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양조훈 전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

제주4.3사건이 발생한 지 75주년이 지났습니다. 초기 미군정의 대응은 강압적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5.10 단독선거가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 2개 선거구만 유일하게 무효가 되면서 상황은 급변합니다. 미군정이 군 병력과 경찰력을 크게 증강시키면서 강제진압과 초토화작전이 이어집니다. 제주도가 '붉은섬'이 되고, 학살장이 돼 버렸습니다. 이번 특별기고는 4.3 당시 역사적 상황과 5.10 단선 제주지역 무효에 대한 분석을 담고 있습니다. / 편집자 주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왼쪽)은 5.10선거가 무산된 직후 제주지구 총사령관으로 브라운 대령을 임명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왼쪽)은 5.10선거가 무산된 직후 제주지구 총사령관으로 브라운 대령을 임명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오늘로 ‘5.10선거 거부’ 75주년을 맞습니다. 제주도민들은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 전국에서 유일하게 무효화시킵니다. 이 선거를 주관한 미군정은 충격을 받았고, 끝내 제주섬에 대한 초토화 전략을 채택하게 됩니다.  

5.10선거 보이콧은 미군정에 반기를 든 것처럼 보이지만, 민족사적 측면에서는 자주독립과 분단 반대, 통일운동의 성격을 지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양조훈

1948년 4.3 봉기가 일어났을 때, 미군정은 이를 ‘치안상황’으로 간주해 경찰력으로 진압하고자 했습니다. 4월 5일 창설된 ‘제주비상경비사령부’(사령관 김정호 경무부 공안국장)는 경찰 조직입니다. 미군정이 초기에 제주 상황을 ‘심각한 사건’으로 여기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해 2월 UN의 결정으로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현실화되자 전국이 요동쳤습니다. 2월 26일 전북에서 경찰지서 26개소가, 3월 1일 전남에서 경찰지서 10개소가 습격을 당합니다. 미군 보고서에 의하면, 남한에서 2월 125건, 3월 114건 등 두 달 사이 모두 239건의 경찰관서 습격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처럼 4‧3봉기 이전에 본토에서 소요사태가 빈발하게 일어났고, 제주 상황도 그런 사건 중 하나로 인식되었습니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김일성 지령설’을 보노라면, 이런 역사적 상황을 알지 못한 무지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지령설의 전제는 마치 그 무렵 제주도에서만 ‘폭동’이 일어난 것처럼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군정은 경찰총수 조병옥 경무부장에게 초기 진압작전의 총대를 메게 했습니다. 조병옥은 1947년 3.10총파업이 발생하자, “조선의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 제주사람들을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고 발언할 정도의 강경파였습니다. 조병옥은 본토 경찰관들을 제주에 급파하는가 하면 서북청년회(서청) 본부에 단원 500명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경찰력에 의한 진압작전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미군정은 4월 17일 국방경비대에 출동 명령을 내립니다. 모슬포 주둔 제9연대와 부산 주둔 제5연대 1개 대대를 차출, 제주 진압작전에 투입했습니다. 정찰기 2대(L-5)도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소요집단 지도자와 협상을 하도록 합니다.

김익렬 연대장이 1948년 4월 22일 살포한 평화협상 제안 전단지 내용 (제주4‧3평화기념관 전시)
김익렬 연대장이 1948년 4월 22일 살포한 평화협상 제안 전단지 내용 (제주4‧3평화기념관 전시)

4월 22일, 9연대 김익렬 연대장이 미군 정찰기를 타고 한라산 곳곳에 무장대와의 협상을 요구하는 전단을 뿌린 것도 바로 미군정의 전략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제위에…’로 시작되는 전단의 내용은 상대를 존중하며 예의를 갖추어 작성되었습니다. 그리고 4월 28일 무장대 총책 김달삼과의 평화협상이 이뤄진 것입니다.

미국정부의 질책 받고 전략 변화

하지만 4월 하순에 이르자 미군정의 전략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 당시를 회고한 김익렬 유고에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무장대와의 협상에 주력하던 김 연대장 앞에 딘 군정장관 고문이 나타나 초토화작전 실행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유고에 따르면, 그 무렵 소련이 UN 무대에서 제주 소요 상황을 예로 들면서 공격하자 미국 정부가 난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은 주한 미군정 지도부를 문책하면서 조속한 진압을 요구했고, 소련의 선전을 봉쇄하기 위해 4.3을 ‘공산반란’으로 규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4월 25일 전후로 <뉴욕타임스> 등 미국 주요언론도 제주 상황을 본격적으로 보도하는 등 긴박하게 돌아갔습니다.

4월 27일, 광주 주둔 미 20연대장 브라운 대령과 24군단 작전참모부 슈 중령 등 전투 담당 장교들이 제주에 내려와 대책회의를 합니다. 

4월 29일, 군정장관 딘 소장과 광주 주둔 6사단장 워드 소장 등 미군 수뇌부도 제주에 들어와 현장 상황을 점검했습니다. 이때 미군 촬영반도 함께 내려옵니다.

이런 상황에서 4.28평화협상이 진행되었지만, 5.1오라리방화사건을 계기로 깨어집니다. 미군 촬영반이 이 방화 현장을 입체적으로 촬영해서 무성기록영화 ‘제주도 메이데이’(May Day in Korea : Cheju-do)를 제작하는데, 우익단체가 저지른 방화를 무장대가 한 것처럼 조작합니다.

이제 미군정의 갈 길은 뻔히 보입니다. 결정적 쐐기를 박은 것이 5‧5 미군정 수뇌부 비밀회의입니다. 딘 군정장관과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경비대 사령관 등 미군정 수뇌부가 제주에 내려와 제주 치안 담당자 등 9인이 참석한 회의에서 김익렬 연대장이 주장하던 화평방안이 묵살되고, 강경 진압을 요구한 조병옥 경무부장의 강경론이 채택됩니다.

왼쪽 두 번째부터 딘 군정장관, 통역관, 유해진 도지사, 맨스필드 중령, 안재홍 민정장관, 송호성 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연대장,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왼쪽 두 번째부터 딘 군정장관, 통역관, 유해진 도지사, 맨스필드 중령, 안재홍 민정장관, 송호성 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연대장,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조병옥과 육탄전을 벌였던 김익렬 연대장은 다음날 해임되고, 그 후임에 딘 군정장관이 총애하던 박진경 중령이 발령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일이 다가온 것입니다. 남한만의 단독선거는 영구적인 남북 분단을 의미했기에 당시 좌파뿐만 아니라 김구, 김규식 등의 민족지도자들도 반대했습니다. 제주도민 상당수가 선거를 피해 산에 오릅니다.  

당시 선거는 50% 이상 투표해야만 인정되는 제도인데,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 북제주군 갑구(43%), 을구(46.5%) 등 2개 선거구만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습니다. 결국 제주도는 미군정이 실시한 5‧10선거를 거부한 유일한 지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진압 책임자로 미군 대령 파견은 이례적

충격을 받은 미군정은 즉각 전면대응에 나섰습니다. 제주 앞바다에 미 구축함 '크레이그' 호를 파견해 봉쇄하고, 제9연대와 부산 제5연대 1개 대대 이외에도 수원에서 창설된 제11연대, 대구 제6연대 1개 대대를 차출합니다. 경찰력도 본토로부터 크게 증강시켰습니다.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은 더 나아가 5월 20일께 이 모든 병력을 통솔하는 제주지구 총사령관으로 야전군 지휘관 출신 브라운 대령을 임명, 파견합니다. 미국이 외국의 소요지역에 미군 장교를 진압작전 책임자로 직접 파견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만큼 미군정의 다급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브라운 대령은 기자회견에서 “나는 원인에 대해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시키는 것뿐”이라면서 “나의 계획대로 나간다면 약 2주일이면 평정되리라고 믿는다”고 장담했습니다. 놀랍게도 브라운 대령은 6월 23일로 예정된 재선거 성공을 위해 “제주도의 서쪽으로부터 동쪽 땅까지 모조리 휩쓸어 버리는 작전을 수행하겠다”고 공공연히 밝혔습니다.

미군 사령관의 작전으로 엄청난 부작용을 속출합니다. 한국 군인과 경찰을 동원해서 죄가 있건 없건 가리지 않고 청년들을 연행하니 마을마다 토벌대 진입을 망보는 보초가 생깁니다. 청년들은 보초의 신호를 따라 도망가다가 잡히면 농업학교 천막수용소에 감금되었습니다. 한달 여 만에 잡혀 수용된 제주 청년이 6000명에 이르렀습니다. 

무더기로 연행된 청년들을 감금했던 제주농업학교 천막수용소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무더기로 연행된 청년들을 감금했던 제주농업학교 천막수용소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산으로 도망갔던 청년들은 밤늦게 귀가하지만 반복되는 검거작전에 불안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나중에 초토화작전이 전개되면서 많은 도민들이 다시 한라산으로 피신하게 되는데, 이런 작전이 결국 ‘폭도 아닌 폭도들’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과연 무차별 검거작전은 성공했을까요? 죄의 유무를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체포하는 검거작전은 사태 해결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미군정은 6‧23 재선거마저 실패하게 됩니다. 

이 검거작전이 얼마나 무모하고 무리한 작전이었는가는 한 장의 석방증명서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증명서에는 “하기 서명인은 미국인과 조선인 합동취조를 마쳐 1948년 6월 23일 석방함”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중학교 2학년 학생의 석방 증명서 (양조훈 소장)
중학교 2학년 학생의 석방 증명서 (양조훈 소장)

재선거일 이후 풀려나온 ‘현용준’(전 제주대 교수)의 당시 신분은 어처구니없게도 오현중학교 2학년 학생이었습니다. 군인들에게 중학생 신분임을 밝혔음에도 다짜고짜로 연행되어 농업학교 수용소에 보름 동안 갇혔다는 것입니다.

검거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주목받은 사람은 바로 11연대장 박진경 중령입니다. 그는 미군 사령관의 지휘에 따라 무차별 검거작전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딘 군정장관은 제주에 부임한 지 20여 일 밖에 안된 박진경을 대령으로 초고속 진급시킵니다. 하지만 박진경 대령은 승진 축하연을 마치고 부대에 복귀하던 날 강경 진압작전에 반기를 든 부하의 총탄에 암살되었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지역민의 민심을 외면한 채, 오로지 물리력을 동원해서 제압하고자 했던 미군정의 전략과 작전은 과연 성공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1947년 3.1발포사건을 시작으로, 3.10총파업, 1948년에 이르러 발생한 3건의 고문치사사건, 4.3봉기, 4.28평화협상, 5.5수뇌회의, 5.10선거 보이콧, 6.23재선거 실패에 이르기까지 고비 고비마다 평화적 해결 방안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미군정은 브라운 대령이 밝힌 “원인엔 흥미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 2주일이내 평정”이란 표현이 상징하듯, 오로지 힘만 믿고 앞으로 질주했습니다. 그리고 실패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4.3특별법 제정 이후 한국 정부가 4.3 진상조사에 나서자 2001년 10월 24일, ‘남한국민들, 1948년 학살의 진실 찾아 나서다’란 제목으로 대서특필합니다. 

그 기사 가운데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습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 선거에서 제주도에서 유일하게 보이콧하자 ‘남한에 있던 미군 사령관들이 분개해 했고’(Ameican commanders in Korea were furious), 그 이후 섬 주민들을 대상으로 ‘청소하는 작전’(campaign to cleanse)에 착수했다는 내용입니다.

2001년 10월 24일자 &lt;뉴욕타임스&gt; 4.3 특집기사 (제주4.3평화재단 소장)
2001년 10월 24일자 <뉴욕타임스> 4.3 특집기사 (제주4.3평화재단 소장)

미 군사 고문 단장, 초토화작전 칭찬

1948년 8월 15일, 미군정이 막을 내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됩니다. 8월 24일,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에 의해 미군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갖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임시군사고문단이 출범했습니다.

고문단 단장은 로버츠 준장이 맡았습니다. 통위부(국방부) 고문관을 맡았던 그는 그해 5~6월 통위부 참모들을 대동하고 제주에 내려와 브라운 대령의 무차별 검거작전을 측면 지원했던 인물입니다.

6.23 재선거를 독려하기 위해 제주에 온 로버츠 장군과 경비대 참모들. 맨 오른쪽이 박진경 연대장 (김종면 장군 소장)
6.23 재선거를 독려하기 위해 제주에 온 로버츠 장군과 경비대 참모들. 맨 오른쪽이 박진경 연대장 (김종면 장군 소장)

제주 상황은 한동안 소강상태로 접어듭니다. 그런데 1948년 10월 9일 로버츠 고문단장이 제주도를 관장하던 광주 주둔 제5여단 고문관 트리드웰 대위에게 제주도 작전의 즉각적인 수정조치를 지시하면서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이 지시는 즉각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김상겸 대령, 제5여단장 겸임) 창설로 이어집니다. 그해 4월 설립된 제주비상경비사령부가 경찰 조직이라면, 제주도경비사령부는 군대 조직이어서 진압작전의 수위가 한층 높아졌음을 의미합니다.

더욱이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의 포고, 즉 “해안선부터 5km 이외의 지점을 통행하는 자는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해 총살하겠다”는 발표는 국제법에서 엄금된 초토화작전의 시작을 예고한 것입니다.

10월 19일, 제주 파병 명령을 받은 여수 제14연대 장병들이 “동족의 학살을 거부한다”고 반기를 들면서 상황은 더욱 긴박하게 돌아갔습니다.

4.3봉기가 일어난 후 6개월이 지난 10월 중순까지 희생자 수는 800명을 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1월 17일 불법 논란이 있는 계엄령 선포와 함께 감행된 초토화작전으로 제주도는 그야말로 피비린내 나는 유혈의 섬으로 변하게 됩니다.

가축들이 몰살당하고, 가옥 4만 채가 토벌대의 방화로 불타 없어졌습니다. 4.3 희생자가 2만 5000~3만 명에 이른 것은 바로 이 초토화작전의 영향이 컸습니다. 

그런데 로버츠 고문단장은 그해 6월 통위부 고문관 시절 송요찬 소령을 “강인하고 용감한 사람”,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최상의 장교”라고 칭찬하며 제주도로 파견할 것을 명령했던 장본인입니다. 송요찬은 초토화작전을 감행하자마자 중령으로 진급합니다.

로버츠 장군은 이에 머물지 않고 초토화작전이 한창 전개되던 1948년 12월 18일, 한국 국방장관 등에 공한을 보내 송요찬 연대장의 작전을 칭찬하고 이를 대통령 성명 등을 통해 널리 알리라고 촉구합니다.

12월 21일, 채병덕 참모총장은 “송요찬 중령과 미 고문관은 제주도에서 훌륭한 능력을 보여주었다”면서 송 중령에게 훈장을 수여할 것을 약속한다고 화답합니다.

초토화 시기, 9연대 군수주임을 지낸 김정무 장군(준장 예편)은 필자와 만났을 때, “우리 정부 수립 이후에도 무기와 장비는 국방부 군수고문관 마쉬 소령의 사인이 있어야 출고할 수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결국 초토화작전에 동원된 총알 하나까지 미군이 지원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제주도, 전남 사태 등을 언급하며 발근색원할 것을 지시합니다. 그런데 이 명령을 내리면서 ‘미국의 원조를 적극화’ 하기 위한 것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즉 미국이 그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준 제주사태 진압 등에 계속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주한미군은 1948년 10월부터 괴선박 출현, 소련 잠수함 출현설을 유포, 강경진압의 명분으로 삼습니다. 한국 언론은 이런 가짜뉴스를 크게 부풀려 보도했습니다.

1949년 4월에 와서야 주한미군사령부는 종합보고서에서 “일부에서는 게릴라들이 본토로부터 또는 북한으로부터 병참 지원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있으나 이러한 보고를 증명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며 태도를 바꿔 버립니다.

“본토, 북한의 병참 지원 소문 증거 없다”(밑줄 친 부분)고 기록한 1949년 4월 1일자 주한미군사령부 정보보고서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본토, 북한의 병참 지원 소문 증거 없다”(밑줄 친 부분)고 기록한 1949년 4월 1일자 주한미군사령부 정보보고서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제주도의 소요 상황은 1949년 3월, 새로운 사령관 유재흥 대령이 진압‧선무 병용작전을 전개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유 대령은 “하산을 하면 과거의 죄를 묻지 않고 생명을 보장하겠다”는 전단을 뿌렸습니다. 놀랍게도 4~5월 사이 한라산 주변을 헤매던 8000여명(51%가 여성)의 주민이 하산합니다.

1949년 5월 10일, 꼭 1년 만에 그동안 미뤄졌던 재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하산민 중 1600여명이 불법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사형, 무기징역, 15년 형 등 중형을 선고(‘수형인명부’ 기록 뿐) 받았습니다. 20여 년 전, 필자가 서울에서 유재흥 장군(중장 예편, 국방부장관 역임)을 만나서 이 문제를 지적했더니, 그는 “나는 1949년 5월 하순에 제주를 떠났기 때문에 그 이후의 일은 알 수 없다”고 발뺌했습니다.  

제주도에서는 조선 말기인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 ‘이재수의 난’을 비롯한 6차례의 민란이 있었습니다. 제주 공동체가 외부세력으로부터 탄압과 부당함을 당했을 때 이에 맞서서 저항한 전통이 있었습니다. 

조선 조정은 민란이 일어나면 군사를 보내 평정한 후, 민란에 참여한 모두가 아닌 소수의 우두머리만을 처형하고 민란의 원인이 된 부패관리를 함께 처벌함으로써 성난 백성들을 진정시켰습니다.

하지만 미군정과 주한미군사고문단은 이런 제주도의 역사와 전통, 민심의 흐름을 철저히 도외시했습니다. 오로지 좌‧우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접근하여 물리적 힘으로 진압하는데만 몰두하다가 거듭 시행착오를 범했습니다. 

4.3봉기에 이은 5.10선거 보이콧으로 제주도는 ‘붉은섬’으로 낙인된 채 출구 없는 학살장으로 변해버렸던 것입니다. 5‧10선거 보이콧은 민족사적인 관점에서는 높게 재평가받을 여지가 있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참혹했습니다. / 양조훈(전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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