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人터뷰] 제51회 어버이날 대통령 표창, 남원읍 김병수 어르신

“정부 표창을 받는다고 하니 큰며느리가 가문의 영광이라고 말해요. 어려운 환경에서 앞만 보고 가정에 충실하며 아이들 키우고 그렇게 살아왔는데 좋게 평가해줘 감사할 따름입니다. 잘 자라준 아이들 덕분에 이런 상도 받게 된 것 아닐까 싶네요.”

제주4.3 당시 집이 온통 불에 타버리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형님은 예비검속으로 끌려가 희생당했다. 집안을 휩쓸고 간 광풍 때문에 성인이 되자마자 가장이 돼 앞만 보고 살아왔다. 

다른 곳보다 일찍 감귤 묘목을 들여와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부모님을 모시고 살며 결혼해 아이들도 낳았다. 안정적인 수입을 가져다주는 ‘대학나무’ 덕분에 아이들은 학교를 무사히 다녔고, 아버지 마음을 잘 아는 아이들은 훌륭하게 자라 사회의 중심축이 됐다. 

이처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부모님을 공경하며 모시고,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김병수(83) 어르신은 ‘장한 어버이’로 선정돼 대통령 표창을 받게 됐다.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김병수 어르신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부모님을 공경하며 모시고,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장한 어버이’로 선정돼 대통령 표창을 받게 됐다. 어르신은 4.3을 겪고도 3남 2녀를 지역사회의 훌륭한 일꾼으로 키워냈으며, 의귀리 경로당 회장을 맡아 봉사하는 등 다른 이들의 귀감이 됐다. ⓒ제주의소리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김병수 어르신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부모님을 공경하며 모시고,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장한 어버이’로 선정돼 대통령 표창을 받게 됐다. 어르신은 4.3을 겪고도 3남 2녀를 지역사회의 훌륭한 일꾼으로 키워냈으며, 의귀리 경로당 회장을 맡아 봉사하는 등 다른 이들의 귀감이 됐다. ⓒ제주의소리

어르신은 4.3을 겪고도 3남 2녀를 지역사회의 훌륭한 일꾼으로 키워냈으며, 의귀리 경로당 회장을 맡아 봉사하는 등 다른 이들의 귀감이 됐다. 지역사회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분위기를 만든 공을 인정받아 이번 정부 표창을 받게 된 김병수 어르신을 [제주의소리]가 만나봤다. 

어르신은 4.3 당시 집이 모두 불에 타고 한국전쟁 예비검속 당시 형님을 잃는 피해를 연달아 겪었다. 불과 몇 년 사이 평범했던 가정은 무너졌고, 돌담만 남은 집은 처참했다. 

김 어르신은 “4.3에다가 6.25 한국전쟁을 겪으니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집이 모두 불에 타버려)돌로 담만 쌓아 위만 대충 막고 살았다”며 “입을 옷도 없으니 어디 가서 얻어오고 집이 불타지 않은 이웃에게 음식을 구해오고 그렇게 살았다”고 했다. 

4.3을 정면으로 마주한 어르신은 초토화 작전 당시 부모님과 남원리 할아버지 댁으로 몸을 피해 무사할 수 있었다. 성인이었던 형님은 끌려갈 것에 대비해 일찌감치 산으로 도피한 상황이었다. 

죄 없는 사람을 붙잡아다 두드려 패고 죽이는 일이 계속되니 사상이 뭔지도 모른 채 산으로 도망쳤던 것이었다. 피신 생활 중 산에서 붙잡힌 형님은 제주시 주정공장으로 끌려갔지만, 다행히 석방됐다. 

그러나 곧이어 6.25 한국전쟁이 발발, 형님은 예비검속이라는 명분으로 다시 체포돼 끌려간 뒤 보증금 1만5000원을 조건으로 보석 석방됐고 부모님은 소와 밭을 팔아 돈을 내고 증서를 받아왔다. 

그러나 집이 불에 타면서 보석금을 냈다는 증서도 불에 타 사라졌고, 끌려간 형님은 그대로 행방불명됐다. 어르신은 “어머니는 집에 불이 나자 사람도 돈도 다 잃었다며 이런 세상이 어디 있느냐고 목 놓아 울부짖으셨다”고 말했다.

사진 속 가족들을 소개하고 있는 김병수 어르신. ⓒ제주의소리
사진 속 가족들을 소개하고 있는 김병수 어르신. ⓒ제주의소리

초토화 작전으로 집이 모두 불에 타고, 형님을 잃는 피해를 겪은 김 어르신은 20살이 되던 해부터 부모님을 모시며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맡아야 했다. 

어르신은 “앞만 보고 농사만 열심히 지었다. 농사를 지으니 그런대로 먹는 걱정은 덜했다. 굶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만 했지 다른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며 “그러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고, 60년대 감귤 묘목을 들여와 수입도 꽤 얻었다”고 말했다.

다행히 안정적인 수입원이 생기면서 자녀 교육도 무난하게 할 수 있었다. 여유가 생기니 대학도 맘 편히 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큰아들은 아버지의 희생에 힘입어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 벽촌의 기적이라 불렸다. 

어르신은 “그때는 촌에서 서울대 보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큰아들이 열심히 해 서울대를 가게 됐다”며 “아들을 서울대 보내니 주변에서 모두 ‘행복한 아저씨’라고 불렀다”고 웃어 보였다.

오현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큰아들은 누구나 알만한 금융회사에 입사, 현재 해당 금융그룹 계열사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으며, 둘째 아들도 한양공대를 졸업해 국내 최대 철강산업 전문 업체의 상무로 근무 중일 정도로 훌륭하게 성장했다.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낸 어르신은 마을 경로당 회장을 맡으며 봉사하는 등 지역사회를 위한 활동도이었다. 침체된 노인회 활성화를 위해 파크골프팀을 창립, 사비를 들여 회의 때 식사를 제공하는 등 노력했다.

또 초아의 봉사를 실천하는 제주남원로타리클럽에 가입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며, 예비검속희생자삼면유족회장, 제주4.3희생자유족회 6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추진위원 등을 맡았다. 

김 어르신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렇게 큰 상을 받게 됐다. 훌륭한 분들이 많은데 이렇게 제가 상을 받게 돼 감사하다. 아이들이 잘 자라줘 이런 상을 받게 된 것 아니겠나”라며 “앞으로 남은 생을 다할 때까지 감사하고 봉사하는 정신을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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