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62) 서귀포시 대정읍 김임자 어르신 ②

나는 김임자 어르신(1942년생)께 ‘많은 사람들이 어르신의 식당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 것 같냐’고 여쭈어보았다.

“나는 장사는 신경 안 써. 요즘 사람들 세대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음식은 한 번 와서 맛있고 또 한 번 와서 맛있고. 이렇게만 (손님들이 느끼게만) 하면 돼. 맛 변하지 않고 간세부리지 말고 해야 돼. 몸국이 다시가 나빠가면 다시물 다시 우릴때가 왔다. 닥쳐서 하지 말고 미리 미리 해야 돼. 한번은 맛있고 한번은 맛없고 들쭉날쭉 하믄 절대 안 돼. 그래서인가 어떻게 제주시에서도 많이 오고 성산포에서도 오고.”

어르신의 대답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거 아니냐고 많은 사람들은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변함없는 맛을 오랜 시간 지켜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나는 알고 있기에 어르신의 말이 끝난 직후 한동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집에서 나와 장을 보고 밑 준비를 하고 음식을 만들며 그 맛의 정도(正道)를 50년 가까이 지킬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시작은 할 수 있지만 50년 이상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매일 같은 시간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하며 음식을 내어주는 일은 보통의 책임감과 사명감이 아니면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무덤덤하게 말씀하셨지만 어르신의 대답에 바로 다음 질문으로 이어갈 수 없었다.

지금은 아들 내외에게 운영을 맡기고 있지만 여전히 어르신께서 직접 장을 보고 육수를 우리고 고기를 삶고 계시다. 새벽 3시 반이 되면 일어나시는 어르신은 4시에 목욕탕을 다녀오는 것으로 하루를 연다. 다행히 집 앞 목욕탕집 할머니가 일찍 문을 열기에 그 시간에 목욕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옆집 목욕탕 할머니도 건강하게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말씀하셨다. 그 후 시장에 가서 장을 보신다고. 몇 해 전까지는 며느리가 제주시 하나로마트에서도 장을 봐다 주기도 했다. 특히 수요일에는 좋은 식재료를 세일을 많이 해 주기 때문에 제주시에서 재료를 공수해서 오기도 했단다.

시어머니가 하던 이 식당은 처음에는 갈비가 주력상품이었다. 갈비와 냉면 대신 냉우동을 곁들여서 팔았는데 어르신께서 맡아서 하게 되면서 갈비와 냉우동, 곰탕까지 같이 팔았다. 그러다 갈비는 힘에 부쳐 그만하기로 결정하고, 그 이후에 소고기찌개를 개발하셨다. 조미료를 넣어 맛을 빠르게 잡을 수도 있었는데, 어르신은 그 조미료 특유의 ‘닉닉함’이 싫으셨단다. 어떻게 하면 개운하면서도 깔끔한 육수를 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실행에 옮겨 10여년 간 완성한 육수가 이곳의 냉우동과 소고기찌개의 기본이다. 처음엔 소고기찌개가 얼큰한 버전이 아니었는데 경상도 사람들의 소고기뭇국을 보고 얼큰하게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하셨단다.

“당근도 놔 보고 호박도 놔 보고. 이것저것 해 보면서 소고기찌개는 만들어졌지. 지슬(감자)은 괜찮긴 한데 처음 딱 끓영 먹을 땐 좋아. 그런데 그거 덥히면 국물이 영 별로야. 무수(어르신은 무를 무수라고 표현하셨다)가 제일 좋더라고. 지금은 당근도 호박도 안 놔. 감기 걸린 사람들이 와서 먹으면 코가 싱싱하게 감기가 도망간다고 먹으러 많이 와. 한 번도 누구한테 레시피 맡긴 적 없어. 내 생각대로 하지. 밑반찬도 하나씩 해 보지. 누구한테 고라주지도 못해. 짐작으로 하는 거라서. 그런데 이제 하도 오래 해서 내 손이 알아.”

사실 어르신의 식당은 이미 읍내뿐 아니라 제주도에서도 오래된 식당이자 맛이 좋기로 유명한 식당이다. 제주 각지에서 이 서남쪽 제일 끝 마을까지 찾아오는 것은 물론, 육지 사람들도 많이 찾는 곳이다. 영어교육도시가 생기고 나서는 파란 눈의 외국인들도 찾는다고. 몸집이 큰 서양사람 둘이 들어와서 소고기찌개를 두 개 시켰는데 어르신은 음식이 맵고 입에 안 맞으면 어쩌나 싶었단다. 그런데 반찬 하나 남기지 않고 국그릇 바닥이 보일 정도로 깨끗하게 비우고 잘 먹었다고 인사를 건네고 가는 외국인들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하셨다.

소고기찌개. / 사진=김진경
소고기찌개. / 사진=김진경
냉우동. / 사진=김진경
냉우동. / 사진=김진경

아무리 사 먹는 음식이라도 음식을 만들어 주는 셰프들에 대한 예의와 음식을 대하는 서양인들의 태도에 조금은 특별한 감정을 느끼셨던 것 같다. 나 또한 비슷한 경험을 많이 했다. 음식을 먹을 때 천천히 음미하면서 음식을 만들어 주는 사람에 대한 감사함의 흔적은 남김없이 먹고 간 외국인 분들의 테이블을 보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음식과 식당에 대한 에티튜드는 나도 다른 업장에 가서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 아마 김임자 어르신도 비슷한 느낌이셨을 것 같다.

또 영어마을 선생님 중에서는 어르신 식당의 단골도 있다고 하셨다. 그분도 서양 사람이었는데 늘 오면 곰탕을 시켜서 먹고 역시나 깨끗하게 비우고 간단다. 갈 때도 꼭 주방 앞에까지 와서 어르신께 인사하고 간다고. 자주 오니 그 외국 친구의 식성도 알아서 어르신은 그 선생이 오면 어르신도 알아서 간이랑 맞춰서 내어준단다. 언어가 달라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아도 곰탕 한 그릇에 어르신과 외국인은 식당 주인과 손님을 넘어선 교감과 소통을 하고 있었다. 이제 다시 본국으로 돌아갔는지 더 이상 식당을 찾아오지 않는다고 아쉬워하는 어르신에게, 그 곰탕을 즐기는 외국 선생은 단지 그냥 식당에 와서 돈을 내고 먹는 손님이 아니었다.

시어머니의 백록식당을 인수해서 지금 50여 년 가까이 영해식당으로 만들어 온 장본인은 김임자 어르신이시다. 백록식당에서 문화식당, 영해식당까지 식당 이름이 바뀌는 과정에 모두 어르신이 계셨고 영해식당으로 식당 이름을 변경할 때 어르신께서 완전히 이 식당을 인수하셨다고 한다. 

신령靈에 바다海의 의미를 지니는 영해식당은 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모슬포 읍내 시계탑 상가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바람이 특히 센 이 지역에는 거친 파도에 순응하며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식당 달력에는 물때가 표시된 달력이 걸려 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오랜 시간 동안 자리한 이 식당은 마을 사람들의 희로애락도 함께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음식을 만드는 재료에 있어서는 엄격한 어르신은 시판 된장도 비위에 안 맞아 못 먹는다고 하셨다. 그 특유의 ‘늘크랑’한 맛이 싫으시다고. 그래서 지금도 된장을 직접 만들고 계시다. 어르신 댁의 된장독은 두 개라고 하셨다. 씨간장처럼 된장도 독에 바닥이 거의 내려왔다고 생각하면 콩 두어대 삶아 삶은 물과 메줏가루랑 함께 섞어 된장이 남아있는 항아리에 씨된장 삼아 장을 담그신다고 하셨다. 된장독이 두 개인 이유였다.

“자리물회는 집된장으로 만들어야지. 식당에는 왜된장에 식초 탄 물 만들어그네 자리도 기계로 썰엉 만드니까 우리 때 먹었던 그 맛이 안나. 우선 집된장에 고추장 조금 넣고 참기름 넣고 슥슥 버무령 미나리 썰어 놓고 마늘이영 고추 넣고 경해그네 물 넣어야 돼. 식초는 내중(나중)에 놔야 돼. 먼저 넣으면 자리가 다 풀어져. 식초랑 오이는 나중에 놔야 자리가 쫄깃쫄깃하지. 자리가 오솔오솔하게 생으로 살아있는 맛으로 먹어야지 가시 세다고 자리에 식초 먼저 넣고 만든댄도 하지만 식초 넣었댄 자리 뼈가 막 부드러워지지는 않아. 우리도 처음엔 경 해나서. 근디 그렇게 식초 넣으난 자리가 혼딱하게 녹아서 맛이 없어. 양념장에 참기름 조금 놔야 좋아. 미나리 까지 버무려 놓고. 식초랑 오이 톡톡 나중에. 그래야 쫄깃쫄깃하고 탱탱하게 자리가 버무려져.”

/ 사진=김진경
아들오면 자리물회를 먹을거라며 양념장을 만들고 계셨던 어르신. / 사진=김진경

상대적으로 바닷물이 센 모슬포 지역의 자리돔이 다른 지역보다 가시는 센 대신 살은 탱탱하고 쫄깃하다고 알려졌기에, 이 지역의 생선 상태에 맞는 식감을 살리며 만드는 어르신의 자리물회 비결도 매력적으로 들렸다. 식당에서 자리물회도 파셨었다고 하니 어르신의 음식 철학이 담긴 자리물회를 드셨던 분들이 순간 부러웠다. 영해식당은 새끼보회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지금은 판매는 물론 유통도 되지 않는 음식이지만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보양과 해장에 좋은 음식이었다고 한다. 새끼보회를 먹으러 제주시에서도 올 정도였다고. 하지만 이제는 사라진 역사 속 제주 음식이 되었다.

“한번은 누가 깻잎을 하영 갖다 주니까 어떻게 먹을지 막 궁리해봤지. 일단 된장에 제피 썰어 넣어서 제피된장 쌈 싸서 먹으면 맛있겠다 생각했어. 바로 먹는 깻잎양념은 깻잎 사이사이에 양념 톡톡 뿌려서 먹으면 맛 좋고 오래 두면 물 나오고 맛도 떨어지니까 소금물 얄쓱하게 해서 살짝만 숨만 죽게 해서 숨만 폭 가라앉혀. 그 상태로 양념해서 먹으면 오래 두고 먹을 수 있어. 간장 끓여그네 짜지 않게 만들고 숨 죽은 깻잎에 부으고 그 위에 된장 쪽 덮엉 놔두면 된장물이 깻잎에 쏙쏙 들어가서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

지금처럼 인터넷을 열면 수만 가지의 요리법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세대도 아닌, 어르신이 알려주시는 조리법과 음식들은 어르신이 살아온 세월의 연륜과 경험이 묻어 있는 것들이기에, 나는 마음속으로 꼭꼭 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저명한 요리사도 아니고 요리연구가도 아니시지만, 지금껏 거짓 없이 음식을 대하는 어르신의 마음과 철학으로 운영되는 이 오래된 식당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비결의 원천이기에 더 그랬다. 

처음에 식당에서 밀면을 팔았을 때는 삶은 우동으로 하다가 그 다음에는 누르는 기계로 면을 뽑고 나중에는 자동으로 나오는 기계까지 사용하며 밀면을 만들고 계신다고 했다. 대정읍내 사람들은 밀면을 왜 냉우동이라고 하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대정읍내에 제주도 유명한 밀면집들의 본점이 밀집되어 있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심지어 마을 읍내의 중국집에서 파는 냉우동도 중국집의 냉우동 스타일이 아닌 대정읍의 밀면 스타일이었다. 그야말로 대정읍은 제주밀면 문화의 본진이었다.

제면기에서 나오는 냉우동 면, 지금도 이 기계를 가지고 계신다, / 사진=김진경
제면기에서 나오는 냉우동 면, 지금도 이 기계를 가지고 계신다, / 사진=김진경

어르신이 운영하는 식당에는 워낙에 오랜 시간부터 오던 단골들이 많아 식재료 값은 부지기수로 오르지만, 음식 값은 그만큼 올릴 수 없다고 하셨다. 제주시에도 잠깐 했었는데 그때 시에서 먹었던 사람들이 얼큰하게 소고기찌개 먹고 싶어 오는 분도 많다고 하셨다. 일부러 제주시에서 오는데 또 가격을 올리기가 그렇다고. 

“그래도 나 이 나이에 칼 맛 안보고 지금까지 일했어. 아침에 밑반찬 같이 만들어 주고 육수 맞춰주고 하면 이제 아들 내외가 하고 있으니까 난 손님들 있을 때는 운동 삼아 걸으래도 가보고 해. 가끔 손님들 있을 때 식당 들어가면 손님들이 ‘아이고 어머니 계셨네?’하면서 인사하고. 게난 공부만이 공부가 아니고 음식도 자기가 이래도 해 보고 저래도 해보고 하면서 공부하는 거지. 누가 가르쳐줘? 아니 내가 스스로 해야 해. 그것도 공부야.”

나는 김임자 어르신께서 여든이 되는 나이에도 이렇게 식당에서 좋은 에너지를 갖고 손님을 맞이할 수 있는지, 마지막 어르신의 말에서 알 수 있었다. 책을 펴고 전문 서적을 읽는 것만이 공부는 아니다. 내 분야에서 손님들이 언제 와도 실망 없는 맛있는 한 그릇을 주기 위해 부단히 시도해보고 도전해 보는 어르신의 마음과 열정. 이것이 어르신이 아직도 식당 앞에서 손님들을 맞이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이 아닐까? 

세대를 불문하고 이웃과 남의 경계가 없는 이 작은 식당에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가족이었고 어머님의 아들딸, 손자손녀들이었다.

소고기찌개를 포장하고 제주시로 돌아와서 입도해서 타지 생활하는 친구들에게 주었다. 소고기찌개를 한술 뜬 29살의 청년의 낮은 탄식 후 한 말이 가장 먼저 귀에 들어왔다.

“아. 이 찌개 식당에서 파는 것 같지 않아요. 집에서 할머니가 끓여준 것 같아요.”

100년 된 퐁낭으로 만든 테이블과 맛있는 레시피가 잔뜩이었던 정겨웠던 그곳.&nbsp;&nbsp;/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nbsp;<br>
100년 된 퐁낭으로 만든 테이블과 맛있는 레시피가 잔뜩이었던 정겨웠던 그곳.  /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김윤영(이로이로)

육지것에게 들리는 제주의 진한 사투리는 화가 나신 것도 같고 꽤나 투박하기도 하여 인터뷰 때마다 어지간히 긴장을 하고 갔지만 이제는 제법 알아듣고 끄덕거릴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매번의 인터뷰가 제주어 듣기 평가이기에 삼촌들의 표정과 손짓에 더 집중하며 어르신들을 만나 뵙고 있다.

하도리에서 이로이로라는 디자인 회사를 운영 중이며 취향에 맞는 디자인을 제안하고, 관련된 여러 클래스들도 운영 중이다. 국립제주박물관, 제주농업기술센터,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 등 제주의 콘텐츠들을 디자인하고 만들고 있다.

육지에서 제주로 이주한지 10년 차,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그림으로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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