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왓 칼럼] 노동, 그 거룩함에 대하여

민주노총 제주본부는 1일 제주시청에서 2023세계노동절 제주대회를 열었다. ⓒ제주의소리
민주노총 제주본부는 1일 제주시청에서 2023세계노동절 제주대회를 열었다. ⓒ제주의소리

‘노동은 거룩하다’

가톨릭 교회에 아주 오래된 수도공동체가 있다. 성 베네딕도(480~547)에 형성된 베네딕도회이다. 이 수도공동체의 수도 규칙으로서 자신들의 영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이 있다. “일하며 기도하라 (ora et labora)”. 1500여 년이 넘어가는 공동체의 영성에서 ‘일하며’라는 노동이 적극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종교는 자신의 신념을 확신하고 드러내며, 자신의 신념으로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을 그 신념으로 다시 단련한다. 그런데 종교적 행위와 전혀 별개일 것 같은 ‘노동’이 수도공동체의 핵심 문구의 절반을 차지한다. 이에 대해 베네딕도 수도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느님을 찾는 길 가운데 중요한 도구가 ‘노동’이며, ‘노동’은 물질을 대할 때 내적 자유를 주고, 올바른 규준을 정립하게 하며, 이웃에 대한 봉사이며 애덕의 실천이다.(참조 :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홈페이지 www.osb.or.kr) 이를 일반인들의 입장에서 필자가 해석해본다면, 노동은 자신의 삶을 올바르게 이끌어가는 삶의 자세이며, 물질적 가치에 매몰되지 않고 나를 자유롭게 하며, 물질적 가치에 대한 바른 생활 규칙을 만들어가며, 모든 사람들과 연결되어 모두 함께 인간답게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실천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크고 작은 ‘일’, 그리고 ‘일 함’을 통해 성취감과 보람과 존재감, 그리고 공동체성을 느낀다. 농장에서 과일을 수확하고, 그 결과로 과수원 통장에 찍혀 있는 숫자들은 그래도 일년 동안 내가 열심히 일했구나 하는 뿌듯함과 그간의 힘들었던 노동의 고달픔을 잊게 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얻은 첫 직장, 그리고 받은 첫 월급은 이제 세상에서 나의 수고를 인정해주기 시작했구나 하는 상징이 되고, ‘빨간 내복’을 부모님께 전하는 내 마음은 당당함으로 가득 차 있다. TV에 나오는 어느 음식점 사장님이 환히 웃으며 하시는 말씀, ‘내가 만든 음식이 누군가를 기쁘게 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

노동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쩌면 그렇게 거룩한 행위이다. 노동을 통해 사회를 사는 법을 배우고, 존재를 인정받으며, 당당해지고, 함께 서로 도와주며 살게 하니 말이다.

‘노동은 얼마이다’

1700년부터 태동하기 시작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가격이 매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임금은 어느새 비용이 되었다. 자본주의와 노동에 대한 여러 학계의 논쟁이 있지만, ‘노동’이라는 아주 깊고 의미 있는 가치가 결국은 단순한 화폐단위로 평가되며, 노동 자체를 그 화폐의 가격만큼으로 평가절하해버린 꼴이 되었다. 첫 월급으로 산 그 속옷은 그저 몇 푼 되지 않는 아주 흔한 속옷 상품 이상의 의미가 없다. 칼뱅의 직업 소명설은 ‘세상의 모든 일이 다 거룩하다. 그래서 결국 부를 많이 쌓아 성공하는 것이 신의 뜻을 더 잘 실천한 사람’이라는 주장을 내세운다. 화폐의 가치가 인간의 본질적 의미를 점령해 버렸다. 문제는 이 돈을 잘 벌기 위해서, 칼뱅주의에 의하면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서라도 어떻게 해서라도 돈을 더 잘 벌어야 했다. 그래서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자본가는 공장을 세우고 이익을 내기 위해 비용을 최대한 줄였다. 이는 자기 이익의 극대화이자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는 행위가 되어버렸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노동은 비용이므로 노동에서 노동자의 삶은 고려하지 않는다. 비용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는 노동의 의미가 크고 깊어지면 안 된다. 그저 물리적으로 시각적으로 성과적으로 보인 그 일 자체만 평가하여 그 비용만 지급하려는 것이다. 결국, 사람의 삶은 사라지고 상품의 생산만이 존재하게 된다. 둘째, 노동하는 사람들의 삶을 뒷받침하는 노동들이 무가치하게 평가되었다. 집에서 생계비용을 벌어오는 사람이 있다면 생계를 꾸려가며 그 사람과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로 인해 다시 노동하게 하는 에너지를 채운다. 하지만 그런 집안사람은 노동의 현장에서 직접 보이지 않는다. 결국, 집안사람, 그런 가사 노동은 노동의 가치 자체를 인정받지 못한다. 이를 지적한 것이 바로 이반 일리치의 ‘그림자 노동’이다.

자본가들은 얼마를 벌었는지를 통해 자신의 신앙(?) 또는 자신의 성과를 드러냈고, 노동자는 급여의 크기로 자신들의 가치가 얼마나 단순 가치 평가절하 되었는지를 깨달아야 했으며, 그림자 노동의 영역은 아예 가치는 고사하고 가격조차 얼마인지조차도 고려되지 않고 무시되었다.

현정부의 69시간 노동시간 논란은 그러한 맥락에서 참으로 단순한 논리 전개가 아닐 수 없다. 절대적 화폐의 크기를 늘리는 방식으로 노동의 시간만 노동의 가치로 규정하는 조건으로 삼는다. 생산과 재생산에 대한 고민은 애초부터 없는 듯하다. 한 번에 한껏 벌고, 한 번에 왕창 쉬자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그렇게 한껏 벌 수 있는 시간에 왜 왕창 쉬겠는가? 조금만 쉬고 가능하면 또 한껏 일해서 조금이라도 더 큰 급여를 받고자 하는 노동자들의 현실적 고민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당연히 기업은 적은 비용으로 왕창 일을 시킬 수 있으니 더 좋은 일일 것이다. 현실적이지도 않고, 퇴행적 논리를 노동정책이랍시고 내미는 정부가 참 딱하다 못해 한심스럽다.

사람들의 삶의 의미가 제거된 노동이 난무하는 시점에서, 제주에서 올 3월에만 산업재해로 세 분이 안타까운 목숨을 잃었다. 노동계에서 ‘위험의 외주화’, ‘죽지않고 일할 권리’ 등을 주장하고 중대재해처벌법을 강화하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여전히 산업안전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이는 노동자의 삶과 생명의 가치보다 기업의 이윤의 보호가 더 나은 가치로 평가 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공동체의 삶보다 화폐의 크기가 더 중요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상실감이 든다.

‘보다 가치 있는 노동을 위하여’

세계인권선언문 23조에서 노동할 권리, 24조에서 휴식과 여가의 권리를, 제3조에서 인신의 안전의 권리를 4조에서 속박상태에 놓이지 않을 권리가 선언되었다. 사람들은 노동을 통해 자신들의 인간다운 삶을 꾸려갈 권리가 있으며, 그 노동을 이어갈 쉼이 필요하고 그것이 권리라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자신의 생명이 안전해질 권리가 있으며, 어떠한 조건으로도 인간적인 삶을 억압하는 상태에 놓여 있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즉 가치가 있는 노동은 노동하는 사람들의 삶의 의미가 풍부한 노동일 것이다. 그렇게 노동은 인간이 보다 인간다워지는 필수적인 과정이 되며 중요한 가치가 된다. 어느 한 종교의 영성적 태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노동은 모든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길일 것이다. 가격이 아닌 삶의 가치가 더 드러나야 할 노동의 거룩함에 대해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 신강협 제주평화인권연구소왓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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