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읍 목장 전경.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납읍 목장 전경.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납읍에 가고 싶었다. 그래서 갔다. 정헌(靜軒) 김용징(金龍徵, 1809~1890년) 선생 때문이다. 이는 연전에 미국에서 중국문학을 가르치는 선배가 추사와 김용징의 관계가 궁금하다는 메일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아직 완연하지는 않지만 화창한 봄날, 차롱의 벗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납읍하면 공무원, 교원, 박사 등 우리 사회에 필요한 많은 인재를 배출한 문향(文鄕), 양반 동네(반촌, 班村)라는 말이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다. 아니나 다를까? 마을 길가에 박사취득, 승진, 수상 등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가득 걸려 있었다. 한때는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지금은 응당 그러려니 한다. 제주 지역신문에도 언제나 한 면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사진과 축하의 발언 아니던가.

납읍하면 또 생각나는 것이 있다. 포제(酺祭)이다. 처음 제주에 와서 이것저것 제주 민속에 대해 알아보고 다닐 적에 동쪽 송당에는 여성들 위주의 당제(堂祭)가 있고, 서쪽 납읍에는 남성들 위주의 포제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굳이 여성과 남성을 가른 까닭이 참가자의 성별 때문이라는 것은 알겠으나 굳이 지금도 나눌 필요가 있겠는가 싶었다. 특히 포제는 유가식 제사이기 때문에 남성들만 참가한다는 말을 듣고 더욱 더 그러했다. 

포제는 아마도 《주례(周禮) 지관사도(地官司徒) 족사(族師)》에 나오는 “봄과 가을에 재해를 내리는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春秋祭酺)”는 말에서 나온 듯하다. 원래 ‘포’는 글자에 나오는 유(酉) 자에서 알 수 있다시피 술과 관련이 있다. 함께 모여서 술을 마시는 것이 본래 의미이다. 비록 흔히 쓰지는 않지만 포음(酺飮), 포회(酺會), 포연(酺宴)이란 말이 있다. 명사로는 재해를 가져오는 귀신의 뜻이다. ‘포제’의 ‘포’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포제’는 귀신에게 올리는 제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유가식 제사인가? 

물론 유가는 제사를 매우 중시한다. 특히 망자에 대한 제사는 유가의 제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의식이다. 그렇다면 유가는 귀신의 존재를 믿었나?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공자는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 다만 은주(殷周)시대의 문화를 따르겠다고 자처한 마당에 귀신에 대한 제사를 버릴 수 없어 고심한 끝에 나름의 묘안을 제시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경이원지(敬而遠之)’, 즉 “공경은 하되 멀리하라.”이다. 그런 까닭인가? 유학자들은 귀신을 믿는 것을 미신이라 여겼고, 심지어 미신을 혁파한다고 신당을 깨부수고, 그것을 그림으로 남겨 임금에게 자랑삼아 보여주려고 했다. 제주목사 이형상의 <탐라순력도> 가운데 건입포에서 임금의 은혜에 배례하는 그림 <건포배은(巾浦拜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헌 김용징 선생 기념비 / 사진=심규호
정헌 김용징 선생 기념비 / 사진=심규호

포제단은 납읍이 자부심을 지니기에 충분한 금산공원 안에 있다. 계단을 올라 약간만 걸어가면 왼쪽에 고즈넉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한옥 앞뜰에 세 개의 제단이 있다. 오른쪽에 가장 큰 것이 포제단이고 가운데는 마을을 지키는 지신(地神)을 위한 단이며, 왼쪽 작은 것은 마마신, 즉 홍역신을 모시는 단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신당과 어떤 차이가 있겠는가?           

잘 만들어진 목재 데크를 따라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다시 입구로 돌아나가는 길에 정헌(靜軒) 선생이 47세(1855년) 때 후학들과 시회(詩會)를 가졌던 송석대(松石臺)를 들렸다. 그곳에 금산공원 바로 옆에 있는 납읍 초등학교 1, 2학년 학생들이 쓴 시가 줄에 매달려 펄럭이고 있었다. <주희쌤>이라는 제목의 어린 아이 시를 읽으며 파안대소했다. 첫 번째는 제자 가운데 주희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주희(朱熹, 주자) 선생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희의 <애련(愛蓮)>의 제목을 빌어 <애사(愛師)>의 시라고 할 수 있는데, 사도(師道)가 예전만 못한 지금 선생님에 대한 아이의 진심어린 사랑 고백이라니. 이 어찌 감동받지 아니하겠는가? 

금산공원에서 발견한 납읍초 학생의 창작시 &lt;주희쌤&gt; / 사진=심규호
금산공원에서 발견한 납읍초 학생의 창작시 <주희쌤> / 사진=심규호

정헌 선생은 35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6년간이나 수학하였으니 벼슬길의 첩경을 따라 이제 곧 환로(宦路)가 환하게 열릴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어찌 40세(헌종 14년, 1848년) 한창 나이에 제주로 귀향하는 길을 택했을까? 환로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환달(宦達)에 뜻이 없었기 때문일까? 한 가지 실마리를 찾아보면 이러하다.  

조천읍 신촌리 사람 매계(梅溪) 이한진(李漢震, 1823~1881년)이 그를 만나 이런 시를 남겼다.

“밝은 달 그윽한 곳 청산에 안거한 기세 높은 이로다(明月幽閑地, 靑山偃蹇人).”

원래 ‘언건(偃蹇)’이란 단어는 그리 좋은 뜻이 아니다. 옆으로 넘어질 듯 삐딱하고 절름발이처럼 한쪽 발을 절며 느리게 걸으니 주로 교만하고 방자한 이를 묘사할 때 쓴다. 하지만 또 다른 뜻도 있다. 편안히 누웠다는 뜻의 ‘안와(安臥)’도 있고, 기세가 남을 능가한다는 뜻도 있다. 이 세 가지가 서로 다른 듯하나, 나름 어울리는 부분이 없지 않다. 기세가 높으면 때로 오만하다는 느낌을 주고, 남들이 다 좋아하는 벼슬길 마다하고 청산에 은거하려면 남들을 능가할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여야 한다. 이한진이 소동파의 시에도 나오는 ‘언건’이란 글자를 빼든 것은 탁월한 선택이다. 아마도 이한진은 추사를 찾아가던 길에 한적하고 아름다운 마을 납읍에서 청산에 은거하는 고매한 이, 정헌 선생을 만났을 때 범접하기 힘든 무언가를 느꼈을 터이다. 하지만 대나무 숲속에 바람 솔솔 부는 밝은 달밤, 이야기는 무르익고, 간간이 웃음이 피어나면서 절로 친해졌으리라. 마지막 구에서 “야심한 밤 솔바람 대나무 숲에서 담소하다보니 절로 친해졌네(夜闌松竹裏, 談笑自相親)”라고 읊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아마도 그는 스승인 추사를 만나 정헌 선생과 만난 이야기를 했을 터이고, 그렇지 않아도 제주에 고매한 인품에 글 잘 쓰는 이가 있음을 알고 있던 추사도 맞장구쳤을 것이다. 추사가 정헌 선생의 부친 김봉철(金鳳喆)의 비문을 써준 것도 나름 이유가 있을 듯하다. 

정헌은 제주의 세 군데 향교(제주향교, 정의향교, 대정향교)에서 모두 교수를 역임했다. 또한 《도유대연헌(屠維大淵獻)》(중국 고대 태세기년법[太歲紀年法]에 나오는 말로 도유는 12간지에서 기[己], 대연헌은 해[亥]에 해당한다. 따라서 기해년(1839년)에 처음 시집 제목으로 삼았다는 뜻이다)이라는 제목도 어려운 한시집을 남겼다. 시집에 수록된 시는 대략 250여 편인데, 모두 7언 배율(장률, 長律)이다. 보통 다른 이들의 한시집을 보면, 5, 7언 절구도 있고, 율시도 있으며, 간혹 배율이 있기 마련인데, 정헌 선생의 시집에는 절구나 율시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배율만 그것도 대부분 50구 이상이다. 당연히 근체시이니 압운이며 대우가 중시된다. 예로부터 배율에 능한 이로 이규보(李奎報)를 거론하는데, 문재를 자랑하기 위함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작시(作詩)가 쉽지 않다. 어설피 살펴보니 <송궁(送窮)>, <가사호(假四皓)>처럼 가난한 은거 생활의 모습이 보이는가하면 <횡삭부시(橫槊賦詩)>처럼 삼국지 조조의 이미지를 빌어 자신의 뜻을 언뜻 보인 시도 있다. 정헌형제회(靜軒兄弟會)에서 유고문집 《도유대연헌》(2015년)을 출간하여 다행이나 아쉽게도 번역이 되지 않아 필자 같은 보통 사람들이 접근하기 쉽지 않다. 적지 않은 비용이 들겠지만 번역 출간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를 들자면 한두 가지가 아닐 듯싶다. 

길을 따라 마을 한 바퀴를 돌다보니 이곳저곳에 비석에 제법 많이 세워져 있다. 주로 송덕비나 기념비가 많은 것은 다른 마을과 다를 바 없는데, 특히 김용징 선생의 기념비를 보니 새삼 반가웠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른바 조선시대 목사들 중에는 영 형편없는 이들도 적지 않아 송덕비라고 하여 정말 ‘송덕’의 실질이 있었다고 믿을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옆구리 콕콕 찔러 세우도록 했을 것이고, 후안무치하게 강제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송덕비에 이름만 마모되어 없어진 것도 있고, 아예 무너뜨린 것도 있다. 송덕비는 남은 이들이 떠난 이가 사무치게 그리워 그 큰 덕망과 위업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인데, 과연 그리 많은 이들이 그리 많은 업적은 남긴 것인지, 그리 많은 덕망과 위업을 갖추었는지 알 수 없다. 

태산석감당 / 사진=심규호
태산석감당 / 사진=심규호

젊은 부부가 경영하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씩 마시고 마을길을 따라 걷다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교차로 한 쪽에 자리한 이층집 문 옆에 서 있는 <태산석감당(泰山石敢當)>. 앗, 이건 뭐지? 

몇 년 전 타이완 펑후다오(澎湖島)에 갔다가 똑같은 글자가 새겨진 비석을 본 적이 있다. 사실 오키나와나 중국 푸젠성 일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종의 벽사비(辟邪碑)이다. 석감당(石敢當)은 서한(西漢) 시대 사유(史游)가 쓴 어린아이를 위한 습자교본 《급취장(急就章(급취편, 急就篇)》에 처음 보이는데, 과연 그 뜻이 무엇인지 해석이 구구하다. 석감당은 ‘태산석감당’이라고도 칭하는데, 태산석이 사악한 기운을 감당한다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옛날 중국 황제들이 봉선(封禪) 의식을 행하던 동악(東岳) 태산의 돌에 신묘한 기운을 부여한 셈이다. 원나라 도종의(陶宗儀)의 《남촌청결록(南村輟耕錄)》에 따르면, “오늘날 사람들은 집 문 앞이나 골목, 경계, 다리, 길 등 요충지에 작은 석장군(石將軍)을 세우거나 석비(石碑)를 심어 놓고, 그 위에 석감당(石敢當)이라고 새겨 재앙을 내쫓았다.”라고 하였으니, 그 연원이 상당히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납읍에서 보다니! 하마터면 초인종을 눌러 주인장에게 물어볼 뻔했다. 

이래저래 납읍은 많은 것을 보고 느끼도록 해준 멋진 마을이었다. 돌아오는 길 내내 즐거웠다.  / 심규호 제주문화포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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