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충민의 보·받는 사람] (14) 20대 후반, 신의 아들이 될 수 있었던 사연

‘강충민의 보·받는 사람’은 필자의 기억을 소환해 전하는 편지 글입니다. 새하얀 편지봉투 앞면의 아래위로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칸에 볼펜을 꾹꾹 눌러 누군가와 나의 이름을 써 넣던 ‘우리 시대의 편지’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공유하게 하는 코너입니다. 편지는 모바일 메신저나 인터넷 이메일로 소통하는 요즘엔 경험할 수 없는 공감의 통로입니다. ‘강충민의 보·받는 사람’은 풀이 없어 밥풀을 이용해 편지봉투를 붙여본 적 있는 세대들에게 바치는 연서(戀書)이기도 합니다.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가 그립습니다. / 편집자


고백하건대,  20대 후반 제 삶의 큰 목표는 제주탈출이었습니다. 

탈출이라는 어감이 주는 것처럼, 저는 그때 나고 자란 이 제주섬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건 단지 섬이라는 심리적 고립감보다는 저를 둘러싼 환경에서 도피하고 싶은 욕구가 더 강했다는 것이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지난 글에서 자주 인용했듯, 윤흥길의 “꿈꾸는 자의 나성”의 사내가 LA행 비행기 표를 매일 전화해서 알아보는 것처럼, 그때 저는 제주를 떠난 모든 곳은 제 나성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녁 8시 30분, 언뜻 제주에서 육지로 나가는 마지막 비행기를 더 이상 탈 수 없는 시간을 확인하면 혼자 조용히 절망하듯 중얼거리곤 했습니다. 

“아 오늘도 갇혔다!”

제가 사는 집에서 공항이 보입니다. 집 거실에서 공항을 바라보면 20대 후반의 제가 생각납니다. / 사진=강충민<br>
제가 사는 집에서 공항이 보입니다. 집 거실에서 공항을 바라보면 20대 후반의 제가 생각납니다. / 사진=강충민

중랑구 면목동 하XX 제과점이 첫 나성이었습니다

“꿈꾸는 자의 나성”에서의 사내는 정말로 LA행 비행기표를 끊고, 나성으로 갔는지는 결말에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매일 저녁 비행기표만 알아보던 그 사내와는 달리 제 나성을 향해 드디어 제주탈출을 감행했습니다. 제주그랜드호텔(지금의 메종글래드호텔)에서의 만 4년 호텔리어를 마무리하고 제과, 제빵을 배운다는 확실한 목표를 세운 뒤 항공권을 끊고 서울 중랑구 면목동 하XX 빵집에 취직했습니다. 

아침에 식빵이 나오려면 새벽 네 시부터 일해야 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감미로운 빵 꿉는 향에 가슴 뛸 거라는 애초의 설렘을 느낄 새도 없이 제빵의 노동강도는 무척이나 빡셌습니다. 첫날 새벽부터 모든 설거지를 도맡아 했고, 틈틈이 다음의 빵틀에 기름을 바르고, 정신 없었습니다. 공장장이라고 부르는 제과장을 제외하고는 다 저보다 나이가 어렸지만 그건 별 상관없었습니다. 육체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재미있었습니다. 

첫날 오후에 공장장님이 몇 가지 빵의 오븐 윗불, 아랫불의 온도와 시간을 알려주었고, 전 그대로 오븐에 넣고 꺼냈습니다. 200도 가까운 오븐에서 시간에 맞춰 재빨리 꺼내느라 잠깐 사이에 그것에 스쳤는데도 양쪽 팔목에 선명하게 일자로 화상 자욱이 생겼습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그렇게 그때 제 나이 스물 여덟, 서울 생활은 시작되었습니다. 몹시 더운 7월이었습니다.

3주가 지나갈 무렵부터는 거의 모든 빵과 과자의 오븐 온도와 시간을 맞출 수 있게 되었고, 공장장 바로 밑의 부공이 되어야 알 수 있다는 배합표를 공장장이 자주 알려주었습니다. 노트에 깨알같이 그걸 적었고, 외우는데는 일가견이 있는 저는 그닥 어렵지 않았습니다. 뜨거운 주방의 열기에 숨막힐 듯 하다가도, 잠깐 잠깐의 짧은 휴식시간, 상가 계단에 앉아 서울의 풍경을 바라보며  ‘아 이제 나도 서울시민이 되어가고 있구나.’ 뿌듯했습니다. 

내 신(神)아들이 되면 잘 불려주마

애석하게도 면목동 생활은 한 달을 넘기고 끝이 났습니다. 빵집의 주인은 따로 있었는데, 통째로 가게를 넘기면서 주방 인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공장장은 새로운 가게에 부공과 같이 간다고 하면서, 제게는 조금만 기다리면 부르든지, 다른 빵집을 알아봐 준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건 그게 언제가 될지 기약이 없으며, 저는 서울에서 갈 곳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난생 처음 고시원엘 갔습니다. 우선 갈 곳이 없었고, 비용을 한 푼이라도 아껴야 했고, 당분간은 서울에서 버텨보기로 했습니다. 내 한 몸 겨우 들어가는 좁은 방안은 옆으로 모로 고개 돌려 누울 때마다 얇은 합판 벽을 마주했습니다. 그 합판 벽과 내 눈의 사이는 채 30 센티 미터도 되지 않아 오래 된 얼룩진 벽지의 번진 자욱이 마른 버즘처럼 제 눈앞에서 어른거렸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제가 있는 방 쪽으로 작은 창문이 있어 밖을 내다볼 수 있었고, 이따금 김밥 한 알을 창틈에 올려두면 배고픈 비둘기가 와서 저를 두려워하지 않고 천천히 먹고 갔습니다. 

김밥을 사러 나갔다 오는 것 이외에는 고시원 좁은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사흘만에 외출을 했습니다. 딱히 갈 곳도 마땅치 않아 전철을 타고 종로서적에 들어갔습니다. 

한 때 등단을 꿈꾸던, 제 가슴을 뛰게 했던, 신춘문예 당선작품집을 꺼내 읽다가 신간 도서를 발견했습니다. <어디 용한 점쟁이 없나?> 짙은 밤색 표지의 책 제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찬찬히 그것을 읽다가 그 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한 곳을 직접 찾아갔습니다. 

책에 나와 있는 주소대로 기와집 안으로 들어가자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현관에 신발을 벗고 간신히 거실 한 켠에 겨우 몸을 좁혀 앉았습니다. 비로소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제 맞은편 벽 쪽에 물고기 몇 마리가 인공 수초 사이를 지나며 헤엄치는 거실 크기에 비해 지나치게 큰 유리수족관이 생뚱맞았습니다. 보글거리며 포말을 일으키는 산소발생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상담을 다 마쳤는지 아주머니 한 분이 거실로 나왔고, 그 사이로 한복을 곱게 입은 보살님이 신당 안에 있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때 그 보살님과 제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보살님이 방안에서 일어서더니 저를 불렀습니다. 

“어, 아들! 얼른 들어와. 밖에서 기다렸어? 그냥 들어오지...”

얼떨결에 쭈뼛거리며 일순 저를 바라보는 거실에 있던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며 신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켜 놓은 수많은 촛불의 온기로 방안은 후텁지근했고 신당 가운에 하얀 수염이 길게 난 할아버지가 모셔져 있었습니다. 양 옆으로 날카로운 금속 재질의 창이 쌀가마니 가운데에 꽂아 놓여 있었습니다. 쌀과 방울, 엽전이 놓인 상을 마주하고 앉았을 때 보살님이 지극하게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나지막히 제게 이야기했습니다. 

“너, 내 신아들 되면 내가 잘 불려주마.” 

정말 딱 그 말밖에 하지 않았고, 저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날 저는 다음 손님부터 보살님이 점사를 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다리가 저리면 코에 침을 몰래 발라가며 그렇게 옆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열 명도 더 넘는 사람들의 점사가 끝나는 저녁까지 꼼짝없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정말 신끼(神氣)가 있어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저는 그날부터 바로 그 분이 시키는 대로 엄마라고 불렀습니다. 고시원에 있던 제 옷가지들은 그 집에 가져와 2층  방에 두었습니다. 마치 예정이 되어 있던 것처럼, 아무 의심도 없이 그렇게 그 분의 예비 신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점을 치는 그 분의 옆에 늘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어쩌면 제주탈출을 꿈꾸며 나의 나성 서울로 왔던 것도, 면목동 빵집에서 한 달 일하고, 갑자기 길을 잃어버린 것처럼 어긋나 버린 것도 이 보살님, 즉 신어머니를 만나기 위한 운명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간혹 꿈을 꾸면 다음 날 들어맞는 것도, 갑자기 한 달 만에 빵집이 팔려 오 갈 곳 없는 지금의 이 시련도 모두 내가 앞일을 내다보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을 했었는 지두요. 아니 어쩌면 지독하게 제주탈출을 감행하여 제 나성인 서울에 왔지만 불시착으로 끝내기에는 너무 허망하다는 마음이 강했다는 것이 그때 제 정확한 마음이었겠습니다. 

수많은 기도처를 다녔습니다. 일주일에 3일만 손님을 받던 그 점집은 다른 날은 기도발이 좋다는 곳으로 갔었는데 저도 역시 따라갔습니다. ‘아 무속인이 이렇게도 많구나,’ 처음으로 알고 놀랐습니다. 저보다 훨씬 나이 어린 이부터, 흰머리 날리는 나이 많은 사람들까지 갔던 기도처마다 좋은 기운을 받으려는 무속인들이 참 많았습니다. 태백산을 갔었고, 계룡산, 남산, 오대산, 설악산, 대구의 팔공산까지 수많은 산과 굿당을 갔습니다.  

그 분은 그런 곳에 가면 가끔 제게 무엇이 안 느껴지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편안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 생각없었습니다. 

그 분은 자신의 친한 무속인들의 모임이나 집에도 저를 자주 데리고 갔습니다. 그 분들 앞에서 유독 저를 잘 챙기고 약간은 호들갑스럽게 “우리 아들!” 하면서 저를 불렀습니다. 인천과 서울 구로동의 점집을 놀러 가서 그분들과 같이 밥도 먹었습니다. 

방울과 부채를 흔들다가 휘파람을 “휘이익”하고 불고, 엽전을 상에 던지고, 쌀을 집어 숫자를 세며 점을 치던 예비 신엄마는 어느 날부터는 손님의 점을 치면서 옆에 앉아 있는 제게 생각나는거 없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신엄마가 했던 말을 거들기만 했습니다.

사진=오마이뉴스
사진=오마이뉴스

하루는 50대 초반의 아저씨가 사업 문제 때문에 왔다고 했습니다. 

갑자기 말이 하고 싶어졌습니다. 상담 온 그 아저씨의 사업이 아니라 그 분의 아들이 생각났습니다. 

“아드님이 계시네요. 대학을 서울에 못 가고 분교를 갔어요. 아드님은 그 학교에 흥미가 없어요. 연극영화과를 가고 싶어하는데 못갔어요.”

순간 나온 제 말에 아저씨가 놀란 얼굴로 저를 봤습니다. 제가 뱉은 말에 제가 더 놀랐습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아저씨가 저를 보고 나지막하게 비로소 한 마디 했습니다.

“아! 선생님 어떻게 그걸 정확하게...”

아저씨가 돌아가고 난 뒤, 예비 신엄마는 제 볼을 살짝 꼬집으며 “이뻐 죽겄어, 우리 아들 이뻐 죽겄어.” 했습니다. 

손님 안 받는 날, 예비 신엄마는 외출을 했고 저 혼자 거실에 있다가 설핏 낮잠이 들었습니다. 짧은 꿈을 꾸었습니다. 물 속에 대여섯 살 먹은 노란 윗옷을 입은 남자아이가 가지런히 누워있었습니다. 제가 아이를 물속에서 안아 올리려는데, 꿈결인지 현실인지 “쾅쾅쾅” 철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덜 깬 잠에 대문을 열고 선생님 안 계시다고 했는데, 젊은 아주머니 한 분이 기어이 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저를 보며 조용히 얘기했습니다.

“선생님 뵈러 왔어요.”

상을 마주하고 앉았습니다. 저는 잠이 덜 깨어 몽롱했는데 상위에 있던 다섯 색의 오방기 중에서 좀 전에 꿈에 보았던 아이가 입었던 색깔과 같은 노란색을 꺼내 들었습니다. 아주머니를 지긋이 보았습니다. 

“이 노란색 아시죠?”

젊은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고 울고 있었습니다. 저도 눈물이 났습니다. 그렇게 서로 한참을 울었습니다. 

“엄마가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요. 엄마 잘못 아니에요. 그냥 사고에요. 애기는 좋은 엄마 만나서 그동안 행복했대요. 엄마가 힘들어하면 애기는 더 마음 아파해요.”

젊은 엄마에게 마음 가는 절에 가서 아이의 명복을 빌어줘도 된다고 했고, 힘들 때 또 오라고 했습니다. 젊은 엄마는 “선생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를 연신 하면서 나섰습니다. 

외출하고 돌아온 신엄마는 무슨 일 있었냐고 제게 물었고 저는 낮에 있던 일을 들려주었습니다. 신엄마는 환하게 웃으며 더 과하게 제 볼을 살짝 꼬집으며 “에구구 우리 아들 이뻐죽겄어. 이뻐 죽겄어” 했습니다. 그리고는 제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굿한대?”

제가 굿하라는 말은 안 했다고 하자 신엄마가 제게 처음으로 벌컥 화를 냈습니다. 

“야, 우린 땅 파먹고 사냐? 지금껏 옆에서 뭘 배웠냐?”

기분이 묘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하며 덜컥 겁이 났습니다. 앞으로의 제가 하는 말에 책임을 져야 하고, 기껏 제 느낌 하나로 사람의 미래를 말하고 돈을 받는다는 것이 무서워졌습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건 제가 제 스스로의 신끼(神氣)를 신뢰할 수 없는 것이 더 겁이 났습니다. 그래도 강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제게 무엇이 있어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요.

제 나성은 제주였습니다

그렇게 몇 일을 더 지나 그 점집에서 한달이 넘어가던 즈음이었습니다. 

정릉 국민대학교에서 조교를 하던 내 친구 윤정국을 신촌에서 만났습니다. 친구 정국이는 제게 서울에서 뭐하냐 물었고 고맙게도 언제든지 편하게 자기 사는 집에서 같이 살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밥을 사주었고 몇 번이나 꼭꼭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겠다 하고 헤어졌고 전철을 타기 위해 지하도로 내려가고 있었고 곧이어 열차가 진입한다는 안내방송이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에 사람들은 뛰기 시작했고 엉겁결에 저도 같이 뛰었습니다. 한 무더기의 사람들 틈에 섞여 전철을 향해 뛰기 시작하다 순간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아, 난 바삐 갈 데가 없구나. 서울에 집이 없구나...’

전 혼자 비켜서 벽에 기대었고 스르르 주저앉았습니다. 서러운 눈물 한 방울 흘렀습니다. 저는 서울특별시민의 한 자리를 차지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서울은 제게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순간 저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습니다. "아 내 집에 가고 싶다. 제주도 가고 싶다" 

그 길로 바로 김포공항에서 제주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한 시간 후 전 제주도에 내렸습니다. 저의 이십대는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여름 옷 몇 가지인 제 짐은 그 점집에 그대로 두고 왔습니다. 

제주공항에 내렸습니다.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제 나성은 제주였습니다. 서울착륙에 실패한 넋두리, 자책이 아닌 제가 태어나고 자란, 제가 뼈를 묻고 살아야 할 제주에 내렸을 때 설문대할망 품 같은 한라산을 바라보았을 때 그 품에 오롯이 안기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설 명절입니다. 

저는 이제 다시 20대 후반때처럼 자발적 백수입니다. 남은 생을 좀 더 재미있고 보람되는 어떤 일을 할까 고민하고 찾고 있습니다. 그 일은 길가의 도로정비사업일 수 있고, 어느 식당의 단기 알바일 수 있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제가 재미있고 즐기면 그만이니까요. 

설 명절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문득 이 글을 쓰고 나니 제게 앞일을 물어볼지 걱정이 듭니다. 또한 지금도 신끼(神氣)가 있는지 궁금하실 거란 생각도 괜히 듭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겠습니다. 저도 잘 모르니까요.

추신: 이번 쓴 편지의 내용에서 혹시라도 무속인을 비하하는 의도는 전혀 없으며, 지극히 제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썼음을 밝힙니다. 

2023년 1월 24일 강충민 올림


#강충민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했고, 대학원에서 국문학, 제주신화(설문대 할망)를 공부했습니다. 
글 쓰고, 요리하고, 운동하고, 좋은 사람과 얘기나누고, 제주의 자연을 좋아합니다.
호텔리어, 입시학원강사, 여행사팀장, 향토음식점 대표,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사 등 하고 싶은, 좋아하는 다양한 직업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최근까지 독서논술교실을 운영하다가 지금은 자발적 실업상태입니다. 
앞으로 많은 새로운 일이나, 즐거운 일, 의미있는 일을 할까 고민하고 있으며 소소한 일에도 행복을 찾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필요한 곳이면 어느 곳이든 갈 생각입니다. 

제주참여환경연대( www.jejungo.net )의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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