다. 고지선 역시 홍진숙, 차선영 등 평소 가깝게 지내면서 특별히 극단 소속 활동을 보이지 않은 제주 연극인들의 힘을 빌렸다. 놀이패 한라산 무대에 오랫동안 서왔고 최근 들어 영역을 넓히고 있는 노장 배우 신제균까지 합류했다. 음악감독으로 제주 싱어송라이터 류준영도 더한다. 

30년 가까이 연극 활동을 제주 중심으로 보낸 개인(고지선)과 제주에서 새로운 예술 활동을 뿌리 내리는 신생 단체(연극공동체 다움)의 조합. 전자가 사업을 추진-성사시키고 주연을 소화했다면, 후자는 작품의 틀과 제작 전반을 담당했다. 어쩌면 접점이 마땅히 없는 파편적인 구성이지만, 작품만을 바라보고 모였다는 점에서 제주 연극계 안에서 흔치 않은 과정임에 분명하다.

고지선에게는 “작품에 참여하는 예술인들이 함께 고민하고 질문을 하고 답을 찾아가는 자유로운 창작을 해보자 했다. … 참여하는 예술인들이 협업을 할 수 있는 작품이 되길 기대했다”는 기획 의도처럼 자신 만의 무대와 예술을 찾고 구현하고 싶은 건강한 창작열을 품었다. 그리고 실제 작품은 의도대로 협업이 시너지를 발휘하며 고전의 참맛과 재해석 모두를 만족시키는 완성도를 갖췄다.

연극공동체 다움은 자체 공연, 혹은 타 공연에 배우로서 출연만이 아닌 연출·제작 분야로 영역을 넓혀간다. 그 말은 곧 제주에서 여러 모습으로 활동할 수 있는, 폭이 커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연극공동체 다움은 이미 지난 10월 말 동백작은학교의 풍경극 ‘고장난 바당, 부서진 돌 부스러기’ 제작에 협력한 바 있다. '제주 메데이아'에서 보여준 실력이라면 앞으로의 더 큰 제주 활동도 충분히 기대하게 만든다.

제주 연극계 활동은 극단-단체 중심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애초부터 독자 활동한 개인 창작이나 기획 초청이 나머지 소수를 차지한다. 상황에 비춰볼 때 ‘제주 메데이아’는 지역에서 새로운 창작의 길을 고민한 의미 있는 시도로 본다. 고전이라는 소재를 택했고, 동력의 근간이 여럿이 함께 자유로우면서 진지하기에 더 빛난다.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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