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104) 김준기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우산혁명으로 알려진 홍콩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들 네 지역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들의 평화예술운동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네 나라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 국적에 따른 언어가 제각각 달라 영어 일어 중국어 번역 원고도 함께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정정엽은 노동과 여성 그리고 생태라는 세 가지 의제를 중심으로 선명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예술가이다. 그가 이러한 주제를 껴안고 살아온 것은 1980년대 한국이라는 매우 특수한 시공간에서 시대와 호흡하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대학에 재학할 때부터 1980년대 한국미술계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던 민중미술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졸업과 동시에 그는 현장주의 미술동인 두렁 활동을 시작했다. 두렁은 현장미술의 장을 열어낸 미술동인으로서 걸개그림과 공동창작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창작원리를 개발해냈다. 이 과정을 함께 만들어나간 정정엽은 작업실을 꾸리고 공동창작과 개별창작을 병행했다.

1980년대의 진보적인 운동가들은 노동조합 건설을 위해 신분을 속이고 공장노동자로 취업해서 활동하곤 했다. 예술가들 가운데는 미술동인 두렁 멤버들이 공장 현장 활동을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창립 몇 년 후, 두렁의 주요 활동은 미술계 활동에서 현장 활동으로 변화했고, 정정엽도 공장에 들어가 위장취업 여공이 되었다. 공장에서 노동자로 살면서도 그는 창작을 해냈다. 그 어떠한 조건도 정정엽을 예술창작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지 못한 것이다. 그가 행동주의예술가로 평생을 살아온 것은 바로 이러한 현장 활동의 밑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렁의 활동은 예술운동만이 아니라 사회운동이기도 했다. 특히 노동현장 활동은 예술운동과는 거리가 먼 사회운동에 가까웠다. 사회운동가로서 현장에 투신한 정정엽은 예술 창작의 원천을 삶의 현장에서 얻어내는 자세를 몸으로 체득했다. 그것은 훗날 행동하는 예술가로서 살아나가는 데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일반적으로는 행동주의예술가들도 작업실을 자신의 공간적 배경으로 삼는다. 정정엽은 작업실이 아니라 노동현장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예술창작을 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정정엽을 일반적인 행동주의예술가들과는 다른 차원의 예술가로 성장하는 원천이 되었다.

공장 현장 활동을 마친 그는 결혼과 함께 작업실로 돌아왔다. 작업실의 정정엽은 생태와 여성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맹렬하게 창작을 이어갔다. 그는 여성들의 일상을 그려내는 것을 기본으로 그 속에서 발견하는 사물의 재발견을 통하여 여성성과 생태 의제를 일궈냈다. 그는 자신을 ‘살림의 화가’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말하는 살림은 주부가 가정을 꾸려나가는 살림살이라고 할 때의 그 살림이다. 그렇게 여성의 생활 정서와 사건으로부터 출발한 정정엽의 생태 서사는 동시대의 가장 빛나는 예술적 성취로 평가받고 있다. 

중섭미술상 수상기념전 전시 장면 / 사진=김준기
중섭미술상 수상기념전 전시 장면 / 사진=김준기

정정엽은 최근에 제34회 이중섭미술상에 선정되어 시상식 및 수상기념전을 가졌다. 이중섭이라는 위대한 예술가를 기리는 이 시상 제도는 조선일보라는 가장 보수적인 언론매체에서 운영하는 것인데, 정정엽과 같이 진보적인 예술운동을 해온 작가가 이 상을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그 예술적 업적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제 그는 한국 특유의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이분법적인 진영논리를 넘어서는 예술가로서 더욱 큰 행보를 할 수 있게 된 셈이다. 

곡식과 야채 등을 소재로 한 그림을 통하여 그는 생태적 관점의 우주적 서사를 펼쳤다. 식물들을 그려내기 시작한 정정엽은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상의 사물과 활동을 자신의 회화와 연결했다. 그것은 생명의 경이와 신비를 그려내는 데로 이어졌다. 특히 팥 시리즈와 같이 낱알의 곡식을 화면 전체에 그려내는 노동집약적인 작업을 통하여 생명의 거룩함과 이를 통한 우주적 차원의 신비를 담아내는 회화 작업을 이뤄냈다. 그것은 곡식 한 알 한 알에 담긴 생명의 서사와 그것으로부터 활동운화(活動運化)하는 우주의 순환원리를 담아내는 생명평화의 예술이다. 

정정엽의 야채 연작 / 사진=김준기
정정엽의 야채 연작 / 사진=김준기
정정엽,  지상의 양식,  1997,  캔버스에 유채,  130x130cm / 사진=김준기
정정엽,  지상의 양식,  1997,  캔버스에 유채,  130x130cm / 사진=김준기

# 김준기

홍익대학교 예술학 학사, 석사, 미술학 박사. 한국큐레이터협회 회장, 미술평론가.

전(前) 부산비엔날레 전시기획팀장,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제주도립미술관 관장,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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