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서북청년단 ‘후예’들에게 전하는 글 / 이규배 논설위원

‘소리시선’(視線) 코너는 말 그대로 독립언론 [제주의소리] 입장과 지향점을 녹여낸 칼럼란입니다. 논설위원들이 집필하는 ‘사설(社說)’ 성격의 칼럼으로 매주 수요일 정기적으로 독자들을 찾아 갑니다. 주요 현안에 따라 수요일 외에도 비정기 게재될 수 있습니다. / 편집자 글

스스로 서북청년단 구국결사대 대장이라고 칭하는 정함철씨가 지난 3일 4.3희생자추념식이 열리는 평화공원 인근으로 진입하려다 4.3희생자 유족들의 반발에 막혀 있는 모습.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스스로 서북청년단 구국결사대 대장이라고 칭하는 정함철씨가 지난 3일 4.3희생자추념식이 열리는 평화공원 인근으로 진입하려다 4.3희생자 유족들의 반발에 막혀 있는 모습.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지난 4.3추모일, 75년 전 제주를 피바람과 울부짖음으로 물들였던 서북청년단(이하 서청)의 ‘후예’를 자처한 단 3명이 도대체 무슨 심산인지 제주를 찾았다. “4.3의 역사가 왜곡됐다”고 주장하며, “오늘 무조건 이 자리에 서북청년단의 깃발을 꽂겠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무지(無知)’와 ‘무치(無恥)’로 뒤범벅이 된 그들이 아닐 수 없다. 과연 그들은 제주의 화강암에 새겨진 서청의 만행을 모르고 있을까?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 것인가? 대체 듣기는 할 것인가? 혹시 75년 전 서청 책임자들의 고백이라면, 사정이 다를 것인가?

서청의 2대 단장 문봉제의 고백을 보자. 그는 어느 대담(1989년)에서 “서청의 공과는 공반과반(功半過半)”이라고 밝힌 바가 있다. 그가 고백하는 ‘절반의 과오(과반)’는 제주도의 경우였다. 

“서로가 죽고 죽이는 상황에서 물론 무고하게 피해본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 우리는 어떤 지방에서 좌익이 날뛰니 와달라고 하면 서북청년단을 파견했어요. 그 과정에서 지방의 정치적 라이벌끼리 저 사람이 공산당이라 하면 우리는 전혀 모르니까 그 사람을 처단케 되었지요. 우린들 어떤 객관적인 근거가 있었겠어요. 그 한 예가 제주도 …”

약탈과 테러, 살인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른 서청 제주도위원장 김재능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이 “몇 사람한테 조종”당한 허수아비로 “도민을 살육의 함정”에 빠뜨리는데 이용당했다는 고백을 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75년 전, 서청이 제주에서 저지른 만행의 진실은 이 고백 속에 전부 담겨있다. 제주를 찾은 서청의 ‘후예’들은 자신들의 대선배인 이들의 회한에 찬 이런 자백을 알고 있을까? 서청의 책임자들이 ‘처단’이니 ‘살육’을 입에 올리고 있으니, 세상이 이를 모를 리가 있겠는가?

서청의 폭력적인 민낯은 굳이 원한에 사무친 제주인들의 증언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4.3이 종식된 뒤에 제주의 언론은 서청에 대해 “30만 도민 거의 전부가 원한을 품고” 있다고 단정하며, “그 이유는 제주도민인 한 설명할 여지가 없다”고 할 정도로 그 죄악상은 명백함 때문이다. 이는 숨길 수 없는 것이어서, 외지의 언론도 서청의 만행을 소상하게 전하고 있다.

한 언론은 “그놈들은 전 도민 27만 중 8만은 남로당원이라고 말하며 제주도의 청장년을 닥치는 대로 무단히 검거 구타하면서 민주진영의 지도자를 내놓으라고 족쳤다”라고 보도한다. 구체적으로는 “기금을 내라, 담요를 내라, 밥을 내라” 하며 “재산을 강탈하고 가축을 함부로 도살하며 만일 조금이라도 이에 응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죽도록 두들기고 부수고” 그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른 언론들도 이렇게 보도한다.

“각 부락에 침입하여 부락청년들을 납치하여 해변 또는 산으로 끌고 가서 총살 학살을 감행하는 동시에 방화, 파괴, 약탈, 강간, 가축 도식 등 갖은 야만적 난폭 행동”을 다하였으며, 혹은 “가택수색을 빙자하여 귀중품을 탈취하고 금품을 강요하며 불법구타 폭행은 끊임없이 자행 … 명령에 불복하는 자는 모조리 ‘빨갱이’로 지목되어 갖은 박해”를 받았다. “젊은 청년이란 그림자도 볼 수 없다”고 지적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 모든 패악질은 4.3이 발발하기 이전의 일들이었다. 결국 제주인들의 “원한과 분노는 속으로만 곪아” 들어갔고, 그 폭발이 제주의 무장봉기라는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언론이나 검찰도 이에 동의하고 있으니, 서청의 ‘후예’들도 이는 믿어도 됨직하지 않은가?

강요배,   서청입도,   77.8x54.0cm,   종이·콩테,   1991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강요배, 서청입도, 77.8x54.0cm, 종이·콩테, 1991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그렇다면 서청이 믿고 의지하던 미군정은 서청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을까? 미 정보당국은 서청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1947.6.3.)에서 서청은 “공산주의와 유사한 어떠한 단체에 대해서도 극도의 복수심 섞인 적개심”을 갖고 있으며, “반민주적이라고 의심되는 인사들에 대해 정력적으로 맹렬한 공격을 퍼부으며 빨갱이 사냥”에 매달리는 단체라고 지적한다. 게다가 그들은 “극렬행동을 서슴지 않고 벌이며” “좌익 혐의자들에 대한 테러행위를 계속”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미 정보당국의 예측대로, 1947년 말까지 서청은 전국의 곳곳에서 테러를 멈추지 않았다. 미 정보당국이 서북청년단은 “광범위하게 자금모금 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특정인이나 단체가 그들의 요구에 따르지 않으면 협박하고, 협박이 통하지 않으면 그때는 폭력을 행사한다”고 보고했던 것이 이를 보여준다. 4.3 발발 이전에 서청이 제주에서 저질렀던 만행은 이런 전국적인 폭력의 연장이었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미군정은 제주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까닭에 대해서도 둔감하지만은 않았다. 미군정의 딘 군정장관은 제주를 방문(1948.4.29.)한 뒤에 “주로 이북출신들인 경찰과 최근 제주도에 들어온 청년단체 회원-이들 또한 주로 이북출신으로 구성된 서북청년단원으로-에 대한 제주 도민들의 적개심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 사령관의 정치고문관 제이콥스가 “제주도민들은 분명히 모든 육지사람들을 싫어하며, 남한사람들이 싫어하듯이 북한 사람들에 대해 특별한 반감을 갖고 있습니다”고 보고했던 것도 서청의 테러리즘을 염두에 둔 지적이었다. 그만큼 미군정도 서청의 문제점을 심각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아예 미군정의 피터슨(중앙경제위원회 통계국장)은 “제주도에 주둔하는 경찰과의 최초 충돌은 다른 지방사람들을 경찰직에 임명하고 경찰을 지원하기 위해 서북청년단 청년들이 들어오면서 시작”됐다고까지 지적한다. 하물며 재선거(1949.5.10.) 이후 제주도를 시찰한 유엔한국위원단조차도 “서북청년단이 제주도에 나타나 공산주의자들과 그 혐의자들을 색출하면서 경찰과 협력하자 충돌이 시작”됐고, “경찰과 서북청년단이 공산주의 용의자들을 체포, 구타한 데 있어서 1948년 4월 반란의 무대로 화하였다”고 명쾌하게 지적한다. 서청의 폭력이 없었다면, 4.3도 없었다는 의미이지 않은가?

이처럼 서청의 테러가 제주사태의 원인이라는 인식은 미군정 관계자를 포함해 널리 공유되고 있었다. 문제는 이 무렵까지만 해도 서청은 공식적인 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제주도민의 희생이 발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만일 이런 천방지축 무분별하게 폭력을 휘둘렀던 서청이 1947년 3월 제주 입도 시부터 총으로 무장을 하고 있었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을지는 가늠하기 힘든 일이다. 이들이 휘둘렀던 폭력이 대부분 ‘구타’나 ‘고문’이었던 이유도 그나마 총으로 무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서청이 4.3 발발 이후에는 결국 공식적으로 총으로 무장한다. 이들이 군대와 경찰로 편제되기 때문이다.

이를 계획하고 지휘한 자는 미군사고문단 단장 로버츠 준장이었다. 1948년 11월 미군사고문단은 강경진압작전을 수행하던 “3개 대대를 주로 서북청년단으로부터 충원하려는 새로운 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이 계획은 이승만 대통령과 합의에 따른 것으로, 서북청년단원을 전국적으로 “경비대에 약 6500명, 경찰에 약 1700명 투입”하는 구상이었다. 이런 계획이 매우 무신경한 조치였던 이유는 미 정보당국도 이들 서청이 “폭력적인 반공산주의로 유명”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48년 12월에 들어서면 서청단원 약 620명이 경찰로 임명되어 제주도와 기타 지역에 배치되거나, 그 일부인 200명은 군인으로 경비대에 입대해 ‘은밀한 계획’ 속에 제주 제9연대에 배속된다. 이들이 총으로 무장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주먹과 흉기만으로도 잔혹한 테러에 물들었던 제주였다. 이로 미루어 이들의 총기 무장이 어떤 참극을 초래하게 될지는 충분히 상상이 되고도 남을 일일 것이다. 

서청이 경찰과 군대로 편제된 이후인 1948년 12월에 사망자가 최고점인 2974명에 달하고, 1949년 1월에 2240명, 1949년 2월에 671명 등, 대량학살이 자행된 시기와 일치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토벌대에 서청이 합류한 이후, 사태는 진정되기는커녕 극단적인 학살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서청의 무지막지한 폐해를 반증하는 것이 제주에서 서청을 철수시키는 계획이었다. 서청이 경찰과 군인으로 합류한 지 약 4개월 후인 1949년 4월,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는 이승만 정부에 “현재 1개 대대(가급적이면 제2연대의 서북대대)를 본토로 복귀시킬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는 논의 내용을 고지한다. 또한 “현재 제주도 경찰에 편입되어 있는 문제의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들을 본토로 복귀시켜 널리 분산시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내용도 포함한다. 

이런 서청 철수계획은 로버츠 스스로도 “과거의 경험에서 얻은 지식을 토대로 판단해 볼 때, 서북청년단의 행위는 서청과 제주도 주민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적대감의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로버츠가 군대와 경찰에 편제된 서청만이 아니라 “민간부분의 지위에서 (서청을) 철수시키는 것을 포함”한다고까지 밝혔던 것은 그만큼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했던 결과로 보이며, “최종적으로 주로 제주출신 사람들로 구성된 1개 대대만이 제주도에 잔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까지 밝힌다. 제주도에 있는 모든 서청을 “궁극적으로 철수시키는 방안”을 계획했던 까닭이다.

이처럼 미군사고문단의 서청 배척은 뒤늦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타당한 판단이었다. 워낙에 제주에서는 서청에 대한 원한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1949년 6월에 김용하 제주도지사가 주한미대사관을 방문하여 “서북청년단이 독단적이고 잔인한 태도로 제주도 주민들을 대하고 있으며 경찰국장도 이 단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더욱 사태를 악화”시켰다고 폭로하고 있는 것이 이를 보여준다. 김용하 도지사는 1949년 11월 초에도 미 대사관을 방문하여 거듭해서 서북청년단이 “여러 가지 말썽을 계속해서 일으키고 있다”며 서청으로 인해 “제주도의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고 고충을 토로한다. 

1952년 군 지프를 타고 제주도를 순시중인 이승만 대통령. 뒷줄은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 대장과 제1훈련소장 장도영 준장.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1952년 군 지프를 타고 제주도를 순시중인 이승만 대통령. 뒷줄은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 대장과 제1훈련소장 장도영 준장.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이처럼 1949년 4월 이후가 되면, 서청은 전면적으로 배척당한다. 특히 서청에 대한 미군의 이런 태도 전환은 서청을 자신들의 무기로 이용하던 이승만이나 미군사고문단장의 판단과 선택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미군 스스로 인정한 꼴이라 할 것이다. 그 야만스러운 무기가 버림을 받았으니, 천만다행인 토사구팽이 아닐 수 없다.

서청 단원으로 1948년 12월에 동료 250명과 함께 제주에 도착하여 경찰이 된 모 인사의 다음과 같은 항의성 증언은 그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대통령의 허락없이 어느 누가 재판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겠습니까? … 당시 서청 문봉제 단장은 이 대통령의 신임을 받던 측근 중의 측근이었습니다. 앞뒤를 가리지 않고 공산당을 없애야 한다는 명분 하나를 앞세워 현지 사정도 잘 모르는 대원들을 대거 투입한 것입니다. … 이 대통령이 ‘죽이지 말라’고 했으면 제주도에서와 같은 학살사태가 있을 수 있습니까? … 아무튼 학살의 총책임자는 이승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승만이 우리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 배후에는 ‘보이지 않는 손’ 미군이 있었으니, 어디 이승만만 그러했겠는가?

4.3 당시 제주는 언론에서도 보도했듯이, “착취층이 없다. 누구나 지주이며 또한 누구나 다 일꾼이다. 그들의 생활이 균등한 탓으로 언제나 평화경”이었으며, 때문에 “형무소가 필요없는 곳”이었다. 한 언론이 “무엇 때문에 제주도에 서북계열의 사설청년단체가 필요하였던가”라고 되물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서청의 테러리즘은 이미 예측이 되는 것이었고 그들의 헤아릴 수 없는 만행을 감안하면, 제주에 무지할 수밖에 없었던 서청을 이런 제주로 파견하고 그들을 이용했던 이승만이나 미국의 책임은 너무나 막중하다 할 것이다. 

4월 3일 서청의 ‘후예’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찾아가야 할 곳은 제주가 아니라, 이승만의 무덤이거나 미국 대사관이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정녕 제주를 찾는다면, 그건 참회와 화해를 위한 순례의 길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진실로 그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이규배 논설위원, 전 제주4.3연구소 이사장

4.3유족회의 설득으로 4.3평화공원에서 철수하는 서북청년회.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지난 3일 4.3희생자 추념행사장인 제주 4.3평화공원에서 철수하는 서북청년회 승합차량. 이들이 타고온 승합차량에 교회 선교를 위한 홍보문구도 보인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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