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태영호 의원의 무지와 거짓말

태영호(사진)가 4.3에 대해서 북한의 대학에서 받았다는 교육내용은 거짓말일 공산이 커 보일 수밖에 없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태영호(사진)가 4.3에 대해서 북한의 대학에서 받았다는 교육내용은 거짓말일 공산이 커 보일 수밖에 없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4.3사건은 명백히 북한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촉발됐다”, “북한 개입설은 역사적 사실이다”, “북한 대학생 시절부터 4.3사건을 유발한 장본인은 김일성이라고 배워왔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태영호 의원의 확신에 찬 이 발언은 참으로 황망하기 짝이 없다. 역사적 사실에도 반하기 때문이며, 무지와 거짓말이 배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적인 용어를 빌린다면, 이는 무책임한 궤변이요 선동에 가깝다. 해방을 전후하여 두드러진 제주인의 특질은 독자성 혹은 자주성이며, 이 발언은 이런 제주인의 존엄과 긍지를 유린한다는 점 때문에 그러하다.

한국현대사가 증언하듯이, 4.3을 전후한 남한사회에서는 1946년의 신탁통치 찬반을 둘러싼 좌우 충돌이 있었고, 동년 9월에는 ‘쌀과 자유를 달라’는 총파업과 탄압에 항의하는 격렬한 ‘10월 항쟁’이 있었으며, 동 10월에는 진보세력 탄압 속에 이루어지는 과도입법의원 선거 거부를 둘러싼 파행이 있었다. 이 사건들은 하나같이 전국을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럼에도 이들 사건에서 제주사회는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수동적으로 움직이거나 동요하지 않는다. 더욱이 과도입법의원 선거의 경우에는 좌익진영의 보이콧 결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주에서는 ‘항명사건’이라 칭할 정도로 이를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판단하여 선거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 미군정의 케리 대위(공보관)가 1946년을 회고하는 1947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육지와는 달리 제주도는 “시국에 대한 정당한 인식을 함으로써 여사(如斯)한 불행한 소요사건이 없었다는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라고 밝힌 것이 이를 보여준다.

1947년에 들어서도 남한사회 정국은 여전히 혼란 속에 있었다. 서울과 부산 등지에서 발생한 전국적인 ‘3.1기념대회’ 충돌(우익테러와 경찰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 발생)을 비롯하여 이 3.1기념대회에서의 경찰 발포에 항의하는 ‘24시간 3.22 총파업’(다수의 사상자 발생), 5월의 ‘메이데이 기념행사’(다수의 검거·투옥, 민간인과 경찰 사상자 다수 발생)와 ‘7.27투쟁’(9명이 사망하고 80명이 부상당하거나 체포), ‘8.15해방 2주년 기념대회’(미군정은 학살 28명, 검거·투옥 1만3769명, 중상자 2만1000여 명이라고 발표) 등의 사건이 있었고, 전국적으로 유혈사태가 야기된다. 

그러나 제주에서는 ‘경찰의 일방적인 검거’ 외에는 주목할 만한 규모의 시위나 충돌은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8.15해방 2주년 기념대회’ 당시에는 제주의 진보진영측이 우익측에서 ‘좌익이 파괴공작, 테러행위를 준비하고 있다는 모략’이 있을 수 있으니, 이런 ‘악질적인 모략에 악용되지 않도록’ 신중한 처신을 하도록 신신당부까지 한다. 경찰이 박경훈 전 제주도지사를 비롯한 다수의 인사를 체포하지만, 며칠 후에 곧바로 석방시킨 것이 이를 보여준다. 제주는 중앙의 동향에 부화뇌동함이 없이 자주적으로 대응하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또한 1948년 들어서 단독선거를 반대하며 전국적으로 일어선 4.3 발발 2개월 전의 ‘2.7구국투쟁’의 경우에도 전국적으로 총파업으로 인한 중요 산업기관, 교통기관, 통신기관에 대한 파괴와 파업, 동맹휴업 등의 스트라이크(strike, 파업)가 단행되고, 군경에 의해 십 수 명이 살해되거나 8479명이 검거·투옥되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그러나 제주에서는 그런 규모의 파업과 충돌은 보이지 않는다. 일부 지역(함덕, 성산포, 사계리)에서의 충돌과 시위, 삐라 살포를 제외하면, 언론에서도 보도했듯 제주도는 “대체로 평온”했다. 제주는 육지의 동향과는 결을 달리 하고 있는 것이다.

미육군사령부 정보참모부(G-2) 일일정보보고(1948.2.14.)가 제주도는 2.7구국투쟁 이후의 시점에서 ‘조용’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나, <주한미군사>(주한미군사령부 편찬)가 제주의 2.7구국투쟁은 “2월에 발생했던 단순한 소요”라고 기록했던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처럼 제주도는 해방 직후부터 4.3 전야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한반도 정세 속에서도 외부의 지시나 동향에 몰주체적으로 부화뇌동하면서 추종했던 경우는 보이지 않는다. 다음에서도 보듯이, 오히려 제주는 선도적이었다. 

1948년 4월 19일부터는 통일정부 수립과 단선단정(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위한 남북연석회의(김구와 김규식 참석)가 평양에서 개최되고, 이에 응해서 5월 5일에는 남로당이 ‘남조선 단독선거 반대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이어서 5월 8일에는 전평(남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 ‘남조선 단독선거 반대 총파업’을 주도한 격동의 사건들이 있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이 중차대했던 1948년 4월~5월의 사건들은 하나같이 4.3의 뒷북을 친 형국이지 않은가? 육지에서는 남로당 등의 좌익진영이 5월에 들어서나 본격적인 단선단정 반대투쟁의 깃발을 올리고 있는데, 그 누가 이보다 앞선 4월에 제주에서 봉기를 일으키라고 지시할 수 있었겠는가?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강요배,   총파업의 관덕정 광장,   43.5x77.8cm,   종이·목탄,   1991.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이렇게 보면, 제주는 4.3을 전후하여 그 어떤 외부의 지시나 명령에 따르고 도움에 의지하기는커녕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행동하는 자주적인 원리를 관철시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주인의 이런 독자성·자주성은 최소한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강점기를 지난 해방 정국에서도 불변의 유전자처럼 작동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제주인의 존엄이고 긍지일 수 있을 터이다. 무슨 “북한 김일성의 지시”가 ‘명백히’ 제주인들을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태영호의 무지이자 궤변이 아닐 수 없다.

또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그가 ‘북한 대학생 시절부터 4.3사건을 유발한 장본인은 김일성이라고 배웠다’는 발언의 진위 여부이다. 북한의 대학교재를 전부 들춰볼 수 없으니, 아쉽지만 여기서는 합리적인 의구심만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그는 1962년에 태어났으니, 대학에 다닐 무렵인 20세 초반이면 1980년대 초에 ‘북한 대학생’이었을 것이다. 북한 외교관으로 성공할 정도의 능력자이니 재수나 유급 따위는 없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위키백과>에 소개된 그의 학력은 대략 다음과 같다.

1976년~1979년 북경외대 부속중고등학교 졸업(4년 유학).
1980년~1983년 국제관계대학(북한 외교관 전문대학).
1984년~1988년 북경외국어대학(영문학 학사).

그렇다면 1980년~1983년 무렵 북한의 4.3인식은 어떤 것이었을까? 박찬식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북한 사학계의 연구성과를 집약하고 있는 대표적인 역사학 저널 <력사과학>에는 4.3봉기에 대한 몇 편의 논문이 있다. 이 중 대표적인 논문(1965년, 1991년)에서는 4.3은 제주도민들의 ‘철저한 자주적인 원칙’에 의해서 전개되었고, ‘그 어떤 외부적인 원조의 힘’도 없이 ‘모든 것은 자체로 해결’했다며 4.3의 자주성을 지적한다. ‘김일성의 지시’에 대한 언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조선노동당 기관지인 <로동신문>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 신문은 1953년부터 1984년까지의 4월 3일자에 4.3사건에 대한 논설이나 관련 기사를 게재한다. 그러나 이들 글은 제주도민에 대한 학살 사실을 소개하는 정도에 머물고 있을 뿐, 이 또한 ‘김일성의 지시’에 대한 언급은 없다.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초의 <로동신문>도 4.3사건을 ‘학살만행 사건’으로 강조할 뿐, 마찬가지다. 더욱이나 1950년 말경에는 ‘김일성 사상의 영향’이라는 언급은 보이지만, 1960년대에 들어서면 ‘지시’는커녕 ‘영향’이라는 표현마저도 지워져버린다.

한편 4.3의 와중이었던 1948년 8월에 제주를 ‘탈출’하여 북한의 해주 인민대표자 대회에 참석하여 비판을 받는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도 4.3사건에 대한 보고연설에서 “제주도 인민들은 자연발생적으로 총궐기”한 것으로 발언할 뿐, 북한노동당이나 김일성에 대한 언급은 단 한 마디도 없다. 이는 <로동신문>(1950.4.3.)에 4.3사건에 대한 입장을 밝힌 남로당 중앙당 간부였던 강문석(김달삼의 장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제주출신의 한 좌익인사가 ‘4.3투쟁’은 육지에서의 동향에 추종함이 없이 “자의로 이탈해서 고립무원의 환경 가운데서 개시되었고, 고립무원의 환경 가운데서 적연(寂然)히 막을 닫게 되었다”고 회고한 것도 이를 보여준다.

북한의 문헌들이 4.3봉기에 대해 ‘지도부 전략 전술의 오류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비판한 것은 이를 가리킨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태영호가 4.3에 대해서 북한의 대학에서 받았다는 교육 내용은 거짓말일 공산이 커 보일 수밖에 없다. 필자의 무지도 있을 터이니, 이에 대한 태영호의 보다 상세한 답변과 가르침을 요구한다.

다만 그 어떤 경우의 답변이든, 이런 결론이 가능할 뿐이다. 그런 교육이 없었다면 ‘태영호의 거짓말’이고, 있었다면 ‘김일성의 거짓말’이라는 …. 75년 전 비극의 제주인들이 가지고 있던 그 불변의 유전자인 독자성과 자주성, 존엄과 긍지를 되돌아보기를 바라는 이유이다. / 이규배(전 제주4.3연구소 이사장)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