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세계보건기구(WHO)는 보르네오 섬에 말라리아를 퇴치하고자 DDT를 뿌린다. 모기는 박멸됐으나 이상하게도 민가의 지붕이 너덜너덜 떨어지기 시작한다. DDT로 인해 굼벵이를 먹고사는 말벌이 사라지자 굼벵이가 크게 번식, 이엉을 엮어 얹은 지붕을 먹어버렸기 때문이다. 고민에 빠진 정부는 양철판으로 지붕을 덮게 한다. 이번에는 주민들이 집단 불면증에 시달린다. 열대지방의 집중호우가 양철지붕을 때리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DDT로 죽은 벌레를 먹은 뱀이 죽는 것이었다. 잇달아 그 뱀을 먹은 고양이도 죽는다. 먹이사슬을 올라갈 때마다 DDT가 농축되기 때문이다. 고양이가 사라지자 쥐들의 극성이 온 섬에 판친다. 쥐의 증가는 다른 전염병의 유행을 노출한다. WHO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놀랍게도 14,000마리의 고양이를 낙하산에 매달아 투하한다. 

자연생태계의 연결성과 복잡성을 보여주는 실화의 하나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수많은 구성 요소들과 그들이 강하게 영향을 주고받는 복잡계이다. 그리고 부분들을 알고 그 부분들의 결합방식을 안다고 해서 전체를 알 수 없는 비선형적 세계이기도 하다. 작금의 기후변화 생물다양성 등 어떠한 대책도 없이 무기력한 상태의 지속가능성 위기에서 보듯 자연의 무한한 복잡성과 연결성을 깨닫고 국가와 국가 간 그리고 개인 차원에서도 문제 해결을 위해 적절하게 행동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컨대 겉으로 드러난 사건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사건은 구체적이거나 가시적이고 효과가 즉각적이기 때문에 정책 논의와 문제 해결을 위한 개입은 대부분 이 단계에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더 깊이 들어가면 일련의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나 눈에 띄는 행동이나 결과를 만드는 패턴이 나타나는데 이 패턴을 통해 문제 해결에 접근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정치적, 사회적, 생물물리학적, 경제적 구조 등 전체적 구조를 통해 여러 요소가 행동하고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제약을 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지속가능성 위기의 근본 해결책인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근본적인 것은 패러다임 즉 우리의 의식, 무의식적 전제이다. 패러다임이야말로 모든 문제의 근원이자 문제 해결의 원천이다. 한 시스템의 목적이나 정보의 플로, 피드백 등 시스템의 모든 것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의 변화가 시스템의 다른 무엇보다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패러다임의 변화과정이 반드시 물리적이거나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니고 시간조차 거의 걸리지 않는다. ‘깨진 유리창 이론’처럼 우리의 직감과는 정반대에 있는 경미한 것이 효과적인 개입 포인트가 될 수 있다. 

패러다임 전환과 음식선택이란 절묘한 한 수!

‘깨진 유리창 이론’은 깨진 유리창처럼 사소한 것을 방치해두면 나중에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한다는 이론이다. 건물주인이 건물의 깨진 유리창을 그대로 방치해두면 지나가는 행인은 관리를 포기한 건물로 판단하고 돌을 던져 나머지 유리창까지 모두 깨뜨리게 되고, 절도나 강도와 같은 강력범죄가 해당 건물에서 일어날 확률이 높아지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1995년 당시 뉴욕의 가장 큰 고민은 해결 기미가 막막한 높은 중범죄율이었다. 당시 뉴욕시 길거리는 지저분한 낙서투성이였는데 시장이 강력한 의지를 갖고 뉴욕시 건물 벽과 지하철 내부 벽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주요 거점에 CCTV를 설치하고 낙서한 사람들을 끝까지 추적하자 그 높은 중범죄율도 대폭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이 ‘깨진 유리창 이론’처럼 음식선택은 작금의 지속가능성 위기 해결을 위한 절묘한 한 수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음식은 지구 전체의 경제・정치・생태적 질서는 물론. 인간의 의식과 건강까지 연결하며 복잡하게 얽혀버린 실타래를 푸는 일종의 실마리와 같다. 그러므로 음식 같은 구체적인 것에서 시작하면 어느덧 전체적 그림이 스스로 드러나 그 전체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무기력한 개인의 자신감 회복뿐 아니라 기후변화를 비롯한 거의 모든 환경위기와 자원고갈, 팬데믹 기아 건강 등 강력하고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사소해 보이지만 비용도 거의 없고 정부에 무작정 기댈 필요가 없이 바로 시작할 수 있으며 그 효과 또한 이보다 즉각적일 수 없다.

'비건채식으로 지구를 살립시다' 등 구호를 외치며 &nbsp;'2023 세계 비건채식 기후 행진'을 하고 있는 국내 200만명으로 추산되는 비건채식인들.<br>
'비건채식으로 지구를 살립시다' 등 구호를 외치며  '2023 세계 비건채식 기후 행진'을 하고 있는 국내 200만명으로 추산되는 비건채식인들.

밥상에 오르기 위해 연간 750억 마리의 동물이 무자비하게 도살당한다. 어류의 50%와 세계 농지의 80%, 물 소비의 70%와 세계 식량의 40%가 고기생산과 가축사료로 투입된다. 그리고 자유로운 시장의 힘이 상호작용한 결과  연간 10억명은 배고파 죽어가는 반면, 20억명은 배불러 만성질환으로 죽어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경제구조의 왜곡과 인수공통전염병의 반복은 물론 지구온난화 생물종 멸종 같은 치명적 생태계 파괴가 초래된다. 이는 미래의 아이들과 생명체들에게도 무의식적 폭력과 고통을 가하는 것이다. 즉 ①정치적 보조금으로 값싼 곡물 ②그 곡물조차 구입이 어려운 가난한 사람들 양산 ③값싼 곡물을 동물들에 공급하는 게 더 이익이 되는 기괴한 구조 ④환경파괴와 팬데믹 및 자원고갈 ⑤20억 비만과 과체중 가운데 절반이 만성질환 그리고 만성질환의 치료를 위한 신약 개발로 연간 수억 마리의 동물들이 실험대상으로 희생되는 죽음과 고통의 악순환 구조다. 

폭력, 아동학대, 자살, 약물중독, 비만, 스트레스 등등 현대사회의 심각한 문제들도 성찰해보면 이 죽음과 고통의 쳇바퀴 속에서 우리가 동물과 가금류들에 가한 행위들이다. 인공수정을 통해 갓 태어난 새끼들을 떼어놓고 오로지 이익을 좇아 고기를 빨리 살찌우고 강제 임신시키는 데 온갖 약물을 투여하는 등 공장식 사육환경과 도살과정은 현대판 홀로코스트와 다름없다. 이들에게 엄청난 두려움과 스트레스, 분노 등을 야기하며 그것은 부메랑이 되어 고스란히 우리에게 되돌아 온다.

옛사람들은 오합혜 즉 다섯 개의 씨줄로 듬성듬성 엉성하게 엮은 짚신을 신고 콩을 심을 때 세 알을 심곤 했다. 벌레가 알을 까고 나오는 봄철에 벌레들이 깔려 죽지 않고 하늘의 새가 한 알, 땅의 벌레가 한 알, 사람이 한 알을 먹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러한 배려는 우리가 계속해서 생명의 그물을 찢어놓는다면 그 덫은 곧 우리의 존재 자체에 구멍을 뚫어놓을 것이라는 세상의 복잡성과 상호연결성에 대한 본능적인 자각 때문이다. 오늘날 파국으로 치닫는 지속가능성 위기도 결국 인간의 위기이며 스스로 그러한 자연과 생명이 우리에게 주는 준엄한 경고이다. 

한 마리의 나비가 폭풍우를 일으킬 정도라면 우리 인간은!

1977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일리아 프리고진에 따르면 소산적 구조에서 자기조직화의 변화과정에서 분기점은 해당 시스템의 과거에 의해서도 혹은 그 시스템의 주변 환경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는다. 오직 시스템 내부의 아주 작은 변동들 그리고  결국에는 시스템이 내부 조건의 변화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느냐 즉 수용적 민감성을 통해 규정될 뿐이다. 이를 우리 자신이 하나의 부분으로 포함되어 있는 사회적 체계에 유비헤 볼 수 있다. 우리 역시 하나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수용적 민감성이 문제이다. 즉 우리의 수용적 민감성이 어떻게 작동하느냐에 따라 팬데믹과 기후비상사태의 지속가능성 위기를 돌파하던가 아니면 붕괴하는 것이다. 시스템을 기울어지기 시작하고 그 조직의 보다 높은 수준에서 새로운 역학적 평형상태에 도달하거나 카오스적 시스템이 그렇듯이 보다 작은 단위들로 붕괴될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임계점에 서 있기 때문에 뭔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한 마리의 나비가 폭풍우를 일으킬 정도라면 우리 인간은 얼마나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 

오늘날처럼 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의 문제가 전혀 새로운 의미를 보여주며 상황은 매우 긴급하게 대두된 적은 없다. 아무리 먹기 위해 기르는 가축들이라고 해도 지금처럼 심하고 무자비하게 조직적으로 수정되고 길러지는 과정에서 대량의 학대가 자행된 적은 역사상 없었으며, 대량 사육으로 인한 지구상의 자원 소모 및 환경오염이 이처럼 막대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만큼 개개인의 결심이 중요했던 적 또한 없었다. 

고용석.
고용석.

또한 인간을 먹이사슬의 정점에 올려놓고 자연과 생명을 소비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인간중심의 소비주의적 세계관은 지속가능하지 않고 인간의 타고난 본성을 표현하지도 못한다. 인간 본연의 연민과 자각을 축소하고 마비하지 않으면 받아들이기 힘든 세계관이다. 그리고 육식은 우리 문화 최대의 그림자이자 가장 시급한 윤리적 문제다. 문제의 원인이 된 사고방식으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비거니즘은 사고방식과 문화 즉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비건채식과 비거니즘은 거대한 고통과 죽음의 쳇바퀴에 대한 ‘알아차림’이자 생명과 평화, 지속가능성의 선순환을 여는 결정적 포인트다. / 한국채식문화원 공동대표 고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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