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315) 이른 이도 복, 늦은 이도 복

차고술금(借古述今), 옛것을 빌려 지금을 말한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으면 미래 또한 없지 않은가. 옛 선조들의 차고술금의 지혜를 제주어와 제주속담에서 찾는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MZ세대들도 고개를 절로 끄덕일 지혜가 담겼다. 교육자 출신의 문필가 동보 김길웅 선생의 글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 깃든 차고술금과 촌철살인을 제주어로 함께 느껴보시기 바란다. / 편집자 글


* 늦인 이 : 늦은 이(사람)

1971년 8월~10월 사이에 제주시 일도1동 산짓물 입구에서 어린 아이가 앉아있다. / 사진=이토 아비토, 제주학아카이브
1971년 8월~10월 사이에 촬영한 사진. 제주시 일도1동 산짓물 입구에 어린 아이가 앉아있다. / 사진=이토 아비토, 제주학아카이브

농사에는 작물에 따라 다 때가 있다. 씨를 뿌리거나 묘종을 옮겨 심음에 적당한 시기가 있는 법이다. 해마다 농사를 지으며 겪었던 오랜 체험이 경험칙으로 자리 잡는다.

다만, 농사는 하늘이 한다 한다. 농부가 아무리 애를 쓰고 흙에 매달려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더욱이 비 많고 바람 많은 제주 섬임에랴. 태풍은 8,9월에 온다고 하지만 절기상 대체로 그렇다는 것이지 딱히 정해진 게 없다. 섬을 휩쓸기 시작하면 끔찍한 강풍이 잇달아 두세 번이 오기도 한다.

늦게 파종한 작물은 태풍의 고비를 용케 넘기면서 풍작으로 이이지지만, 일찍 싹터 어느만큼 자란 작물은 바람의 피해를 비켜갈 수 없었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건질 건 아무것도 없다. 그야말로 폐허다. 철 지난 농사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 피해를 말로 할 수 있으랴.

구좌에서 당근 농사를 크게 하는 독농 후배가 있어, 체험담을 들은 적이 있다. 한번은 집안 사정으로 늦게 씨를 뿌렸다가 태풍을 비켜갈 수 있었다. 요행으로 풍작을 보아 큰돈을 벌 수 있었는데, 이듬해에 너무 일찍 서둘렀다가 비바람에 밭이 온통 쓸리는 통에 다시 재파종했다 한다.

농사는 한번 그르치면 끝까지 흔들리는 경우가 많단다. 한창 자라는 시기에 다시 강풍이 와 다 자라던 당근이 시들 맞는 피해를 입어 그 해 농사를 망쳤단다. 그때를 회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식 농사란 말을 곧잘 한다. 일찍 결혼해 낳은 자식이 잘되는 수도 있지만, 반대로 늦게 결혼에 느지감치 자식을 얻는 경우도 적지 않다. 50줄에 본 아이를 ‘쉰둥이’라 한다. 훌륭히 성장해 유능한 인물이 돼 부모를 기쁘게 하기도 하지 않는가. 쉰둥이란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이른 이도 복, 늦인 이도 복’

농사나 자식 농사는 이른 것도 복이고, 늦은 것도 복이 된다는 것. 그러니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함이다. 

농사와 자식을 연계시킨 착상이 흥미롭다.


#김길웅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 자리 ▲읍내 동산 집에 걸린 달락 외 7권, 시집 ▲텅 빈 부재 ▲둥글다 외 7권, 산문집 '평범한 일상 속의 특별한 아이콘-일일일'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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