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왓 칼럼] 모든 스승님께 공경 드리는 5월

/ 사진=픽사베이
우리 아이를 존중하며, 어머니를 존중하며, 내 삶의 순간순간에 가르침을 주셨던 모든 스승님께 공경을 드린다. 최소한 내가 매순간 인간답게 살려는 노력을 하게 된 힘을 주셨다. / 사진=픽사베이

얼마 전 어버이날이 지났다. 그리고 이젠 스승의 날이다. 어버이의 날은 자녀들이 부모들을 생각하는 날이고, 스승의 날은 제자들이 스승님을 생각하는 날이다. 붉은 카네이션은 ‘건강을 비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 두 날의 상징 꽃이 된 듯하다. 아무래도 먼저 태어나 얻은 지식과 경험을 나눠주는 어른들이기에 우선은 건강을 기원하는 듯하다. 

며칠 전 우리 막내 아이가 고사리손으로 학교에서 만들어서 내민 얼기설기 성긴 카네이션은 부모인 내 가슴에서 뜻깊게 달렸다. 필자도 어머니에게 꽃을 드렸다. 중학생인 큰 아이가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선생님께 꽃을 가슴에 달아드리지 않을까 싶다. 

어머니가 어디 가시려는 모양이다. 아마 병원에 다녀오시려는 것 같았다. 

“어디래 감수과?”
“요기 어디래 가믄 병원이신디 거기 갔다 오켜”
“태워다 드립니까?”
“됐쩌! 운동 삼아 걸엉 가켜, 니도 바쁘고”
“예, 겅허십써. 댕겨옵써”

웬만한 경우가 아니면 필자가 여든이 다 되는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이나 은행을 다녀오는 법이 거의 없다. 바빠서가 아니다. 어머니가 원하지 않는 일은 가능한 한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름으로 눈치도 있지만 꼭 불가결하지 않으면, 어머니 말씀대로 한다. 바쁜 아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고자 힘든 걸음을 자초하는 것도 눈치로 알지만, 웬만하면 어머니 말씀을 따라 드린다. 가끔 눈치채지 못해 불효하는 일도 있지만, 가능하면 어머니 의지대로 따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인권운동을 하면서 노인인권강의를 많이 다녔다.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직접 인권강의도 진행해보았고, 우리 동네 노인인권을 위한 지도를 만드는 사업도 진행해보았다. 그러는 과정에서 어르신들에 대한 인권은 무엇일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동방예의지국’, ‘삼강오륜’이라는 말들을 통해 어르신들에 대한 공경을 배워왔다. 단지 나이가 많음이 아니라, 그간의 경륜과 지식, 그리고 깊은 인내에 대한 존중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요새 노인들을 위한 공적 기관의 비전이나 사회적 정책을 보면 아쉬움이 많다. 크게 노인들을 위한 정책은 지원정책과 학대예방정책이 있다. 중요한 정책들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노인들의 주체적 삶에 대한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는 정책들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노인들에 대해서는 사회복지적 지원, 노인 연금, 교통비 지원 등 현금성 지원이 많고, 뭔가 피해를 봤을 때 침해 구제 정책이 거의 전부라는 것이다. 

1991년 노인을 위한 유엔 원칙(UN Principles for Older Persons, 1991)에서는 크게 다섯 가지 영역의 원칙을 명시하고 있다. 독립, 참여, 돌봄, 자아실현, 존엄성이다. 필자가 보기에 현재 우리 사회는 어르신들에 대해 돌봄에 대해서만 집중된 것이 아닌가 싶다. 존엄의 문제에 있어서 노인학대부분을 다루기는 하지만, 대체로 나이든 사람들에 대한 지원만이 강조되는 형국이다. 하지만 실제로 노인인권은 노인들의 전인적인 삶을 요구한다. 개인적으로 필자가 어머니의 힘듦을 알고 있지만, 어머니의 말 그대로를 따르고자 하는 것은 이렇든 저렇든 간에 어머니의 의사를 존중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저 어머니가 나이가 드셔서 약해졌으니 무조건 돌봐야 한다는 생각을 최대한 자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살아야 하시기 때문이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자신의 삶은 자신의 삶이다. 돌봄은 필수적으로 필요하지만, 어르신들이 대상화되지 않도록 세심히 노력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독립적이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자신의 일에 대해 성취감을 느끼고, 비참한 마무리보다 당당하고 존엄한 마무리를 꿈꾸시는 어르신들의 입장이 최대한 보장될 필요가 있다. 존중받는 존재로서 마무리를 짓고 싶은 것일 것이다. 

한편, 어린 사람들이 좀 더 먼저 생을 살아가고 있는 선생(先生)님들과 사는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아이들이 다 같이 합창하는 그 장면 덕에, 그리고 학생들이 달아주는 카네이션 덕에 우리 선생님들은 다시 힘을 내고 교육 현장으로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즘은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노래에 큰 진정성을 느끼지 못할 때가 불쑥불쑥 있는 것 같다. 

실제, 요즘 사회는 선생님들에게 경쟁적이며, 성과주의적인 교육을 요구한다. 그리고 때때로 학생들은 선생님들의 지시에 크게 저항하거나 교묘하게 비꼬아 대기도 한다. 선생님이라는, ‘배움을 주는 사람’이라는 도덕적 존재로서의 명예는 사라지고, 주어진 정보를 최대한 그대로 전달하는 교실내 선임자로 전락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학생들과의 갈등은 선생님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되고, 마음에 큰 생채기를 낸다. 교사의 권위가 뭔가 싶어지면 좌절감이 들 만도 할 것이다. 

‘교권’이라는 단어는 선생님들의 인권 그리고 선생님들에 대한 인격 존중, 선생님의 권한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린다. 참으로 묘하게 뒤섞어놓았다. 이 묘하게 뒤틀린 단어는 현장에서 많은 혼란을 주고 있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아동(18세 이하)은 부모의 소유나 미래를 준비하는 존재가 아닌 지금-현재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존귀하고, 존엄한 존재이며, 권리의 주체자로 천명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인권선언문 제26조 2항은 “교육은 인격의 완전한 발전과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의 강화를 목표로 한다”로 명시하고 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선생님들은 아동들에게 권리를 가르치고 권리를 보장해주어야 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자신의 직업에 대한 존엄성을 보장받아야 하는 개별적 존엄한 존재이다. 인권의 증진 또는 인권 의식을 높이도록 조력을 하는 사람임과 동시에 인권을 보장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선생님들 처지에서만 바라보는 ‘교권’이라는 단어로만 표현될 때, 학생들의 인권이 교묘하게 삭제된 단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교사의 권리로서 학생들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인권으로 둔갑이 되었고, 통제의 권한은 학생들의 성과를 강제하는 권력이 되어버렸다. 교사와 학생 모두 인간임을 고려하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식은 하나이다. 바로 ‘존중’의 자세이다. 

인권은 첫 번째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모든 인간에 대한 차별을 금지한다. 세계인권선언문은 모든 인간에 대한 존중을 핵심적 가치로 삼는다. 결국 학교의 현장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존중이다. ‘교권’이나 ‘학생인권’이 제대로 된 인권적 가치로 자리를 잡으려면 ‘존중’이라는 자세가 필요하다. 선생님은 존중의 자체로 존중하는 법을 제자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다. 이는 ‘인격의 완전한 발전과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의 강화’를 향한 선생님의 권리보장 노력일 것이다.

학생들에게 존중의 자세와 가치를 가르칠 수 있다면 당연히 선생님들에 대한 존중의 자세를 어떻게 해야 할지 학생들은 알게 되고 존중의 태도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성적 그리고 성과, 지식 정보 전달이 강제가 아닌 상호 존중을 기반으로 이뤄지고, 존중에 근거한 다양한 배움은 인간적 성숙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교권은 그렇게 성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권력으로 세워진 교권은 권력이고 통제이지만, 존중으로 세워진 교권은 존중 그 자체이며 교육의 최종 목표인 인격의 완전한 발전과 성숙일 것이다. 결국 선생님은 존중받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한다. 어린이날을 지나면서 한없이 나약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에 대해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으로 귀를 열어보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존중받고 싶은 어른들의 날이 어버이 날을 지나, 존중을 가르치고 존중을 실천하는 어른 선생들의 날을 맞이한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고 삶을 살며 마무리한다. 그 일생의 동안 어느 단 한 순간이라도 존중받지 않는 순간이 없었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를 존중하며, 어머니를 존중하며, 내 삶의 순간순간에 가르침을 주셨던 모든 스승님께 공경을 드린다. 최소한 내가 매순간 인간답게 살려는 노력을 하게 된 힘을 주셨다. / 신강협 제주평화인권연구소왓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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