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71) 김석범, <바다 밑에서>, 서은혜 옮김, 도서출판 길, 2023.

“승지 동무, 산천단은 옛날부터 한라산 산신제를 올리던 곳이야. 뭐, 이거 이상한 이야긴가? 저 하늘을 뒤덮은 500~600년 수령의 여덟 그루 흑송 거목이 산천단의 수호신이고, 한라산 산신제의 제단이 있던 곳, 이방근 선생님은 자기 몸을 바쳐 희생물이 되신 거라고. 그래서 산천단에서 죽은 거지. 정세용을 죽인 것 때문이 아니야. 어이, 승지 동무, 정세용을 죽였기 때문에 산천단에 갔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곳은 신성한 장소라고. 정세용 때문에 거기까지 가겠어? 그런 쩨쩨한 짓은 하지 않아. 흥,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제주도 투쟁 패배의 희생이라고?”

— <바다 밑에서> 중에서


1.
제주문학관에서는 4‧3 75주년을 맞이하여 재일조선인 문학의 두 거장 김석범(1925~)과 김시종(1928~)에 대한 특별기획전이 3월 24일부터 열리고 있다. 주제는 ‘불온한 혁명, 미완의 꿈’으로, 해방공간에서 솟구친 평화적 통일독립 국가를 염원하는 제주 민중의 혁명적 실천이 두 거장의 삶과 문학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육화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 특별전 개막 후 4월 3일 김석범의 장편소설 <바다 밑에서>가 일본문학 연구자 서은혜의 치밀하고도 유려한 한국어 번역본으로 발간되었다. <바다 밑에서>의 번역 출간은 매우 반가운 소식이다. 김석범의 대하소설 <화산도>가 한국어 번역으로 2015년 완간된 후 김석범은 <화산도>의 후속작 <바다 밑에서>를 일본에서 집필하여 2020년 출간한바, 한국에서도 <바다 밑에서>의 전모를 한국어로 쉽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바다 밑에서>가 <화산도>의 후속작이듯, 김석범이 전 생애를 걸쳐 혼신의 힘을 쏟은 <화산도>에서 미처 다하지 못한 얘기가 무엇이며, 그것이 김석범 특유의 서사의 힘으로 어떻게 펼쳐나갔는가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이 뒤섞인 엔돌핀이 전신으로 퍼져나감을 숨길 수 없다. 

2.
<바다 밑에서>를 관통하고 있는 작가의 문제의식은 <화산도>의 대미에서 충격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자결한 이방근의 삶과 그 혁명적 실천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 및 존재론적 의미를 탐구하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산도>의 독자들은 한국문학사, 아니 세계문학사에서도 좀처럼 만나기 힘든 이방근이란 캐릭터를 이해하기 쉽지 않았을 터이다. 이방근은 제주의 친일파 유지의 아들로서 식민주의 시절 이른바 봉안전 사건이 단적으로 말해주듯 일제 식민주의 지배에 대한 민족주의적 저항을 행동으로 표출하여 옥살이 경험도 하고, 일본 유학 시절 사회주의 이념에 동조하기도 했으나 고향 제주로 돌아온 후 해방공간의 혼돈 시기에는 정치적 허무주의에 휩싸인 소시민적 지식인의 전형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다가 4‧3민중봉기를 직접 목도하면서 이승만과 미군정에 맞서 저항하는 무장대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은 채 민중봉기를 일으킨 제주남로당의 급진 모험주의 정치에 대해서는 냉철한 비판적 거리를 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근은 4‧3민중봉기의 대의를 인정하면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4‧3혁명을 실천한다. 가령, 4‧28평화협정을 무산시키는 데 비밀공작 활동을 벌인 경찰 정세용(이방근의 친척)을 직접 총살하고 무장대의 정보를 군경에게 팔아넘기고 밀항선에 승선한 유달현을 심문하여 결국 죽게함으로써 이방근은 4‧3혁명을 자신의 방식으로 실천한다. 특히 무장대로부터 반혁명분자의 비판을 감내하면서도 이방근은 도일(渡日)하는 밀항선을 통해 혁명의 패배자들의 생목숨을 살려내는 데 전념한다.

이방근의 혁명적 실천은 이처럼 어떤 뚜렷한 캐릭터로 확연히 붙잡을 수 없는 대단히 중층적 성격을 띤 작가 김석범이 창조해낸 유일무이한 인물이다. 이런 이방근이 끝내 한라산 중산간 산천단에서 총으로 자결한 것을 두고, <바다 밑에서>의 작중인물들(남승지, 한대용, 이유원)은 무척 안타까워하며 그 죽음과 연관된 의미를 곰곰 숙고한다. 

3.
사실, <바다 밑에서>는 <화산도>의 후속작이되, 엄밀히 말해, 이방근의 도움을 받아 밀항선을 타고 생존한 자들이 이방근의 죽음을 찬찬히 톺아보면서, 그들이 제주에서 겪은, “발산할 수 없는, 안으로 쌓여 얼어붙기만 하는 슬픔. 속으로 속으로 가라앉아 바닥에, 깊은 바다 바닥에, 무의식 속에 쌓여가는 슬픔”(14쪽)을 서로 위무하는 데 자족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어떻게 뚜렷이 응시할 것인지, 그래서 “죽음의 폐허가 된 제주도는 인간의 기억마저 허공 속 바람으로 사라지고 땅속 깊이 바닷속 깊이 묻혀, 섬은 영구동토가 되었고 ‘4‧3사건’은 기억과 함께 지상에서 사라”(10쪽)지려 하는 데 대해 어떤 저항과 기억의 정치를 구동해야 할지 살아 남은 자의 역사적 몫을 궁리하고 있다. 그것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석범이 힘주어 강조하듯, 해방공간에서 “한라산의 산부대는 참다운 조국, 통일을 위해 싸웠던”(256쪽) 그 역사적 진실을 쉼없이 천착해야할 뿐만 아니라 “제주도 사람들의 희생에 의해 우리는 살고 있다는 거”(240쪽)의 안팎을 휩싸고 도는 역사적 희생의 참다운 가치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방근의 죽음과 밀항선 운영이 함의한 이방근 식 4‧3혁명의 실천은 <바다 밑에서>를 통해 밀항한(할) 혁명의 패배자들이 일본 사회에 남아 분단조국‒제주에서 완수하지 못한 4‧3혁명을 어떻게 다시 이어갈 것인지 그 역사적 가능성을 음울하면서도 비장하게 그리고 낙천적으로 탐구하는, 그리하여 재일조선인 문학의 힘을 벼려낸다. 

이와 관련하여, 김석범의 소설에서 눈여겨볼 게 있다. 그것은 ‘조선적 체취’인데, 이것은 다각도의 측면에서 심층적 이해가 필요한 김석범 소설의 비의성을 함의한다. 그중 음식과 관련하여, ‘조선적 체취’는 바꿔 말해 ‘제주적 체취’라 해도 틀리지 않다. <화산도>뿐만 아니라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곧잘 목도되는 장면들이 있다. 바로 제주의 음식을 재일조선인들이 다 함께 먹는 장면이다. <바다 밑에서>의 경우 남승지와 그의 친척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데, 고향 제주에서 먹었던 음식들이 “각각의 냄새가 모여 식탁 위에 맴돌”(135쪽)면서 혁명의 열패자로서 목숨을 건져 도피해온 자괴감에 붙잡힌 혁명가 남승지의 심신을 위무해준다. 고향 음식의 냄새는 작중인물에게 퇴행적 역사로부터 짙게 배여난 식민주의(근대)와 그 역사적 피비린내를 일소해버림으로써 건강한 생명의 존재들이 만들어내는, 즉 해방공간에서 평화적 통일독립의 새로운 세상을 향한 4‧3혁명의 역사적 원동력을 만들어내는 제주민중의 냄새인 셈이다. 이것이 바로 김석범 문학에서 경이로운 서사의 재현을 이루는 ‘조선적 체취’이자 ‘제주적 체취’의 실재다.

4.
이제 남승지는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피폐한 영혼과 육신을 서서히 추스린다. 이것은 또 다른 혁명가 한대용이 산천단의 제단에 스스로 희생제의가 된 이방근의 죽음이 지닌 혁명의 역사적 진실을 깨우치는 대목에서 숭고하게 드러난다.

제주도를 다녀온 한대용의 혁명. 그것은 한대용이 패배, 무(無), 그 현실 위에 서서 감히 입에 담는 혁명이자 이방근의 유지였다. 증오, 복수심, 현지에서는 공포심에 눌려 적에 대한 증오, 복수의 마음조차 지닐 수 없지만 일본 땅에서는 자유다, 동굴의 자유. 그 자유 속에서 세 사람은 서로 이야기를 할 수가 있다. 혁명의 패배. 패배의 도망. 그래도 혁명, 한대용의 혁명은 힘을 주었다. 한일호를 한대용에게 양도한 것은 이방근의 자살 준비, 자살을 복수를 위한 죽음의 준비, 투쟁, 절망의 복수, 복수는 죽는 목숨의 부활. 죽은 자는 산 자 속에 산다. 돼지가 되어서라도 살아남아라. 그것이 투쟁이다. 도망쳐라. 항복하여 적의 개가 되지 마라.(484-485쪽)

이방근으로부터 밀항선 운영의 모든 것을 양도받은 한대용은 기실 이방근의 혁명을 실천한 것과 다름이 없다. 한대용은 이방근의 자결은 복수이며 부활이고 투쟁이라는 간명한 진실에 이른다. 돼지와 다를 바 없는 비루한 존재로서 또 다시 일본의 통치 아래 살아가야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4‧3혁명의 미완의 과제가 재일조선인 사회의 역사적 과업과 결코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작가는 자신의 소설쓰기의 소명으로 인식한다. 

그리하여 <바다 밑에서>의 결미에서 보이는, 4‧3혁명의 또 다른 열패자인 여성 혁명가 둘을 대마도에서부터 오사카로까지 안전하게 피신시키는 도정을 주목한 이유가 있다. “대마도는 한라산을 바라보는 산천단으로의 길….”(485쪽)에 압축돼 있듯(“대마도에 다가가는 것은 제주도에 다가는 것이다.”[487쪽]), 그 여성 밀항자들을 도피시켜야 할 임무를 떠맡은 남승지는 이방근 식 혁명을 실천하는 과업을 똑같이 실행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남승지는 토벌대에 잡혀 유방이 잘린 반인간적 성고문을 당한 제주여성의 증언을 듣는다. 그리고 남승지는 제주에서의 4‧3혁명은 지워버릴 수 없는, 다시 말해 이방근이 남긴 ‘죽은 자는 산 자 속에서 산다는’ 것이 상기시키는 4‧3혁명의 역사적 진실에 전율한다. 이방근 스스로 제주의 성소(聖所) 산천단에 자기희생을 통해 결코 저버릴 수 없는 혁명의 과제를 남긴바, 그것은 남승지와 같은 재일조선인이 일본 사회에서 4‧3민중봉기가 추구한 혁명의 과제를 망각하지 않고, 도리어 제국 일본의 내부에서 식민주의의 모든 악령과 유산에 맞선 저항과 복수를 실천하는 역사적 의지의 불꽃을 다시 지피는 일이다.

이렇게 <바다 밑에서>는 <화산도>의 후속작을 잇는 대단원을 내린다. 

김석범 문학은 살아 있다!


# 고명철

1970년 제주 출생.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1998년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에서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가 당선되면서 문학평론가 등단. 4.3문학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새로운 세계문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연구와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문학(문화)을 공부하는 ‘트리콘’ 대표. 계간 <실천문학>, <리얼리스트>, <리토피아>,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 역임. 저서로는 《세계문학, 그 너머》, 《문학의 중력》, 《흔들리는 대지의 서사》, 《리얼리즘이 희망이다》,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뼈꽃이 피다》, 《칼날 위에 서다》 등 다수.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mcritic@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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