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108) 토미야마 카즈미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우산혁명으로 알려진 홍콩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들 네 지역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들의 평화예술운동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네 나라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 국적에 따른 언어가 제각각 달라 영어 일어 중국어 번역 원고도 함께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타이라 코시치 전시회장 입구, 오키나와현립박물관·미술관 /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타이라 코시치 전시회장 입구, 오키나와현립박물관·미술관 /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오키나와현립박물관·미술관에서 지난해 11월 3일 시작된 전람회가 1월 15일 종료됐다. 그것은 타이라 코시치(1939-1994)라는, 일생 동안 오키나와 민중의 모습을 찍은 사진가의 회고전이었다. 

타이라의 사진은 미군 점령 하의 부조리에 시달리면서도 평화와 정의를 찾아 싸우는 민중을, 권력에 짓밟히는 슬픔에 이를 악물고 있는 민중의 표정을, 오키나와전 생존자들이 결코 치유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모습을, 경제발전의 혜택이 미치지 못하는 작은 섬에서 태풍과 가뭄이라는 자연의 어려움에 대치하며 사는 사람들의 도도함을 우리에게 전한다. 

타이라의 사진은 쓰라린 현세를 살아가는 섬사람에 대한 애정과 경외심으로 가득 차 있어, 그것이 전후 오키나와를 대표하는 사진가로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물론 타이라의 훌륭함은 주제뿐만이 아니다. 깊은 그림자와 돋보이는 빛이 가득한 이미지, 빛에 대한 감수성, 구도의 독창성, 피사체에 대한 독특한 거리감은 오키나와라는 맥락에서 떼어내도 충분히 작품으로서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타이라 코시치,  이시가키지마,  1972년,  의료시설이 없는 낙도에서는 간호사인 젊은 여성들이 헌신적으로 지역 의료를 지켰다. / 사진=오키나와현 공문서관
타이라 코시치,  이시가키지마,  1972년,  의료시설이 없는 낙도에서는 간호사인 젊은 여성들이 헌신적으로 지역 의료를 지켰다. / 사진=오키나와현 공문서관
타이라 코시치,&nbsp; 이시가키지마,&nbsp; 1971년,&nbsp; 태풍 피해에 시달리던 주민. / 사진=오키나와현 공문서관<br>
타이라 코시치,  이시가키지마,  1971년,  태풍 피해에 시달리던 주민. / 사진=오키나와현 공문서관

1994년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타이라는 생전에 모든 사진자료 20여만 점을 나고시에 기증했으며 현립미술관 소장품은 아니다. 현립미술관이 타이라 전시회를 개최하는 것은 처음이라, 많은 관심과 기대가 모였지만 현립미술관의 전시 기법에 대해 즉각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현립미술관은 이에 일절 대응하지 않고 생전의 타이라를 아는 사진가들을 중심으로 ‘타이라 다카시치전의 수정을 요구하는 모임’이 결성되었다. 그중에는 개최 전부터 현립미술관 학예사의 요청을 받아 여러 조언을 해 온 사람도 있지만, 결국은 그것이 무시되었다는 것을 회기가 시작되면서 알게 되었다. 이 모임이 현의회 의장이나 현지사에게 요청하기까지 사태가 확대되는 가운데, 전람회는 마지막 날을 맞이했다.

문제의 전시기법은 사진이 아닌 사진집의 거의 전 페이지의 확대 복사패널을 전시했다는 점이다. 이 <오키나와 - 백만 현민의 고뇌와 저항>은 1970년에 오키나와 혁신 공투 회의가 편집 발행한 것으로, 사진 촬영의 크레딧은 타이라 코시치 ‘외’라고 되어 있다. 현립미술관은 어느 것이 타이라(平良)가 찍은 것인지도 특정하지 않았다. 이 사진집에 이용한 타이라의 네거티브는 나고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는데 미술관은 그 네거티브에서 프린트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집 카피 패널 전시가 베스트 큐레이션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고뇌와 저항>은 당시 오키나와의 궁상스러운 모습을 사진으로 일본 본토에 알려 오키나와 반환의 기운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간행됐으며 게재 사진에는 각각 정치적 해설이 붙었다. 이 중에는 혼혈아 매춘부로 표시된 사진도 있어 현재 감각으로 보면 피사체의 초상권이나 사생활권과 관련된 인권침해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매춘부 사진 해설에는 기지 경제의 최대 피해자는 매춘부들, 본토 관광객과 현지인을 포함해 700~1500명이 있다고 한다. 

1970년대 초 성매매방지법이 생겼지만 기지가 있는 한 이들이 진정으로 갱생할 날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들에 대한 동정심을 가장하고는 있지만 갱생이라는 말을 꺼내는 쪽의 오만함, 약자에 대한 냉담함이 묻어나는 캡션이다. <고뇌와 저항>이 내포하는 여성 혐오를 지적하는 논자도 있다. 현립미술관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이 사진집을 타이라의 중요한 일 중 하나로 당당히 전시한 것으로, 그것은 기본적인 학술연구의 부족을 의미한다.

현립미술관에는 미술전람회나 학예사의 윤리라는 것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현립미술관이 천박한 작가 연구를 바탕으로 전시회를 구성해 더욱 인권 문제에 대한 둔감함을 드러낸 사건임은 명백하다. 나는 사진집 확대 카피의 전시가 예술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으며, 그것은 다분히 작가에 관한 ‘자료’와 ‘작품’ 자체를 구별할 수 없는 큐레이터의 능력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현립미술관은 큐레이션 지상주의를 방패삼아 수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잘라 왔다. 그것은 미술관의 권위라는 요새에 서 있는 구시대적 감각의 표현일 것이다. 

나는 미술관이 자주성·자율성을 잃으면서까지 관람자의 요구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현재의 미술전이라는 것이 다양한 언설의 엇갈림·반향·충돌하는 미디어(매개)라는 관점에서 현립미술관은 좀 더 건설적인 대응을 할 여지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현지 언론은 이 사건의 추이를 연일 보도하고 있다. 뜻밖에도 그것은 오키나와에서 미술관 큐레이션이라는 것이 사회문제로 인지되는 기회가 되었다. 타이라(平良)의 회고전은 미술관이라는 권력의 본연의 자세에 대해 무언가를 생각하게 해준다.


# 토미야마 카즈미

토미야마 카즈미(豊見山和美 TOMIYAMA Kazumi) 씨는 도쿄 소재 추오대학교와 류큐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영국 런던대학교 아카이브연구 석사과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오키나와현립공문서관의 아키비스트로 일하면서, 오키나와 전후사를 중심으로 문화평론을 하고 있습니다.


美術館という名の権力

豊見山和美

沖縄県立博物館・美術館で昨年の11月3日に始まった展覧会が1月15日に終了した。それは平良孝七(1939-1994)という、生涯を通して沖縄の民衆の姿を撮った写真家の回顧展だった。平良の写真は、米軍占領下の不条理に苦しみながらも平和と正義を求めて闘う民衆を、権力に踏みにじられる悲しみに歯を食いしばる民衆の表情を、沖縄戦の生存者たちが決して癒えることのないトラウマを抱いて生きる姿を、経済発展の恩恵が届かない小さな離島で台風や干ばつという自然の厳しさに対峙しながら生きる人々の気高さを、私たちに伝える。平良の写真は苦い現世を生きる島人への愛情と畏敬の念に満ちていて、それが戦後沖縄を代表する写真家と呼ばれる所以だろう。もちろん平良の素晴らしさは主題だけでない。深い影と際立つ光に満ちた画郭、光に対する感受性、構図の独創性、被写体に対する独特の距離感は、沖縄という文脈から切り離しても十分に作品としての力を示すものだ。

写真1  平良孝七展の会場入口 沖縄県立博物館・美術館 

写真2 平良孝七撮影 1971年 石垣島 台風の被害に打ちひしがれる住民 沖縄県公文書館所蔵

写真3 平良孝七撮影 石垣島 1972年. 医療施設のない離島では、保健師の若い女性たちが献身的に地域医療を守った。 沖縄県公文書館所蔵

1994年に55歳で世を去った平良は、生前にすべての写真資料約20万点を名護市に寄贈しており、県立美術館の所蔵品ではない。県立美術館が平良の展覧会を開催するのは初めてとあって、多くの関心と期待が集まっていたが、県立美術館の展示手法に対して即座に批判の声が上がった。県立美術館はこれに一切対応せず、生前の平良を知る写真家を中心に「平良孝七展の修正を求める会」が結成された。その中には開催前から県立美術館の学芸員に請われてさまざまな助言をしてきた人もいるが、結局はそれが無視されたことを会期が始まってから知ったのである。「求める会」が県議会議長や県知事に要請するまでに事態がエスカレートする中で、展覧会は最終日を迎えた。

問題の展示手法とは、写真でなく「写真集」のほぼ全頁の拡大コピーパネルを展示したことだ。この『沖縄-百万県民の苦悩と抵抗』は1970年に沖縄革新共闘会議が編集発行したもので、写真撮影のクレジットは平良孝七<他>とされている。県立美術館はどれが平良の撮ったものかも特定しなかった。この写真集に用いた平良のネガは名護博物館が保管しているが、美術館はそのネガからプリントするのでなく、写真集コピーのパネル展示がベストのキュレーションだと主張したのである。

『苦悩と抵抗』は、当時の沖縄の窮状を写真で日本本土に知らせて沖縄返還の気運を高めようという目的で刊行され、掲載写真にはそれぞれ政治的な解説が付いた。その中には「混血児」「売春婦」と表示された写真もあり、現在の感覚からすれば被写体の肖像権やプライバシー権に関わる人権侵害の指摘は免れない。「売春婦」の写真の解説には「基地経済の最大の被害者は売春婦たち」「本土の観光客や地元民相手のものを含めて700~1500人いるといわれる。70年代初めに売防法(売春防止法)ができたが、基地あるかぎり彼女らが真に更生する日はあるまい」とある。女性たちへの同情を装ってはいるが、「更生」という言葉を発する側の傲慢さ、弱者への冷淡さがにじみ出るキャプションだ。『苦悩と抵抗』が内包するミソジニーを指摘する論者もいる。県立美術館は、問題含みのこの写真集を平良の重要な仕事のひとつとして堂々と展示したのであって、それは基本的な学術研究の不足を意味する。

県立美術館には、美術展覧会や学芸員の倫理というものが欠けているように思う。県立美術館が浅薄な作家研究に基づいて展覧会を構成し、さらに人権問題に対する鈍感さを露呈した事件であることは明白だ。私には写真集の拡大コピーの展示に芸術的価値があるとは思えないし、それは多分に、作家に関する「資料」と「作品」そのものの区別がつかないキュレーターの能力の問題である。にもかかわらず、県立美術館はキュレーション至上主義を盾にとって修正を求める声を切り捨ててきた。それは美術館の権威という要塞に立てこもる旧時代的な感覚の表れだろう。私は美術館が自主性・自律性を失ってまで観覧者の要求に従うべきだとは考えないが、現在の美術展というものが多様な言説の交錯・反響・衝突するメディア(媒介)であるという視点から、県立美術館はもっと建設的な対応をする余地があったと思っている。地元メディアはこの事件の推移を連日報道している。図らずもそれは沖縄で美術館のキュレーションというものが社会問題として認知される機会となった。平良の回顧展は、美術館という権力のあり方について何事かを考えさせてくれる。


Are Art museums infallible?

TOMIYAMA Kazumi

 

An exhibition that opened last November 3 at the Okinawa Prefectural Museum & Art Museum(OPMA) ended on January 15. It was a retrospective exhibition of photographs by TAIRA Koshichi (1939-1994), a photographer who took the Okinawan people throughout his life. Taira's photographs depicted the people struggling for peace and justice despite the absurdity of the U.S. military occupation, the people gritting their teeth in grief at being trampled by the authorities, the survivors of the Battle of Okinawa living with the trauma that will never heal, and the people of a small remote island where the benefits of economic development have not reached, facing the harshness of nature in the form of typhoons and droughts. The photographs are filled with love and awe for the islanders living in this bitter world, which is probably why he is called one of the leading photographers of postwar Okinawa. Of course, Taira's excellence is not limited to his subject matter. His images, full of deep shadows and striking light, sensitivity to light, originality of composition, and unique sense of distance from his subjects are enough to show their power as works of art even when separated from the context of Okinawa.

Taira, who passed away in 1994 at the age of 55, donated all of his photographic materials (approximately 200,000 items) to Nago City before his death, and they are not the OPMA’s own collection. This was the first time for the OPMA to hold an exhibition of Taira's work, and much interest and anticipation was generated, but the OPMA was immediately criticized for its exhibition methods. The OPMA did not respond at all, and a "Group for the Correction of the Exhibition of Taira Koshichi" was formed mainly by photographers who knew Taira before his death. Some of them had offered various advice to the curators of the OPMA before the exhibition began, but in the end, they found out after the exhibition had begun that their advice had been ignored. As the situation escalated to the point where the group even made a request to the chairman of the prefectural assembly and the prefectural governor, the exhibition reached its final day.

The exhibition method in question was to display not photographs but enlarged photocopied panels of almost all pages of a "photo book. The book, "Okinawa: Suffering and Resistance of One Million Prefectural People," was edited and published by the Okinawa Reformist Joint Struggle Council in 1970, and the credit for the photographs goes to Taira <and others>. The OPMA did not specify which ones were taken by Taira. The OPMA insisted that the best curation was to exhibit panels of copies of the book, rather than print from the negatives which were in custody of the Nago City Museum.

“Suffering and Resistance" was published with the aim of informing mainland Japan of the plight of Okinawa at that time through photographs and to raise the momentum for the reversion of Okinawa to Japan, and each photograph was accompanied by a political commentary. Some of them were labeled "mixed-race children" and "prostitutes," which, from today's perspective, would be considered a violation of the human rights of the subjects' portrait and privacy rights. The commentary on the "prostitutes" photo states that "the biggest victims of the US military base- economy are the prostitutes" and that "there are said to be 700 to 1,500 prostitutes, including those who deal with tourists from the mainland and locals.”  Although the caption is intended to express sympathy for the women, the arrogance of those who speak of "rehabilitation" and their callousness toward the weak are evident in the caption. Some have pointed out the misogyny contained in "Suffering and Resistance”. The fact that the OPMA proudly displayed those pages of problematic photographs as one of Taira's most important works indicates a lack of basic academic research of the artist.

The OPME seems to lack the ethics of art exhibitions and curators. It is clear that the OPMA has organized an exhibition based on a shallow study of the artist and has further exposed its insensitivity to human rights issues. I do not believe that there is any artistic value in displaying an enlarged copy of a photo book, and this is probably due to the curator's inability to distinguish between the "material" about the artist and the "work" itself. Despite this, the OPMA has dismissed calls for correction under the guise of curatorial supremacy. This is a sign of the old-fashioned sense of the art museum's fortress of authority. While I do not believe that art museums should lose their autonomy and independence to comply with visitors' demands, I do believe that the OPMA had room to respond more constructively from the perspective that the current art exhibition is a medium in which diverse discourses intersect, reverberate, and collide.

The local media has been reporting on this incident day after day. Unexpectedly, it provided an opportunity for the curation of art museums in Okinawa to be recognized as a social issue. Through this exhibition, we think about the power, or the Myth of Infallibility of museums.

Photo 1.  Entrance to the Taira Koshichi Exhibition Hall

Photo 2. Photographed by Taira Koshichi, Ishigaki Island, 1971.  Residents devastated by typhoon damage, Courtesy of Okinawa Prefectural Archives.

Photo 3. Photographed by Taira Koshichi, Ishigaki Island, 1972.  In a remote island without medical facilities, young women public health nurses devoted themselves to protecting local medical care. Courtesy of Okinawa Prefectural Arch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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