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안치환 ‘잠들지 않는 남도’를 다시 부르며 / 김봉현 이사·논설주간 

‘소리시선’(視線) 코너는 말 그대로 독립언론 [제주의소리] 입장과 지향점을 녹여낸 칼럼란입니다. 논설위원들이 집필하는 ‘사설(社說)’ 성격의 칼럼으로 매주 수요일 정기적으로 독자들을 찾아 갑니다. 주요 현안에 따라 수요일 외에도 비정기 게재될 수 있습니다. / 편집자 글

 

4월이 벌써 저문다. 눈부시게 아름다워야 할 제주의 사월을 어지럽힌 건 황사나 미세먼지만이 아니다. 김재원과 태영호, 그리고 서북청년단…. 슬픔을 아름다움으로, 분노를 화해와 상생으로 승화시켜야 할 제주의 사월을 오염시킨 부끄러운 이름들이다. 

아름다운 제주의 풍광 뒤편엔 민초들을 피로 물들였던 슬픈 역사가 우겨 넣어져 있다. 전체 제주도민 최소 10%가 희생된,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가장 인명 피해가 컸던 4·3이다. 국가의 폭력으로 자행한 양민학살의 역사다. 

‘악의와 무지’는 역사를 대할 때 철저히 배격해야 할 태도다. 김재원과 태영호, 그리고 서북청년단의 후예를 자처한 이들의 악의와 무지에도 제주4.3은 대한민국의 역사로서 분명히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 장중한 가락, 안치환의 ‘잠들지 않는 남도’ 

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녁의 땅 /
어둠 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
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 /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가수 안치환의 노래 ‘잠들지 않는 남도’다. 1987년 연세대 학생이던 안치환이 노래모임 ‘새벽’에서 활동하며 만들었고,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 2집 음반에 실려 대중들에게 익숙해진 노래다. 필자가 애착하는 노래이자 애창곡이기도 하다. 

노랫말은 직설보다 함축일 때, 서술보다 은유일 때 더 큰 힘을 갖는다. 안치환의 ‘잠들지 않는 남도’는 장중한 가락과 함께 제주4.3 양민학살의 서사를 비장하게 담고 있어 울림이 다르다. 특히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라는 구절은 4.3 희생자와 유족, 그리고 제주사람들의 아픔과 분노를 상징적으로 전하고 있다. 

안치환의 ‘잠들지 않는 남도’는 그동안 굴곡과 부침의 연속이었던 제주4·3 진상규명운동 과정에서 꼭 불리며 큰 힘이 되어 왔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면, 제주4.3엔 ‘잠들지 않는 남도’가 있다. 군사정권과 극우·보수 권력의 억압·왜곡에도 끈질기게 4.3을 추모하고 기억해온 제주사람들의 처절한 숨비소리 같은 노래다. 

  # 역사적 사실과 오류 

75년 전으로 거슬러 간다. 4.3 발발의 원년으로 삼는 1948년, 제주의 사월은 지금처럼 유채꽃으로 온 섬이 흐드러졌을까? 아니면 양민학살의 비극이 제주 섬의 유채꽃밭을 피로 온통 물들였을까? 

지난해 4.3 국가추념식에 참석한 김부겸 당시 국무총리도 “74년 전, 이 찬란한 남녘의 유채꽃은 선한 민간인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 냉전과 민족 분단의 혼란 속에서 제주도민 3만여 명이 무자비한 국가폭력에 목숨을 잃었습니다”라고 4.3희생자와 유족께 위로를 건넸다. 

약 2주 전 일이다. 100만 명이 넘는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어느 채널에서 제주4.3을 다루며, 4.3발발 전에 이미 제주 성산읍 일출봉 앞에서 일제의 강제 징용에 반대하던 독립운동가들을 일본 제국이 학살했고 그 흔적을 없애기 위해 박진경 대령(4.3학살의 주범)이 그 학살터를 유채꽃밭으로 덮었다는 어느 역사가의 발언을 우연히 듣게 됐다. 결론은 오류다. 

역사에선 ‘악의와 무지’만이 아닌, 사소한 오류라 할지라도 반복하면 사실로 오인될 수 있다. 그러니, 오류 역시도 경중과 관계없이 매번 바로 잡는 것이 역사를 대하는 옳은 자세다. 4.3이 발발한 1948년 이전에 제주에 유채꽃이 있었을까? 샛노란 유채꽃과 검붉은 피는 상상만으로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4.3양민학살이 단순한 은유나 수사가 아닌, 역사적 사실의 문제인 만큼, 오류가 있다면 바로 잡아야 옳다. 

그렇다면 오늘날 제주를 상징하는 꽃이 된 유채는 언제부터 제주에서 재배되었을까? 이 문제는 우선 석주명(1908~1950)을 살펴야 한다. 석주명 선생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나비 연구자이자, 생물학자이다. 

그는 1943년부터 1945년까지 경성제국대학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도 시험장(현 서귀포시 영천동 소재 제주대학교 아열대농업생명과학연구소)의 연구소장을 맡아 제주에서 생활했다. 이 시기 제주 곳곳을 답사하며 나비뿐만 아니라 자연·방언·인문 분야를 아우르는 학문적 연구로 제주도 방언집 등 제주도 총서 6권을 남겨 제주학 연구의 기초를 세우기도 했다. 

석주명 연구자인 이병철은 『석주명 평전』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당시 석주명은 자신과 같이 근무하던 서귀포시 토평동 주민 김남운 씨를 일본 경도대학에 보내 유채와 겨자씨를 각 1~2홉씨 가져다 시험 재배했다고 말이다. 그 이전에 제주를 다녀간 유배인들과 관료들이 남긴 숱한 문헌에서 유채에 관한 기록은 알려진 바 없다. 그리고 석주명 선생이 일본에서 시험 재배용으로 들여온 이후 2~3년 만인 제주4.3 당시에 온 섬에 유채꽃이 재배될 가능성이나 시간적 여유는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4.3과 한국전쟁 시기에 미군정이 제주도를 기록한 방대한 사진과 영상물 중 현재까지 제주 유채꽃밭 풍광이 담긴 자료가 알려진 것은 없다. 

  # 제주 유채  농사는 1956년 이후 

『제주농업의 백년』, 『제주농촌진흥 60년사』 등 제주농업 관련 자료와 기록을 종합해보면  1956년 일본에서 유채 우량품종을 도입해 증식한 것이 본격적인 유채 농사의 시작이다. 무엇보다 1960년대 이후 경제성장과 더불어 식생활 변화에 따른 식용유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유채기름(카놀라유)을 얻기 위한 적극적인 증산시책이 추진돼 제주에서도 본격적인 재배가 시작된 것이다. 정부의 높은 수매가격도 한몫했다. 1980년 제주지역 유채 재배 면적은 8150ha에 이르러, 당시 감귤과 함께 제주지역을 대표하는 소득 작물이 되기도 했다.

1983년 제주유채꽃큰잔치가 처음 개최된 이후 유채꽃은 제주의 봄 전령사로 상징됐다. 그러나 1990년에 들어서자 개방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값싼 원료 수입으로 유채 가격이 하락하면서 재배면적이 급감했다. 이때부터 유채는 관광자원용으로 특수재배돼 지금은 대부분 관광목적의 경관작물로만 유지되고 있지만 여전히 제주의 봄을 상징하는 꽃이다. 

지난 2018년 문재인 전 대통령은 4.3 제70주년 추념식에 참석해 "통곡의 세월을 간직한 제주에서 '이 땅에 봄은 있느냐?' 여러분은 70년 동안 물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께 제주의 봄을 알리고 싶습니다. 비극은 길었고, 바람만 불어도 눈물이 날 만큼 아픔은 깊었지만, 유채꽃처럼 만발하게 제주의 봄은 피어날 것입니다"라고 추도했다. 

4.3은 대한민국의 역사이고,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다. 4.3학살 당시에는 지천으로 흐드러진 유채꽃밭이 제주에 없었으나, 화해와 상승으로 승화시킨 오늘날 제주의 사월엔 온통 흐드러진 유채꽃밭이 모든 4.3희생자와 유족에게 깊은 위로를 전하고 있다. 

원통하게 숨져간 제주4.3 영령들이시여. 임들이 일궈내신 화해와 상생의 정신, 그리고 세월이 지나도 흔들리지 않을 정의를, 국민과 제주도민들이 함께 저 유채꽃처럼 아름답게 꽃피울 테니 한라산 자락에 편히 잠드시길. 두 손 모아 염원하나니. / 김봉현 이사·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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