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왓 칼럼] 달라진 시민 의식, 기준도 달라져야

여기 강간 피해자 A씨가 있다. A씨는 자신의 집에서 남자친구로부터 동의 없는 성폭력을 당했다. 성폭력이 일어나기 한 시간 전, 남자친구는 “A씨가 자신을 충분히 사랑해주지 않는다”며 계속해서 고함을 질렀다. 늦은 새벽 남자친구를 진정시키고 잠에 들었는데, 남자친구가 A씨에게 계속해서 스킨십을 했다. A씨가 몇 번이나 “지금은 성관계를 하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계속해서 손으로 밀어냈지만, 남자친구는 싫다고 말하는 A씨의 몸을 꽉 누르고 강제로 성관계를 했다. 

이미 폭력적인 남자친구의 모습을 본 A씨는 ‘저항하면 맞거나 목이 졸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남자친구가 계속해서 팔을 붙잡고 “내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고 고함을 질렀기 때문이다. 화장품 선반이 쏟아지고 휴대전화가 마루바닥에 떨어졌다. A씨는 남자친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겨우 휴대전화를 찾아 “남자친구에게 맞을 것 같다”고 신고를 했다. 경찰이 도착해 남자친구를 집에서 내보낸 이후에도 A씨의 집에 다시 찾아와 현관문을 한시간동안 두드린 남자친구는 스토킹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며칠 후 A씨는 남자친구를 강간죄로 고소했다. A씨의 남자친구도 동의 없는 성관계를 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A씨는 결국 가해자와 합의를 진행했다. 가해자도 동의 없는 성관계였음을 인정했고, A씨 역시 가해자에 대한 처벌 의지가 있었는데도 왜 A씨는 결국 합의를 진행했을까.

 ‘동의 없는 성관계는 범죄’라는 것은 이미 시민 모두의 인식이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동의 없는 성관계는 범죄’라는 것은 이미 시민 모두의 인식이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강간죄의 구성요건과 현실

A씨는 “강간이었다는 것을 인정받는 과정이 너무 지치고 괴로울 것이라고 예상해서” 합의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현행 강간죄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를 처벌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계속해서 고함을 듣는 폭력적인 상황에서 A씨는 심신이 몹시 지쳐 있었고, 팔을 붙잡혀 강제로 당한 성관계에서도 ‘저항하면 맞을 수 있겠다’고 생각해 저항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건 이후, 가해자의 처벌을 위해 ‘저항이 현저히 불가능한 상황에서의 폭행과 협박’을 증언하는 것은 A씨의 몫이었다. A씨는 남자친구에게 맞기 전에 경찰이 도착한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맞지 않았기 때문에 강간이 아니’ 라고 판단될까봐 두려웠다. 이것이 A씨가 결국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포기하고 합의한 배경이다.

실제 일어났던 A씨의 사례에서 다룬 것처럼, 한국의 현행 강간죄는 폭행이나 협박이 있어야 처벌할 수 있다. 폭행이나 협박 역시 피해자가 현저히 저항이 불가능한 정도여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나는 성폭력 중 직접적인 협박이나 폭행이 있는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2019년 1월부터 3월까지 전국의 66개 성폭력상담소에 접수된 강간 상담사례 중 직접적인 폭행이나 협박이 없이 발생한 성폭력이 71.4%에 달했다. 

또한 한국성폭력상담소의 2021년 상담통계에 따르면, 성폭력 상담건수 중 20세 이상 피해자의 경우 직장 관계에 있는 사람에 의한 피해가 37.7%, 데이트 상대나 배우자 등 친밀한 관계에 있는 상대에 의한 피해가 11.8%였다. 2018년부터 2021년까지 매년 모르는 사람에 의한 피해는 10% 이하, 아는 사람에 의한 피해가 84% 이상을 차지했다. A씨의 사례처럼, 성폭력은 실제로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서 폭행-협박 없이 일어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강간죄에 대한 최근의 국제기준

2021년 UN 인권이사회는 두 건의 특별보고서, ‘여성과 여아에 대한 젠더기반폭력의 한 유형인 강간과 그 예방’, ‘강간에 대한 모범적 입법을 위한 입법모델’을 채택했다. 보고서에서는 국제형사재판에서 다루어졌던 전쟁 성폭력 범죄 사례를 다룬다.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에서 강간을 ‘강압적 상황에서 사람에게 저지르는 성적 유형의 신체적 침해’로 정의하고, 강압적 상황에는 위협 및 협박, 강요, 그 밖에 두려움 또는 자포자기를 노리는 유형의 강압을 포함하며 물리적 폭력을 입증하는 증거는 필요하지 않다고 강조한 사례,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재판소에서 동의 없음 자체가 국제형법에 따른 강간죄의 구성요건이라고 밝힌 사례를 소개한다. 

이 특별보고서는 “No means No” 원칙을 반영해 강간 조항을 2016년에 개정한 독일, “Yes means Yes” 원칙을 반영해 강간 정의를 바꾼 스웨덴의 사례와 같이 “강간 정의의 핵심에 동의 없음이 포함되도록 명문화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한국은 2002년 11월 강간 구성요건을 정의한 1998년 ‘로마규정’을 비준한 바 있다. 로마규정에서 다루는 강간에 대한 정의는 암시적으로 동의 없음을 포함하며, 위의 두 보고서에서도 오늘날의 인권 기준에 따라 ‘동의 없음’을 강간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건으로 포함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지난 1월 말, 여성가족부의 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에는 형법의 강간 구성요건을 ‘동의 여부’로 개정 검토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러나 법무부는 ‘관련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한국 형법에서 강간죄의 구성요건은 1953년 제정 당시의 것이 아직까지 쓰이고 있다. 70년 전의 기준으로 강간이냐 아니냐를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의 성폭력에 대한 인식은 이미 달라져 있다. 2019년 여성가족부에서 실시한 성폭력안전실태조사에서 일반 국민의 72.9%가 ‘피해자가 끝까지 저항하면 강제로 성관계(강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문항에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이미 시민들은 오히려 폭행이나 협박이 없더라도 강간이 일어날 수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 셈이다. 20대 국회에서는 10개의 ‘비동의 강간죄’ 형법 개정안이 발의되었으나 회기 만료로 폐기됐고, 2020년 8월 발의된 강간죄 개정안은 1년 4개월이 넘은 지금도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심사 중이다.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았음에도, 맞지 않아서 혹은 협박당하지 않아서 강간이 성립하지 않는 현재의 강간죄는 마땅히 처벌받아야 할 가해자가 처벌을 피해가게 하는 케케묵은 법일 뿐이며, ‘동의 없는 성관계는 범죄’라는 것은 이미 시민 모두의 인식이다. / 신현정 제주평화인권연구소왓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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