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63) 서귀포시 서귀동 김경자 어르신 ①

산남지역의 대표 상설 전통시장인 서귀포매일올레시장(올레시장)은 제주를 사랑하는 관광객들과 외국인들로 늘 북적이는 곳이다. 제주의 음식 문화와 생활사, 산업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가장 생생한 공간이 시장이라 서귀포로 넘어 올 기회가 있다면 꼭 찾는다. 

제주시 동문시장과는 사뭇 다른 정취와 방문객들의 표정도 조금은 차이가 있다. 지역민들이 찾는 전통시장이 관광시장으로 변모하면서 서로 나누던 정과 정겨움이 사라졌다며 아쉬움을 토로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시장 구석구석 천천히 걸으며 하나씩 살펴보고 있노라면 아직도 서귀포지역 ‘로컬들’의 이야기와 흔적이 공존하고 있다 느낀다. 

특히, 내가 올레시장을 좋아하는 이유는 동문시장에는 없는 제주떡을 팔기 때문이다. 바로 상외떡이다. 안에 팥앙금이 들어가 있는 동그란 찐빵도 사실 상외떡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상외빵은 보릿가루나 밀가루에 탁주나 쉰다리를 넣어 발효시켜 쪄낸 떡이다. 식감이 빵 같기도 해 상외빵이나 술빵이라고 부른다. 

특히 나는 아무런 소도 넣지 않고 길쭉하게 성형해 쪄낸 빗상외떡을 무척 좋아한다. 제주의 할머니들께서 명절이나 제사에 많이 올리셨다는 빗상외. 슴슴하고 담백한 맛이지만, 구수한 막걸리 향이 솔솔 올라오는 이 떡은 씹으면 씹을수록 매력이 넘친다. 냉동실에 보관했다 쪄서 먹을수록 더 맛있는 제주의 여름철 떡이기도 하다. 막걸리를 넣어 발효했기 때문에 쉬이 쉬지도 않는다. 제주시 사람인 나는 동문시장에 이 길쭉한 빗상외를 사들일 수 있는 곳이 없어 아쉽다. 그래서 더더욱 우리 집 냉동실에 빗상외를 쟁여두기 위해 올레시장으로 자주 가는 편이다.

/ 사진=김진경
서귀포매일올레시장의 한 점포. 상외떡이란 단어가 정겹다. / 사진=김진경

감사하게도 올레시장에는 빗상외를 파는 곳이 서너 곳이나 있어 미리 주문하지 않아도 언제든 가면 살 수 있다. 그리고 시장에서 하나밖에 없는 이 제과점에서도 빗상외를 판다. 서귀포 올 때마다 들리는 빗상외 단골집이다.

시장의 이 작은 빵집은 어르신들이 우리 집처럼 드나들며 빵을 사고 계셨고, 60대 중반 즈음의 어머님이 손님을 맞이하고 계셨다. 고급빵, 대판카스텔라, 소판카스텔라, 크림빵, 찐빵. 우리가 아는 평범한 옛날 빵집이었다. 평범한 옛날 빵집이지만 생각해 보니 이젠 동네마다 평범한 옛날 빵집은 한둘씩 없어지고, 그 자리를 프랜차이즈 빵집들이 채워가고 있거나 요즘 트렌드의 빵집들이 자리를 잡아 있는 경우가 많다. ‘이제는 과연 평범하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레시장의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이 빵집 ‘정옥제과’를 운영하고 계신 김경자 삼춘은 1960년생. 예순이 넘은 제주도 토박이시다. 빵집과 함께 한 지 40년이 넘었다. 원래 이 빵집은 오래전부터 다른 할머니가 운영하시던 곳이라 했다. 김경자 삼춘은 어떻게 이곳을 운영하고 계셨을까? 나는 궁금해졌다.

제주시 무근성에서 태어난 김경자 삼춘은 5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북초등학교를 63회로 졸업하고 중앙여중을 졸업했다. 아버지가 동사무소를 다니시다 건강이 나빠지셔서 일할 수가 없어, 어머니가 아이들 공부시킨다고 이곳저곳 일하면서 고생을 많이 하셨단다.

/ 사진=김진경
어린 시절의 김경자 삼춘. / 사진=김진경

“여기저기 일 찾아보다 마땅치 않아 집에 조금 있었는데 주위에서 빵집 가서 일하면 재밌다고 해서 화북 만나제과에서 열일곱 살에 들어가서 일했어요. 사실 학교도 가고 싶었지. 그렇지만 어머니 혼자 이 일 저 일 하시면서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는 것을 뻔히 아는데 제주여상 시험 떨어지고는 그냥 일이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주위에서 빵집에 들어가 일하면 재밌다고 알려줘서 바로 화북에 만나제과에 들어가 일했어요. 그곳에서 빵 기술자였던 남편을 만났고. 그때 화북공단에 있던 만나제과는 공장처럼 막 큰 빵집이었어. 직원도 한 몇십 명 있었던 거 닮아.”

만나제과에서 남편분과 만나 함께 한림빵집으로 옮겼다. 한림빵집에서 남편은 빵을 만드는 일을 했고 삼춘은 카운터를 보며 빵을 매대에 정리하고 홀을 관리했다. 당시 빵집에서 데이트하는 십대와 청춘들이 많았다. 가장 인기 있었던 메뉴는 만두. 그래서 제주도의 많은 빵집에서 만두를 팔았다. 

사실 화북 만나제과에서 일할 때 임신하게 됐다고 고백하셨다. 친정 부모님은 너무 어린 큰딸이 임신했다는 소식에 반대를 심하게 했다고 했다.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채 남편과 함께 살다가 첫째를 친정집인 무근성에서 낳았다. 그리고 바로 둘째 딸도 태어났다. 둘째 딸이 8개월이 되었을 즈음 서귀포매일시장(현 올레시장)의 정옥제과로 오게 되면서 온 가족이 서귀포로 둥지를 틀게 되었다. 

그런데 왜 빵집이 정옥제과인지 여쭤보았다.

“내가 처음에 남편이랑 여기 올 때 계셨던 할머니 말고, 그 전에 처음 빵집을 했던 할머니 성함이 정옥이라 정옥빵집이라고 했다네요. 우리가 처음 왔을 때는 두 번째 할머니였어요. 그 할머니가 이야기하기론 십 년도 넘은 빵집이라고 하셨어. 그땐 대부분 빵 기술자들을 들여서 남자들은 빵을 만들고 할머니들은 팔기만 하면 되니까 빵집 운영하는 것이 막 피곤하지는 않았어. 할머니들이 빵 잘 만드는 기술자 있다고 하면 불러오는 경우가 많았어요. 나는 홀 보면서 한 다섯 시까지 있다 청소하고 가고 할머니들은 그냥 앉아서 빵 팔면서 돈 버니까 할머니들이 많이 했던 것 같아. 우리가 정옥제과 들어오면서 손님들이 카스텔라, 크림빵, 곰보빵. 팥빵 막 새로운 빵 만드니 ‘삼춘이 만든 빵 잘도 맛좋수다.’ 이런 말 많이 들었지. 빵 기술자들은 돈도 많이 받는데 우린 그때 집에 없어서 주인네 집에서 공짜로 살면서 돈 조금 받고 하며 애들 학교에 보내고 했지요.”

정옥제과의 빵 제품들. / 사진=김진경
정옥제과의 빵 제품들. / 사진=김진경

이때 김경자 삼춘의 나이는 22살. 당시 정옥제과는 할머니께서 찐빵, 만두, 도나스 정도만 팔고 있었다 했다. 이는 정옥제과 뿐은 아니었다. 당시 많은 빵집 할머니들이 크림빵, 곰보빵. 팥빵. 카스텔라, 롤케이크. 앙금빵 등 빵 기술을 가진 기술자를 고용해 빵을 만들었고 할머니들은 그 빵을 판매했었다. 둘째 딸이 세 살 되던 해, 어느 정도 돈이 모였으니 이제는 우리 부부가 직접 번듯한 빵집을 해 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남원에 새롭게 둥지를 틀고 빵집을 열었다. 그 빵집의 이름은 ‘남원제과’.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당시에 남원에서 남편의 빵은 잘 팔리지 않았다. 빵을 못 만드는 사람도 아닌데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모아뒀던 돈은 점점 바닥이 되었고 빵집을 넘겨야 하는 상황까지 왔다. 

“우리가 남원에서 빵 장사는 비록 망했지만, 그거 하나는 얻어서 나왔어.”

빵 대신 더 값진 막내 아들을 얻고 부부는 모슬포로 넘어갔다. 남편은 빙그레빵집에서 빵을 만들었고 김경자 삼춘은 모슬포중앙시장 내 방앗간에서 일했다. 그렇게 모슬포에서 3년을 살았단다. 모슬포에 있을 때 마을에서 열어주는 합동결혼식도 올렸다. 부부의 결혼식은 세 아이가 함께했다. 둘째 딸이 여덟 살 되던 해 정옥제과 할머니에게 연락이 왔다. 월급을 잘 쳐줄 테니 다시 정옥제과로 와 줄 수 없냐 권유했다. 나중에 빵집을 넘겨준다고까지 말씀하셨단다. 김경자 삼춘은 안 갈 이유가 없었다.

삼춘은 그렇게 다시 서귀포매일시장으로 돌아왔다. 정옥제과는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였다. 이때가 1988년, 서울올림픽을 하던 해였다. 

그리고 35년이 지난 지금도 정옥제과는 그 자리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아니, 제일 처음 정옥제과가 생기고 난 후 한 번도 매장을 옮기지 않았단다. 시장 내의 다른 빵집들은 다 사라졌다. 시장뿐 아니라 주위에 빵집들도 프랜차이즈 빵집들과 카페들이 들어오며 하나씩 없어졌다. 김경자 삼춘이 봐 왔던 만두를 먹으며 데이트하던 청춘들로 가득했던 동료들을 하나씩 떠나보내는 기분이었다. 

정옥제과와 바로 마주한 이웃이었던 중앙제과, 시장 방앗간 자리의 한일제과, 동명백화점 앞에 거북당, 지금 배스킨라빈스 자리에는 고려당이 있었다. 남군농협 옆에 있었던 돌하르방빵집, 빵집 이름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시장 입구에 자리를 잡았던 빵집까지 하나씩 사라져갔고 지금은 삼춘의 빵집만 남아있다.

파티시에 (Patissier) : [프랑스어] 제과기술자.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로 한자리에 오래 머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삼춘의 성실함과 확고한 직업정신 때문입니다.  /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파티시에 (Patissier) : [프랑스어] 제과기술자.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로 한자리에 오래 머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삼춘의 성실함과 확고한 직업정신 때문입니다.  /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유일하게 서귀포매일올레시장에서 남은 김경자 삼춘의 정옥제과. 햇수를 헤아려보니 적어도 50년은 훌쩍 넘긴 서귀포의 오래된 빵집이었다. 2023년, 지금 함께 정옥제과에 들어온 남편이 만들었던 빵은 지금 삼춘이 직접 만들고 계시다. 홀을 보았던 삼춘의 일은 둘째 딸과 첫째 딸이 돕고 있다. 단 하나 남은 이 빵집이 없어질까 봐 나는 내심 걱정했지만, 인터뷰하는 동안 그 걱정은 아직은 기우인 것으로 보였다. 일흔이 넘었다는 신효에서 빵을 사러 오신 어르신부터 20년도 넘게 단골로 오신다는 중년의 어머니. 매장에 들어오자마자 둘러보지도 않고 바로 늘 사시는 듯한 빵을 집고 계산하고 가시는 손님. 이웃 시장 상인분들까지 둘째 따님이 매장을 봐주지 않았다면 김경자 삼춘과 제대로 인터뷰를 할 수도 없을 만큼 너무나 많은 단골이 정옥빵집으로 방문해주고 있었다. 

2004년 정옥제과를 촬영한 사진. / 사진=김진경
2004년 정옥제과를 촬영한 사진. / 사진=김진경

2004년의 정옥제과 사진을 하나 보여줬다. 전화번호의 앞자리는 훨씬 전부터 바뀌었지만, 간판을 교체하지는 않은 듯싶다. 사진의 여성은 김경자 삼춘의 큰딸. 남편 대신 정옥제과를 삼춘과 함께 만들어 왔다 해도 과언은 아니라 했다.

작년까지 휴무일 하루 없이 직원을 따로 두지 않고 김경자 삼춘이 직접 매일 빵집 문을 여셨단다. 휴무를 두지 않았던 이유는 시장도 문을 닫는 날이 없어서였다. 인생의 2/3를 이 빵집과 함께 한 김경자 삼춘의 이야기를 나는 더 듣고 싶었다.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김윤영(이로이로)

육지것에게 들리는 제주의 진한 사투리는 화가 나신 것도 같고 꽤나 투박하기도 하여 인터뷰 때마다 어지간히 긴장을 하고 갔지만 이제는 제법 알아듣고 끄덕거릴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매번의 인터뷰가 제주어 듣기 평가이기에 삼촌들의 표정과 손짓에 더 집중하며 어르신들을 만나 뵙고 있다.

하도리에서 이로이로라는 디자인 회사를 운영 중이며 취향에 맞는 디자인을 제안하고, 관련된 여러 클래스들도 운영 중이다. 국립제주박물관, 제주농업기술센터,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 등 제주의 콘텐츠들을 디자인하고 만들고 있다.

육지에서 제주로 이주한지 10년 차,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그림으로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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